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리고 아빠의 엄마
우리 할머니는 올해 여든여덟이던가 여든아홉이던가 내가 군대 있을 때 칠순잔치를 했고 운 좋게 휴가 나온 칠순잔치에서 팔순잔치는 손자가 책임지겠다고 한잔 먹고 호기롭게 덤볐는데 십 년 뒤 맞이한 팔순잔치에 나는 네팔에서 할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런 손자가 되어버렸다 코로나가 왔고 나는 한국에 왔다 왼쪽 볼이 부어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문득, 정말로 문득 할머니의 친정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할머니 이야기에 앞서 친정 이야기를 하면 우리 엄마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실향민 2세대인 아빠와 전라도 정읍의 엄마는 요즘 말로 소개팅을 통해 인연을 맺었는데 엄마는 운도 없게 실향민중에 종갓집 비슷한 집에 시집을 오는 바람에 명절날 정읍에 단 한 번도 가질 못했다(죽은 사람 생일 아침에도 제사를 지냈다) 중학생 때까지는 나도 그런 명절 풍경이 당연하게만 생각했는데 고등학생이 될 무렵 고향으로 찾아오는 친척 고모들과 고모부들을 보면서 또 고모와 고모부에게 명절 음식 한상 차려내는 엄마를 보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놓쳐버린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
포천에서 정읍으로의 여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추석은 그렇다 치고 설날에는 아직도 동네를 돌면서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주는 풍습이 시골 동네에는 남아있었는데 고향에서 잘 나가는 위세의 첫 번째가 고급 승용차 두 번째가 차례에서 절할 때 먼저 일어나는 것 세 번째가 아이들 용돈이었으므로 당시 나에게 정읍행의 선택은 아주 큰 결심임에 분명했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엄마를 대신해 나라도 엄마의 친정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부터 명절이 되면 아침은 이북식으로 먹고 저녁은 전라도식으로 먹었다 왕만두 떡국으로 아침을 먹고 콩나물 잡채로 저녁을 먹었다 아침먹고 부지런히 서울로 올라가서 입석 아니면 특실 선택의 폭이 좁은 기차를 타고 엄마의 친정으로 갔다 외할머니가 나를 환영해주시는 여부와 별개로 엄마의 절반인 내가 엄마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어쩌면 엄마의 DNA 일부가 반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엄마 대신 엄마의 고향을 찾은 나를 이모들과 외삼촌들은 살갑게 반겨주었다 나 역시 엄마 대신 대신 왔노라며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라고 외할머니께 위로의 말씀도 잊지 않았다 엄마랑 할머니랑 영상통화 한번 시켜드리면 그것으로 내 임무는 끝이었다
할머니 다시 우리 할머니로 돌아가서
할머니도 친정이 있고 형제가 있고 고향이 있을 텐데 왜 나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엄마의 친정을 생각하면서 왜 할머니의 친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할머니의 고향은 왜 포천이라고 생각했을까. 잊히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할머니의 친정과 고향과 유년시절의 추억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마당에 대추나무를 보면서 가을이면 그득 열리는 대추와 시원한 나무그늘만 생각했음을 떠올렸다 찌는듯한 더위와 혹한의 추위, 태풍에 부러져버린 몇년전의 나뭇가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음을 반성한다 언제나 할머니는 그렇게 그 자리에 서계셨는데 나는 그렇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우리 할머니는 근현대사를 직격탄으로 맞았다 강원도 춘천의 시골마을에서 오 형제로 자라다가 막냇동생은 사이판인가 군함도인가 징용을 가서 일 년 만에 할머니의 엄마가 해준 신발과 옷으로만 돌아왔다고 했다 '아마 죽었으니까 옷과 신발만 돌아왔겠지' 할머니의 덤덤한 말속에서 세월이 지나도 덮어질 수 없는 무게 같은 것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육이오 때는 피난을 안 가고 그냥 산골에 있을 정도로 산골이었고 그래서 개판이었던 소련군과 의외로 군기가 엄정했던 인민군과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국군, 자유분방한 미군 모두를 할머니는 기억하고 있었다 정전 이후 남으로 내려온 할아버지는 경찰에 입대했고 제복에 반한 할머니는 큰아빠를 낳았는데 할아버지가 알고 보니 서울에 본부인이 있었다는 그 옛날 신파극의 주인공마저 할머니를 비켜가지 못했다 할머니는 그런 굴곡까지 넘어 여기까지 왔다
꽃피는 사월 할머니를 옆에 태우고 할머니 친정으로 길을 나섰다 엄마 친정도 아니고 할머니 친정이라니 가평에는 벚꽃이 만개했지만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었고 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할머니랑 사진 한 장을 못 찍었다 할머니와 데이트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할머니의 형제 이야기, 고향 이야기, 어릴적 친구 이야기들 할머니도 분명히 그 시절 꿈 많은 소녀였을 것인데 나에게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였음을 그동안의 무관심이 이기적인것만 같았다
할머니의 고향 가는 길 그렇게 멀지도 않았는데 왜 이제야 오게 되었을까 할머니도 할머니의 엄마 아빠 산소에 가보고 싶지는 않았을까 북어포와 술 한 병을 사서 차에 실었다 무슨 바위라고 했는데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할머니가 어릴 적 무섭게 뛰어다녔다는 할머니가 신나서 설명하는 그 바위 앞길은 이제 예쁘게 포장된 길이 되었고 강경 근처 무슨 폭포는 할머니가 어릴 적에 친구들과 멱감던 폭포라고 했다 옥수수밭뿐이던 그 산골짜기에 이제는 스키장이 들어서버렸다
사실 할머니의 시골이야기는 나에게 별다를 것들이 없다 친구들과 집 근처 강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산에서 산야초를 캐는 일, 멱을 감거나 서리를 해 먹는 일 같이 나 역시 시골에서 자라면서 경험했던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혀 생각지 못한 '할머니'의 유년시절, 70년 전 이곳이 머릿속으로 계속 오버랩되고 있었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부축해서 할머니의 아버지 할머니의 어머니 산소를 올랐다 봄이 되어 피어난 할미꽃이 만발했고 준비해 간 술과 포를 두고 잔을 따랐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는 그저 무덤에 피어난 잡초를 손에쥐고 뜯어내기를 반복할 뿐 기쁘거나 슬프거나 감정표현이 없었다 오랜 세월이 주는 덤덤함 같았다
할머니는 오빠와 시누이를 만나서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처마 밑에 앉아 눈 녹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졸았다 점심에 먹은 닭갈비가 너무 배불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잠시 북한강변을 달렸다 드라이브는 꽃길 북한강만큼 좋은 곳이 없으니까
길옆 흐르는 강을 보면서 70년 전에도 흐르고 오늘도 흐르고 있는 강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오늘도 이렇게 흘렀다 할머니의 과거를 그리면서 또 앞으로 흘러갈 강을 믿으면서
우리할머니 우리엄마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시라
사랑하는 손주와 아들이 전상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