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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Apr 18. 2024

갑 <여기도 사람이 있어요> 을

중간사람

세상엔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닌 중간사람들이 있다.

회사에서 내가 그렇다.


중간에 끼어 갑의 눈치도 보고 을의 눈치도 보느라

가자미눈이 되어 하루종일 양쪽 눈알이

바깥으로 각자 돌아있다.

오른쪽 눈으로는 갑의 표정을,

왼쪽 눈으로는 을의 동태를 살피느라 분주하다.


갑은 언성을 높인다.

지시한 일을 명쾌하게 처리하지 못했다며 을의 업무능력과 처리속도를 문제 삼는다.

을은 왜 소릴 지르냐고,

갑에게 갑질신고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면서 을은 나까지 끌고 들어간다.

자신의 편에 서지 않으면 나까지 함께 묶어서 갑질신고를 하겠다는 거다.

하지만 난 갑의 편에 서지 않으면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만 같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갑은 을만 괴롭히는 게 아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에게 권위적이고 예민하고 꼼꼼한 상사다.

을 또한 갑에게만 예민한 게 아니다.

피해의식과 열등감이 짙어서 휴가라도 다녀오면 "잘 쉬셨어요?" 를

"(우리 다 고생하는데 너 혼자) 잘 쉬셨어요?" 로 듣는 사람이다.


그런 둘이 만났으니 탈이 날 수밖에.

문제는 둘만 탈이 나면 상관없는데 그 사이에서 등이 터지는 나같은 새우들이 있다는 거다.

을은 밤마다 내게 장문의 문자를 남긴다.


- 무슨무슨 법 몇조 몇항에 의거 어쩌고저쩌고 죄로 갑 고소 예정입니다. 녹취 및 증거 자료 확보 중이니 참고하세요. 저는 윤성님에게 감정 없습니다. 혹시 윤성님도 동조 및 방조죄로 피해보실까봐 미리 문자로 이렇게 알려 드리는 겁니다.


?? 이게 뭔 소린지,

아이들을 재우려고 함께 누워있다가 저런 날벼락 같은 문자를 받으면 토가 나올 것만 같다.


그러고 다음 날 출근하면 을이 없다.

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자긴 을의 휴가를 허락한 적이 없는데 멋대로 출근하지 않았다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펄쩍펄쩍 뛴다.


- 말도 없이 출근을 안한 거에요?


물어보면,

쉬고 싶다고 말은 했으나 본인이 허락한 적이 없으니 이건 무단결근이라고 버럭 화를 낸다.

며칠 전부터 오늘 쉬겠다고 여러 차례 말을 하는 걸

옆에서 다른 직원들이 들었다고 한다.


정말 골치가 아프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라지만

한 공간에서 누군가 싸우고 그로 인해 나에게도 피해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고통스럽다.

갑이 지시한 업무를 을이 제대로 하지 않으니 그 일이 다른 중간사람들에게로,

을이 처리한 업무가 갑의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 일도 다른 중간사람들에게로,

갑질에 대한 신고가 들어가면 그로 인한 조사과정에서 협조해야 하니 그 또한 중간사람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일이며,

까딱하면 을의 협박대로 갑질을 방조하거나 동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함께 신고를 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일부분 각색하긴 했지만,

요즈음 나의 현실이 이러하다.

출근하면 퇴근할 때까지 거의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다.

언제 또 고성이 오갈지 모르니 불안하고

서로 싸우면서 다른 중간사람들에게 내 말이 맞지 않냐 동조를 구하고

둘중 누구 하나가 화장실이라도 가면 나머지 사람들을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하는데 아주 돌아버리겠다.


갑은 권력이 있고 을은 갑질신고라는 방안이 있다지만 중간사람들은 어떻게 구제받아야 할까?

갑에겐 을을 함께 욕하며 인사고과를 챙기고,

을에겐 갑을 욕하며 직장내 괴롭힘 신고 협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그러다 들키면 인사고과도 망하고

직장내 괴롭힘으로 신고도 당하겠지?

갑과 을에게 동시압박 받아야 하는 숙명에 아예 시선을 모니터로 고정하고 있지만

이러다간 눈도 돌아가고 어깨도 빠질 것만 같다.


세상이 어쩜 이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인지.

하긴 내 마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어쩌겠는가?

갑이고 을이고 나발이고

저들 생각 자체를 그만하고 싶은데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들이

끝도 없이 머릿속에서 구현된다.


휴.


이렇게 햇살 좋은 날,

또 슬슬 높아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중간사람들이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자리를 마련해 화해도 시도해보고, 조직 내 갈등 중재 프로그램도 신청해보고, 자리를 피해주기도 하고, 말려도 보고, 설득도 해보고 안해본 것 빼고 다 해봤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잦아들 기미는 없다.

전혀 없다.


갑의 짜증섞인 말투와 을의 앙칼진 쇳소리가 점점 더 데시벨이 높아진다.

광장 한가운데 서서 하루도 빼지 않고 저렇게 머리채를 잡아 뜯고 싸운다. 참 호기롭고 부지런하다.


왜 저러고 사는 걸까?

사실 본인들이 가장 힘들텐데.....

듣다보니 정말 오늘은 나도 대나무숲에 외치고 싶다.


저기요? 여기도 사람 있어요!

갑과 을 사이에 낀 중간사람들이 여기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구요오오오오!

물론 두분 힘드시겠지만,

두분의 고난이 자동사라면 저희의 고난은 타동사니까 저희가 조금, 아주 조금 더 억울하지 않을까요?

저희 좀 구제해주세요. 시끄러워요.

너무 시끄러워서 할 일은 산더미인데

도저히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어요.

제발 그만 싸우세요.

플리즈.



중간사람 구제법 발안이 시급하다.

갑질과 을질에 쌍으로 고통받는 중간사람 구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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