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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Jul 03. 2021

스리랑카아부 열전(列傳)

2017.01.15



아부를 처음 만난 건 임지 암파라에서였다 스리랑카 사람인데 스리랑카 사람답지 않게 머리가 굉장히 곱슬했고 두상이 둥글하면서 웃는 모습이 좀 정감 가는 스타일이랄까 콜롬보 가는 야간 버스를 예매하다가 아부를 처음 알게 된 것으로 기억한다 보통의 스리랑카 사람과는 다른 느낌의 살살 웃으면서 다가오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아부의 한국어 실력은 그렇게 출중하지 않았지만 어중간한 4년 체류보다는 나은 편이었으며 놀랍게도 그가 한국에서 체류한 시간은 2년밖에 되지 않았다 96년에 처음 한국에 갔고 2년을 머물다 스리랑카로 돌아왔다고 했다 인천에 있는 파이프 공장에서 일하다가 의류공장으로 옮겨서 지내다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는데 아마 2년 있었다니까 비자가 매끄럽지 못했거나 체류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해외생활의 중요한 매너 중의 하나는 타인의 체류 컨디션을 묻지 않는 것이다  


보통 스리랑카 사람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다녀오면 한국에서 모아둔 목돈에 대한  일정한 소비패턴이 있다 스리랑카 시골마을 기준으로 한국의 임금과는 약 10배 가까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국에서 4년 6개월의 시간을 스리랑카 급여와 비교해 보면 대충 이곳에서 46년 정도의 노동의 시간을 갖게 된다 46년과 4년 6개월 보수적으로 6개월 정도 일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40년의 시간이 되는 것은 맞다 보통 이곳 사람들은 그 돈으로 땅을 사고 집을 짓는다 40년 노동의 가치를 4년 만에 들고 왔기 때문에 집이 최고 우선이다 한국에서 로또 맞은 사람처럼 그동안 가장 한이 되었던 한풀이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돈에 따라 자동차부터 오토바이까지 구매하고 그래도 돈이 남으면 조그만 식당 하나를 열고 내가 언제 한국에 있었느냐는 생각이 들만큼 다시 스리랑카의 소시민의 삶 속으로 잔잔하게 돌아가게 된다 한국에서 한 달에 백오십만원 남짓 만지다 다시 십오만 원을 벌어도 충분히  지속되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름 돈을 불려보겠다는 사람들은 트럭을 사서 회사에 임대를 주거나 시내버스를 사서 직접 운영하게 되는데 최근까지 모두 실속이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트럭 임대는 시시각각 변하는 건설경기에 흔들리고 버스는 차장과 기사가 한통속이 되면 돈을 빼 돌리기가 너무 쉽다 이 두 가지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맘 편히 행복하게 사는걸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아부는 달랐다 그는 내가 있던 암파라에서 콜롬보까지 심야버스가 없는 것을 착안했고 한국에서 모아온 돈으로 집을 짓는 유혹과 차를 사는 유혹과 결혼할 수 있는 유혹 모두를 뿌리치고 모아 둔 돈에 대출까지 받아서 인도산 중고 고속버스 한 대를 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버스 한 대가 두대가 되는 데는 5년이 필요했고 다시 세대가 되는 데에는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암파라 옆 사만투라이에서 멋지게 큰집을 짓고 살고 있고 사만투라이에서 제일 이쁜 부인을 두고 있다면서 자랑했다 (아부는 무슬림) 그래서 아부는 나이가 40대 초반인데 큰딸이 네 살이다 20대 초반에 결혼 못하면 큰일 나는 이곳 문화에서 친구 자식들이 하나둘 결혼할 때 그는 큰딸 돌잡이를 했다고 했다


콜롬보에서 지내기 때문에 그전처럼 자주 대화를 하거나 소통할 기회가 없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는 어느 정도 알 것만 같다 처음에 그가 한국에 보이는 호감은 단순하게 이만큼 잘살게 해 준 나라에 대한 고마움 정도로 생각했다 '사만투라이 무슬림 하층민 아부는 한국 덕분에 좋은 집에 이쁜 부인과 오순도순 살고 있는 성공한 자영업자가 되었다' 정형화된 해피앤딩.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아부는 의리를 아는 몇 안 되는 스리랑카 사람 중에 하나였다 전에 아부는 소주한잔 하다가 넌지시 한국에 인천에서 자신이 어려울 때 자신을 돌봐준 한국인 노부부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그리고 때로는 조금 긴텀의 호의를 베풀며 살 수도 있으니까 그것 역시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 있는 노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안부전화를 하고 있었다 한국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딱 여기까지였다


며칠 전이었다 아부는 나에게 한국에 가기 위한 비자조건을 물어왔다 EPS시험과 정부초청을 제외하고 스리랑카 사람이 방문 목적으로 비자를 취득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했고 지금 아부의 조건으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아부는 은혜를 갚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2년 동안 받은 노부부의 도움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것을 너무 잘 안다 지금은 팔순이 넘은 아부의 한국 아버지는 얼마 전 빙판길에 넘어지셔서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한국 어머니 역시 병수발을 하다 낙상하셔서 또 옆 병상에 누워 계신다고 했다 차 한잔을 마시면서 한국 아버지와 통화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부는 이제 스리랑카에서 잘 나간다 적어도 사만투라이에서는 아부의 수완과 현금 동원력을 따라 올 사람이 몇 없다 아마 아부가 한국에 가서 노부부를 뵙게 되면 아부가 한국에서 받은 은혜가 어떤 식으로 보답될지는 모르겠으나 아부는 벌써 낙상한데 좋다는 아유르베딕(스리랑카 전통약)을 찾아다니고 있다


의리를 알고 신의를 아는 사람과는 오래가도 문제가 없다 믿음과 신뢰에 대한 보답이 이런 식이라면 이 사람과 오래 연락하고 지내도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유가 신의를 만드는 것인지 신의가 여유를 만드는 것인지 깊게 생각해볼 일이다  부디 변하지 않는 신의와 함께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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