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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Apr 24. 2024

삐빅- 열폭버튼이 눌렸습니다 [3]

부자 동네에서 전세로 살기

세상에 부자들이 많다.

물론 부자가 아닌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나는 부자 동네에서 전세로 산다.


예전에는 세상에 부자들이 많더라도 부자가 아닌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부자 동네에서 전세로 살다보니 세상엔 부자 아닌 사람들보다 부자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면 위화감에 사로잡혀 며칠씩 우울하다.

부의 기준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줄 세우면 나는 어디쯤 서게 될까?

중간에서 조금 뒤로 갈팡질팡하지 않을까?



며칠 전 오랜만에 동네 그녀들과 술을 마셨다.

표면적으로는 밥 한번 먹자! 이지만 가지가지 돈 자랑 남편자랑 자식자랑이 난무하는, 칼만 안든 전쟁터나 다름 없는 치열한 자리였다.

이미 그녀들이 걸치고 온 샤넬, 구찌, 에르메스에 열폭 버튼이 눌린 터라 그 날은 유독 돈 자랑이 콕콕 박혔다.

누구는 다음 주에 하와이로 여행을 간다 하고, 한달 전에는 베트남에 다녀왔단다.

또 누구는 지난 겨울에 이탈리아 로마에 다녀왔는데 참 괜찮았다며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여준다.

4인 가족이 하와이에 한번 다녀오려면 천 정도가 깨지던데 베트남도 몇백은 깨질테고 이탈리아는......

아니, 도대체 무슨 돈이 저렇게 많아서 철마다 해외여행을 다니는 거지?

또 다른 누구는 몇달간 모은 돈으로 스페인에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다며 신이 나서 여행담을 늘어놓고,

또 다른 날 만난 누구는 몇년 곗돈을 부어 호주에 일주일 다녀왔다고 한다.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라 그렇게 시간을 낼 수도 없지만 시간이 난다 한들 그만한 돈도 없다.

다녀보지 않았기에 해외여행이 좋은 줄도 모르고 돈을 그렇게 쓰고 싶은 열망도 크지 않다.

그저 따박따박 월급 받고 무탈하게 하루를 보내고,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소소하게 행복하게 시간이 흐르는 것에 만족한다.



다만 궁금하다.

세상엔 도대체 얼마나 다양한 삶들이 공존하는건지.

누구는 마치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 사먹듯이 하와이로 이탈리아로 베트남으로 번쩍 번쩍 날아다니는데,

누구는 몇달간 사고 싶은 걸 참아가며 돈을 모아 스페인에 다녀오고

다른 누구는 몇년을 열심히 모아 호주에 다녀오고

그러는 사이 또 다른 누군가는 해외는커녕 국내여행도 몇달 돈을 아끼고 모아 다녀오는가 하면

국내여행 안에서도 누구는 호캉스, 누구는 풀 빌라 펜션, 누구는 에어앤비, 모텔, 게스트하우스 등.

끝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어떤 그녀들은 워킹맘인 나를 불쌍하게 본다.

그들은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낮에는 필라테스나 PT수업에 참여하고,

미술이나 음악 같은 고상한 취미생활을 즐기며 집안일 봐주는 이모님을 들여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우아하게 전업주부 생활을 한다.

탄력있는 피부를 유지하거나 다음 해외여행지에 가서 묵을 숙소 따위를 고민하며,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을 만나고 남편과도 사이가 좋다.

그들의 눈에 나는 남편 벌이가 시원치 않아 꾸역꾸역 일하러 나가야 하는,

그래야만 생활이 유지되는,

자신들과는 다르게 힘들게 바쁜 하루하루를 버티는 불쌍한 인생이겠지.

그들은 매월 내 통장으로 꽂히는,

온전히 나의 힘으로 번 돈이 주는 보람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또 다른 그녀들은 워킹맘인 나를 부러워한다.

남편이 적당히 벌지만 더 벌어 여유롭게 생활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받은 학위를 종잇장으로 만들지 않고 사회생활을 한다는 점을 동경한다.

바빠 보이지만 그 분야에서 차곡차곡 실력을 쌓여가는 능력과

아이가 클수록 필요하다는 부모 자식간의 적당한 거리를 일이라는 값진 핑계를 통해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부러움,

또 남편의 경제력에 온 가족이 의지하는 불안 거기에서 파생되는 미묘한 힘의 불균형이 주는 열등감도 느껴진다.

그들의 눈에 나는 매일 아침 단정하게 차려입고 화장하고 나가서 앉아 있을 곳이 있는 멋진 인생일수도.

그들은 바빠서 오줌도 참아가며 자판을 두들기는,

거울 속 개기름이 좔좔 흐르는 얼굴에 기름종이 한번 두드릴 시간이 없는 직장인의 비애를 알지 못한다.



부자인 지인들과 술 자리를 가진 다음 날,

출근길 마주친 경비 아저씨의 모습이 왜 그리도 가슴을 쿡쿡 찔렀는지 모를 일이다.

삼각김밥과 바나나 우유를 드시다가 내게 눈 인사를 건네던 경비 아저씨,

그가 씁쓸하거나 짠하다는 느낌이 아니다.

같은 시간 누군가는 새벽 촬영을 하며 시간당 오백만원씩을 벌기도 하고,

나같은 누군가는 월 이백을 벌기 위해 출근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청소 용역을 뛰기도, 새벽 마을버스를 운전하기도 한다.

어느 청춘이 미국 주립 대학의 도서관에서 전공 분야 서적들에 푹 빠져 있거나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과 논쟁을 펼치며 견문과 학식을 넓히는 사이,

어느 청춘은 노량진에서 강의 앞 자리를 맡기 위해 줄을 서 있고,

또 어느 청춘은 택배 물류센터에서 곧 나갈 택배들을 이고 지고 나르고 있기도 하다.

물론 돈과 행복감이 무조건 비례하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돈이 많고 행복해 보이는 이들에게도 고충은 있을테고

돈은 비교적 적지만 하루하루 훨씬 행복하고 생기 넘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겠지.



뭐 내가 누군가를 질투해서 이런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이 글은 내가 땡볕 아래 개미처럼 일하는 사이 하와이 해변에서 햇살을 즐기고 있을 그녀가 너무 부러워 시작된 글이다.

하지만 하와이 해변의 그녀에게도 사회적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그리운 날이 있고, 그런 날은 나의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는 내가 부럽지도 않을까?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행복의 기준으로 줄 세웠을 때,

나는 어디쯤에 서 있을까 생각해본다.

부의 기준으로는 중간 혹은 조금 뒤로 갈팡질팡이지만

행복을 기준으로 했을 땐 나도 상위 1%에 속하고 싶다. 상류층을 향해 앞으로 하루 한발짝씩 나아가고 싶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소처럼 일했지만

우아하게 커리어를 쌓은 걸로,

해외여행은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는 걸로,

집 구석에 있어도 가족들과 깨가 쏟아지는 걸로,

내 집은 없지만 행복한 걸로 친다.


그래, 이거지.

한번 고개 든 열등감은 신포도의 합리화, 필사적 정신승리까지 가야 끝이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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