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성 Mar 26. 2024

비냄새 빗소리

우울증 치료제

유리를 사이에 두고 보는 비 내리는 풍경은 내게 있어 효과가 꽤 좋은 우울증 치료제다.

후두둑 소리, 습기찬 냄새.

모든 게 완벽하다.


누가 비 내리는 걸 하늘이 운다고 표현했을까?

비는 산뜻하고, 더러운 공기도 씻어주고, 흙냄새도 일으키고, 소리조차 상큼한데!


파란 지붕, 빨간 벽돌 집.

ㄱ자 구조의 가장 구석 방 창가에 널브러져 비를 보며 소리에 집중해본다.

근심이 하나 둘 셋...... 사라진다.


주말에 연락하는 직장 상사

자꾸 비교하며 학원 정보 캐묻는 애 친구 엄마

훑어보며 무시하던 백화점 직원

진미채 좀 더 달라는데 안된다던 구내식당 직원

전철에서 내 앞에 난 자리로 슬라이딩해서 앉은 단발머리 아줌마

말끝마다 “같아” 라고 하는 거 자존감 떨어져보인다던 사촌언니

카톡에 말줄임표 자주 쓰는 게 내가 늙은 증거라는 친구


..... 수십가지 더 있었는데 빗소리에 나머지는 씻겨 내려간 모양이다,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소식만큼 반가운 게 없다.

약속이 취소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될 구실이 생긴다.


”우천시 연기됩니다.“


얼마나 마음을 진정시키는 말인가.


“우천시 취소됩니다. 환불은 카드사 사정에 따라 3~5일 정도 소요됩니다“


이건 더 좋다. 나가지 않아도 되고, 시간도 벌었고, 돈도 번 느낌이랄까. 물론 취소로 서운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난 늘 기쁜 쪽이었다. 그래서 보통 최후의 최후의 최후 순간까지 씻지 않고 기다린다. 약간의 비 예보라도 있으면 약속이 취소되길 기대하며. 그렇게 싫어도 억지로 꾸역꾸역 잡아야하는 게 내겐 약속이다. 고독사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


비가 오면 축축 처진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의 경우는 반대다. 누워만 있고 싶은 평소와 달리 비가 오면 정리정돈된 집 안에서 최고의 시간을 누리고 싶어 조급한 마음이 든다. 늘어진 추리닝에 브래지어는 벗어던지고 신나게 집안 구석구석을 활보한다. 천둥 번개라도 치면 더 흥이 난다. 이불을 털고, 물티슈로 여기저기 보이는 먼지들도 닦고, 세탁기도 돌려놓은 다음 태블릿과 오렌지주스, 컵라면까지 세팅하면 완벽 그 자체. 비가 퍼부어도 나는 젖지 않는다. 안락한 공간에서 유투브와 넷플릭스의 세계로 몰입할 수 있다. 또한 비를 뚫고 나를 귀찮게 집 밖으러 끌어낼 소식은 없다. 빗소리 비냄새 행복할 수밖에.


여행지에서 비가 오는 것도 참 좋다. J들이 빡빡하게 잡아둔 일정들을 모조리 취소하고 숙소에 처박힐 구실이 생긴다. 보송한 호텔 침구에 누워 손가락만 살아있어도 된다. 폰만 만져도 비가 그칠 때까지 시간은 잘만 간다.

갑자기 내리는 비도 좋다. 소개팅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갑자기 후두둑 비가 쏟아져 같이 밥을 먹은 사람의 옷을 함께 뒤집어 쓰고 카페로 달린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과 결혼했다. 갑자기 멈추는 비도 좋다. 우산이 없는 날 회사 건물이서 전철역까지, 딱 그 순간 비가 갑자기 멈추면 영험한 그 어떤 존재로부터 선물 받는 느낌이다. 그리고 전철역 창문으로 다시 퍼붓는 비를 볼 때면 환희가 느껴진달까?


 친구랑 우산 하나를 쓰고 걸어가는 꼬맹이들의 뒷모습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어 미친놈 마냥 소리지르며 낄낄 웃어대는 중고딩들도, 애인 우산 씌워주느라 젖어버린 대학생의 한 쪽 어깨도, 마을버스 정류장에사 우산 두 개를 들고 기다리는 중년의 여자도 모두 아름답다. 나는 우울증이 아니라 조울증이 분명하다. 비만 오면 세상 모든 게 예뻐보이고 기분이 끝을 모르고 치솟는다. 웃기지 않은 유투브를 보면서도 껄껄껄껄, 과자를 뜯다가도 괜히 입꼬리가 씨익, 소파에 눕다시피 앉았다가 아까 똥 싸고 폰을 화장실에 두고 온 걸 깨달아도 덩실덩실 춤을 추며 몸을 일으키지 않나, 누가 연락 한 번이 없네 가 아니라 아싸 아무도 연락없다! 소리가 나오질 않나. 그래, 비는 우울증 치료제가 확실하다. 조울증 치료제는 분명 아니다.



시작되는 순간의 비도 좋고 멈추는 순간의 비도 좋다. 소나기도 좋고 가랑비도 좋고 폭우도 좋다. 실내에서 보는 비도 좋고 사실 밖에서 맞는 비도 좋다. 홀딱 젖은 옷들을 훌훌 벗어 세탁통으로 던지고 따끈한 물로 샤워하고 나오면 평소보다 훨씬 개운하니까. 혼자 조용히 멍 때리며 보는 비도, 엄마랑 통화할 때 들리는 빗소리도, 창문을 열었을 때 훅 들어오는 비냄새도 다 정말 좋다. 산에서 내리는 비도, 바다에서 내리는 비도, 회사에서 내리는 비도, 집에서, 차에서, 길에서, 편의점에서, 코인세탁소에서 내리는 비도 모조리 좋다.


지금도 활기찬 빗소리가 들린다.


간곡했던 부탁도 간곡하지 않았던 부탁도

모조리 거절당해 고되었던 지난 며칠,

이렇게 비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다행히 아직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 하루,

행복의 순간이 조금 더 남았다.

이전 02화 기쁨을 나누면 2할이 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