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성 Mar 26. 2024

칭찬에 춤추던 고래의 망신살

벼르고 벼르다 히피펌을 했다.. 확 볶아야지, 싶다가도 덜컥 용기가 나지 않아 못하고, 드라마 <닥터 차정숙> 소라의 미모에 홀려 그래, 저거야! 미용실 예약까지 했다가 나는 쟤처럼 생기지 않았잖아, 취소하길 서너 차례. 쇄골 아래로 내려온 생머리가 잔주름도, 거대한 두상도, 사각턱도, 누런 피부톤까지도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듯 하여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었다. 마침 예약 잡기 힘든 동네 가성비 미용실에 전화하니 평일 오전에 가능한 시간이 있다고 하여 바로 예약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휴가를 내고 두어시간 만에 변신 끝! 젤리펌도 물결펌도 세팅펌도 아닌 무려 빠글빠글 히피펌인데, 다행히 거울 속에 해그리드는 없다.


휴, 만족! 해그리드 아님 됐다.......싶었는데,

주변의 반응들이 생각보다 더 좋았다.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평생 들을 외모 칭찬을 며칠간 다 들은 것 같다. 열살은 어려보인다, 예쁘다, 귀엽다, 해그리드 아니고 헤르미온느네, 치인트 김고은 닮았어, 구구단 김세정 같아, 진작 하지 그랬냐 등등. 기분이 아주 둥실둥실 두둥실 대기권을 뚫고 나갔다. 김고은? 김세정? 나한테 그런 느낌이 있었나? 전혀 몰랐는데! 우쭐해선 괜히 뽀글한 머리를 헝클어 보고, 묶어도 보고 풀어도 보고,  귀 뒤로 꽂았다가 가르마를 바꿨다가 생쇼를 떨어대니 집안 온 바닥에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이 굴러다니다 발바닥에 쩍쩍 달라붙는데 그래도 좋았다. 실룩실룩 올라가는 입꼬리를 당겨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도 얼굴이 전보다 작아진 듯했고, 안색도 왠지 생기가 넘쳤다. 소심한 불안장애 환자가 아니라 발랄하고 대담한 집시 느낌이랄까?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히피족처럼 보였다.



칭찬은 우울증 환자도 춤추게 했다. 그리고 그러다가 결국 사달이 났다. 퇴근길 마을버스에 앉아 있는데 옆에 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너무 예뻐요. 제 이상형이세요.


쿵,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나 아줌만데, 이게 무슨 소리지? 너무 떨려서 고개를 들지도 돌리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연락처 주시면 안될까요?


와, 이게 얼마만이야? 스물 여섯 출근길에 저녁에 만나 삼겹살을 사주겠다며 쫓아왔던 그 남자 이후로 처음이다. 슬쩍 보니 구두를 꽤 괜찮은 걸 신었다.


나는 쥐새끼처럼 작은 목소리를 겨우 내뱉었다.


- 저 아줌마에요.

- 감사합니다! 꼭 연락할게요!


응?? 아줌마라는데 뭐가 감사하다는 거야?

생각하며 그제야 고개를 든 나는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려 덜덜 떨리는 손을 괜히 콧등으로 가져갔다. 남자 옆에 긴 생머리가 허리까지 오는, 한소희를 닮은 이십대 여자애가 도도한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며칠간 받은 히피펌 칭찬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던 것 같다. 앞 좌석 아저씨의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저 인간만 쥐새끼 같던 내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젠장.


이건 최소 6개월은

나를 우울의 구렁텅이로 처박아버릴 수치심이다.



사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대충 십년에 한번 정도는 하며 살고 있다. 나르시스트의 피가 흐르는 건지, 평소엔 우울하고 불안해 남들이 하는 말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약간의 변화로 조금이라도 칭찬을 듣는 날엔 눈에 뵈는 거 없이, 천지분간을 못하고 막춤을 춰재낀다. 그러다 결국엔 망신을 당하고 다시 세상과 동 떨어진 혼자만의 구석탱이로 스물스물 기어 들어간다. 고2 때 교실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조퇴해서 수치심에 열이 40도까지 오르고 밤새 끙끙 앓았던 적이 있다. 사회 초년생일때도 식당에서 그랬고 망할 히피펌 때문에 최근에 또 이러고...... 정말 자괴감이 든다. 소심하면 소심만 해서 누가 칭찬을 하든 말든 나는 못났어 하며 못났게 살든가, 뻔뻔하면 뻔뻔만 해서 이런 치욕감 따위 대수롭지 않게 넘기든가, 둘 중 하나만 하면 좋겠다. 이건 소심하다가 칭찬 한 마디에 뻔뻔하게 막춤을 추다가 춤 때문에 뻗친 망신살에 다시 저 지하 끝까지 움츠러들고 잊을만 하면 그짓거리를 또 반복하다니 최악이지, 뭐.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지.



그래도 아직 히피펌은 유지하고 있다. 밥 먹다가도 걷다가도 일하다가도 드라마를 보다가도 저 아줌마에요, 내뱉던 그 순간이 흠칫흠칫 떠올라 소름이 쫙 돋지만 어쩌겠어. 거울을 볼 때마다, 이제 누가 머리 예쁘다 소리를 할 때마다 짜증부터 나고 찰랑대던 마을버스 한소희의 긴 생머리가 진리다 싶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대충 십년 주기인 거 같으니까 앞으로 십년은 망신살 뻗는 일 없겠지.


제발 그래야 할텐데.


마을버스 타기가 무섭다. 한소희도, 괜찮은 구두의 남자도, 앞 좌석 아저씨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


오랜만에 참 주책스럽게도 춤을 췄다.


칭찬에도 섣부르게 춤추지 않는 진중한 고래가 되고 싶다.

이전 03화 비냄새 빗소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