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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Mar 27. 2024

필터 구해요

당신의 입에 혹은 나의 귀에

너 눈을 왜 그렇게 떠?

왜 동그랗게 떠?


라고 했을 때


눈을 동그랗게 뜬 사람이 잘못일까,

동그란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왜 동그랗게 뜨냐고 족치는 사람이 잘못일까?


나는 눈을 왜 동그랗게 뜨냐고 족치는 사람이다.

눈을 땡그랗게 혹은 똥그랗게 혹은 도오오오오오옹옹그랗게 뜬 사람은 분명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될 수 있으면 그런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닌다.


물론 눈보다 말은 더더욱 그러하다.

조금이라도 말을 함부로 한다고 느껴지는 사람과는 두 마디 이상 절대 섞지 않는 게 철칙이다.


하지만 모든 철칙에 예외가 있듯


단 한 사람,

내뱉는 모든 말이 거슬리는데 아직 손절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의도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람.

그냥 원래 눈이 도오오옹그랗게 생긴 사람.



- 며칠 전에 샀다던 빨간 가디건이 그거야?

  산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보풀이 그렇게 일었니?

  빨래 잘못 돌렸지? 으이그.


- 너는 키가 갈수록 더 크네.

  남편 키 따라 잡겠다. 덩치도 그렇고.


- 나 주려고 요리했어? 네가 요리를 했다고?

  세상에 고맙고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먹니?

  야, 맛 한번 희안하네.


- 고구마를 왜 쪄서 먹니 구워서 먹어야지.

  너는 찐고구마를 좋아하더라? 물렁물렁 물맛나서 찐고구마 도대체 왜 먹는지 모르겠던데

  입맛 참 특이해, 하여간.


- 야, 너무 그렇게 얼굴 구겨서 웃지마. 주름 생기잖아.



후.


오늘 아침에도 한 소리를 들었다.

간만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 나왔는데 툭,

피부가 왜 그렇게 누렇게 떴냐는 말에 밤새 풀린 피로가 다시 머리를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별 생각없이 하는 말이란 거 안다.

나한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저 말들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하나 뿐인 나의 엄마니까.


근데 정말 도대체! 왜 말을 저런 식으로 하는지 모르겠다.

몇주 전에는 세탁기가 고장나서 고치러 방문한 기사님에게 '아저씨' 소리를 하는 걸 듣고 기겁을 했다.


- 전에 왔던 아저씨는 버벅거리더만 아저씨는 딱 보니 척 알고 고치시네요.

 

아저씨는 딱 봐도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보였다.

'기사님' 이라고 해야지 왜 '아저씨' 라고 하냐니까 엄마는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트집이라며 나를 타박했다.


별 것도 아닌 게 아닌데,

아저씨 소리에 기사님의 표정이 썩던데 말이다.



엄마는 꽤나 미인이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껏 저렇게 말을 해도 누구랑 큰 갈등이 없었던 걸까?

키가 150cm정도 밖에 되지 않고 체구도 작지만 얼굴이 조막만하고 큼지막한 눈망울에 코는 오똑하다.

피부도 하얗고 이도 미백을 한 것처럼 환하게 빛이 난다.

나랑은 반대다.

나는 일단 키가 170이 넘고 체구도 크고 얼굴도 거대하다. 눈과 코는 엄마를 닮아 찌그러지지는 않았지만 눈알은 개구리처럼 튀어 나왔고 이가 누렇고 치열도 고르지 않아 아무리 웃어도 엄마의 그 앳되고 사랑스러운 느낌은 나지 않는다.

누가 미인이라며 칭찬하면 엄마는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라고 본인의 미모를 기정사실화 해버린다. 참 당당하다.



그래, 엄마는 예뻐서 남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떠오르는 대로 다 하며 사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못 생겨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도 얻어 맞아서 말을 지나치게 신경써서 하게 되었나 싶다.

뭐,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은 없다. 한때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확실히 없다.

다이어트라도 해볼까 했지만 건강하고 행복한 돼지로 살기 위해 외모를 포기했달까?

어차피 덩치를 줄일 수도 없고 튀어나온 눈을 꾹 눌러서 넣을 수도 없고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

그저 한번쯤 시간을 내어 냉철하게 분석해보고 싶었다.

유독 다른 사람들의 말투에 기분이 상하고 쉽게 넘기지 못하는 예민함의 근원이 어디일지,

어쩌면 정말 저런 엄마의 말들을 이십년 넘게 들으며 함께 살아서 이렇게 된걸까?

엄마는 모든 말을 확신에 차서 한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치 않다. 일단 우긴다.


- 먹다가 남긴 빵 버렸어?

- 아니?

- 내가 포장 다시 씌워서 식탁에 뒀었는데 없어졌어.

- 못 봤는데?

- 집에 엄마 혼자 있었잖아. 혹시 먹었어?

- 아니? 모른다니까 왜 이래?


이런 대화를 나누고 며칠 뒤 그 빵 맛있더라며 또 사오라는 엄마다.

엄마와의 저런 대화가 너무 싫어서 나는 어릴 때부터 말투에서 확신을 제거해버렸다. 무슨 말을 하든 빠져나갈 구멍이 꼭 필요하다. 같다 듯하다 싶다 등의 소리를 자주 하는 것도 그런 방어기제다.

그리고 웬만하면 말 자체를 많이 하지 않는다.


학창시절엔 학기 초마다 말을 못하냐는 소리도 자주 들었고,

가끔 말을 하면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저음이네 라든가 말을 할 줄 알았네 류의 소리를 듣곤 했다.

조심스럽다. 너무 조심스러우니까 입을 떼기가 무섭다. 엄마처럼 우기다가 번복할 일이 생기는 게 극도로 싫다. 또 생각없이 내뱉는 나의 말 때문에 엄마에게 내가 상처 받았듯 누군가 상처를 받을까 두렵다.


그러다보니 나는 늘 살얼음판 걷듯 산다.

말을 정말 신중하게 하려 한다. 어떻게 말하면 상대의 감정이 상하지 않을까, 열 번도 넘게 생각하고서야 입을 뗀다. 나의 글에 구체적인 직업 이야기가 없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어떤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가 행여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이 기분이 상할까 두려워서 말을 하지 못하겠다. 나의 직업에 대한 불평 불만을 토로하면 이 직업이 만족하는 누군가의 기분이 더러울 것이다. 언젠가 직장동료와 점심을 먹다가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한 노동조합의 파업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들의 파업으로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를 했는데 그들도 힘들어 죽겠으니 파업하는 거 아니겠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동료의 아버지가 파업 중이었던 거다.

이런 경험이 쌓이니 늘 조심히 한 마디 두 마디 겨우 하며 사는데 그럼에도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해버릴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밤새 머리를 쥐어 뜯고 다음 날 더더욱 소심한 우울증 환자, 불안장애와 강박에 사로잡힌 예민한 아줌마로 거듭난다.  



조심에 조심,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실수를 하는데

엄마는 어쩜 저렇게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상대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하는지......


신기한 건 엄마는 친구가 굉장히 많은 인싸라는 거다.

저렇게 대충 말하며 살아도 인싸,

나는 늘 상대를 배려하려 노력해도 아싸.


엄마는 대충 말하기 때문에 대충 말하는 사람들의 말도 그러려니 하고 잘 지내는데

나는 조심히 말하기 때문에 조심히 말하지 않는 사람들을 걸러내다 보니 외톨이가 된 걸까?


어쨌든 엄마랑 나는 맞지 않다.

세 마디만 넘어가도 기분이 상해버린다.

제발 말 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삼십년 넘게 말해봤지만 못 고친다. 의도가 있는 게 아니니 의식적으로 절대 고칠 수 없는 부분이다.


말을 걸러주는 필터가 있으면 좋겠다.

대화 주체들의 기분이 상한다 싶으면 경고등에 빨간 불이 켜지는 동시에 목구멍에서 걸러주는 거다.

입 냄새 제거 패치처럼 목구멍에 통증 없이 간편하게 부착하여 거슬리는 말들을 걸러내주기만 한다면 가격이 한 50만원 정도라도 사서 엄마에게 선물할 거다.

아니, 100만원이라도 살 거 같다.


다만 몰래 붙일 수 있어야 한다.


잘때 목 피부에 살포시 붙이면 잠든 사이 목구멍까지 스며들어 다음 날부터 잘 작동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200만원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없지.


있어도 가장 중요한 기능,

몰래 붙이는 게 되지 않으면 부질없다.

엄마는 그따위 것 예민한 니 귓구멍에나 붙이라고 할 게 뻔하다.


역시 가족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스무살에 독립해 이십년을 잊고 살다가 요즈음 다시 같이 지내려니 엄마의 필터 없는 말들에 상처가 너무 심하다.


얼굴이 누렇게 떳다는 소리로 시작한 고된 하루,

지금은 아침보다 더 누렇고 모공도 다 늘어지고 눈알도 시뻘겋게 충혈됐는데

이따 회식까지 끝나고 집에 가면 또 어떤 평가를 들을런지.


엄마든 남이든 눈을 동그랗게 뜨든 네모나게 뜨든 세모나게 뜨든 뒤집어까서 뜨고 희번득 나를 노려보든 신경 좀 끄고 살고 싶다. 엄마가 말투를 못 고치듯 나도 참 듣는 심보를 고치기가 어렵다.


글도 대충 썼다가 누군가의 눈에 동그랗게, 땡그랗게 혹은 도오오옹그랗게 보일까봐 위험한 가지들을 다 쳐내다보니 단물 다 빠진 맹맹한 껌이 되어버린다. 그냥 편하고 재밌는 글을 쓰고 싶은데...... 자판을 두들기는 손 끝에 붙은, 이 망할 놈의 필터는 어떻게 떼어내야 할까?



흠,



엄마한테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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