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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Aug 16. 2021

황소의눈을 쏴라

네팔 무스탕족 전통 활 이야기

포카라에서 활을 쏘게 된 계기는 무척이나 우연스러웠다 당시 나는 네팔에서 집을 짓고 있었는데 첫 번째 집 진도가 중간쯤 왔을 무렵 내 머릿속에는 오직 완성된 벽에 그릴 벽화 생각밖에 없었다 완성된 벽을 그냥 둘지 벽화를 그릴지 아니면 하얀 벽을 이용해서 동네 극장 같은 것으로 활용할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무난한 선택이 벽화 같았다 다만 벽화를 선택하고도 섣불리 실행에 옮기지 못한 건 스스로의 비루한 그림실력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벽화를 그리게 된다면 동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힌두교 부자신 그림이나 사랑의 신 그림 같은 현지인 취향을 저격하는 주제를 삼을지 아니면 동네 아이들이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다나 우주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릴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로 기억한다 한참 번민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1미터쯤 돼 보이는 양쪽 끝을 막은 굵은 플라스틱 파이프를 등에 매고 터벅터벅 현장 앞길을 지나가는 아저씨를 봤다


나는 그 플라스틱 통 안에 멋들어진 네팔 전통 그림이 들어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한국이야 멋진 그림 보관통이 있지만 개도국에서는 두꺼운 플라스틱 파이프로 만든 통을 이용해서 구매한 그림을 포장해준 화가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며 심지어 아저씨는 멋들어진 네팔 전통모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이 아저씨를 화가라고 확신했다


마침 통역을 해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손짓 발짓으로 통을 열어봐 줄 것을 부탁했다 통안에 그림이 마음에 든다면 이 아저씨를 고용해서라도 벽에 그림을 그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통 안에 들어있던 것은 그림이 아니라 '화살'이었다 촉이 날카로운 화살들, 화살대 역시 굵고 깃이 화려한 게 요즘 보기 드문 수작이었다 손짓 발짓으로 나도 반드시 해보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했고 그 아저씨는 손짓으로 공항 반대편 어딘가에서 활을 쏘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줬다 


공사하면서 친해진 철물점 사장님에게도 도움을 구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장님 역시 전통 활쏘기 운동을 하는 궁도인(?)이었는데 위치를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고 지나가는 사람을 만났을 때 보여주라며 길을 물어볼 수있는 네팔어로 된 활터 지명도 적어줬다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발견한 포카라 죽궁 '터' 그렇게 나의 네팔에서의 죽궁 생활은 시작됐다


네팔이랑 처음 인연을 맺은 게 2013년이니까 나와 죽궁과의 인연은 그렇게 짧지 않다 처음에 네팔 죽궁 화살은 해발 2천 미터 이상에서 자라는 가늘고 곧게 뻗은 대나무 세죽(細竹)을 골라 칠면조나 꿩 깃털로 깃을 달고 화살촉도 직접 수제로 만들어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2008년인가 세계 전통 활 축제를 한국에서 했는데 예쁜 화살 만들기 부분에 네팔이 1등을 했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높은 고도에 올라가기도 힘들고 곧게 뻗은 대나무 찾기도 어려워졌을 뿐더러 정교한 활쏘기가 요구됨에 따라 화살이 무려 '카본' 화살로 바뀌게 되었다 화살이 조금 더 가볍고 가늘어서 빠르고 정교한 활쏘기가 가능해졌지만 그 옛날 묵직하게 과녁에 박히던 느낌과는 또 다르다 결정적으로 이 포카라 죽궁은 활쏘러 모여서 차 한잔 술 한잔씩 하면서 사교적으로 활을 쏘는데 나이어린 네팔 신규회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라테는 임마 대나무 화살을 쐈다'는 라테 놀이를 외국인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활터를 찾았을 때를 기억한다 나는 활도 없었고 화살도 없었는데 다들 활은 선뜻 빌려주는데 화살은 선뜻 빌려주지 않았다 과녁을 벗어나는 순간 뒷집 마당에 닭을 강제로 잡아야 되거나 과녁 주변에 벽돌에 맞는다면 화살이 손상되어 정상적인 화살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내친김에 활과 화살을 구매했는데 활이 한국돈으로 만 오천 원 화살이 세발에 만원 이랬던 것 같다 취미생활 입문이 너무 즉흥적이었지만 네팔답게 또 큰 무리가 없었다 


활터의 모습. 날씨가 맑으면 과녁 뒤로 만년설이 보이고 오른쪽 대숲 아래로 계곡은 항상 물소리를 들려준다


그다음부터는 틈만 나면 활을 쏘러 갔다 활터는 한쪽에서 활을 쏘고 다음 과녁으로 가서 왔다 갔다 하면서 쏘는 방식인데 이른 아침에도 쏘고 저녁에도 쏘러 갔다 특히 해 뜰 무렵 설산을 보면서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바람숲소리'를 들으면서 옆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면서 활시위를 당겼다 시위를 당기는 순간 활은 끼-이익하며 비명을 지른다 소리도 시간도 모든 것이 멈추었다가 시위를 놓는 순간 쏜살같이 멈춰있던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탁' 과녁에 화살이 박히면 둘러싸고 있던 모든 스트레스가 화살과 함께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활터의 정확한 정체를 알게 된 건 포카라에 두 번째 갔을 때였다 그때는 집이 아닌 학교를 짓기 위해 떠난길이었는데 아예 삶에 루틴에 활터를 넣어서 매일매일 활을 쏘러 갔다 알고 보니 활터는 네팔에 많은 부족 중에 무스탕족을 위한 공동체 회관이었고 각종 경조사를 치러내는 부족 화합의 장이었다 무스탕족은 겨울이면 산아래로 내려가서 지내다 여름이면 산으로 올라가서 생활하는 부족인데 내가 활을 만나게 된 그때가 마침 무스탕족이 산아래로 내려왔을 때였다 인연은 인연이지 싶었다


활은 아침에 혼자 쏘는 것이 제일 좋지만 같이 활을 쏘는 메이트가 있어도 더 좋았다 네팔에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하는 지긋한 어르신이 활 메이트였는데 젊은이들도 당기기 어려운 대나무 조각 두 개를 이어 붙인 합성 활을 직사로 시원 시원하게 내리 꼽고 계셨고 자연스레 나도 그 방법을 본받게 되어 활을 쏘게 되었다 활터는 정기적으로 활대회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1년에 한 번 부족 1등이라는 명예를 걸고 하는 대회와 매주 토요일 화요일 오후 삼삼오오 모여 팀전과 개인전을 했다 나 역시 빠지지 않고 참여했는데 실력으로 균등 분배하는 팀전에서 상중하로 나뉘는 시드를 나중에 중까지 실력이 올라갔다  


보통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면 네팔어로 '람브로(좋아)'를 활터의 막내가 외치는데 나는 처음 활터에 갔을 때부터 화살이 들어가기만 하면 좋다고 람브로를 외쳤다 외국인이 와서 람브로를 외치고 있으니 활터 형님들이 모두 예뻐라 해주셨고 나는 외국인인 내가 람브로를 큰소리로 외쳐서 나를 예뻐라 해주시는 줄로만 알았다 


활을 한참 쏘다가 문득 토요일은 네팔이 쉬는 날이니 그렇다 치고 화요일 오후에도 활을 쏘러 모이는 형님들의 직업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식당 사장, 숙박업 사장, 임대업자 등 네팔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나에게 밀크티를 사주고 술을 사주고 무스탕 특산물 사과를 한 보따리 가져다주는 특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같이 술 먹고 알게 되었다 활터에 있는 회원 중에는 원래 부자인 사람도 있지만 젊어서 한국, 일본에서 돈을 벌어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 사람이 활터의 절반이 넘었다 활터 회장님은 술에 취하면 한국말을 드문드문하셨는데 술에 거나하게 취한 어느 날 젊은 날 타지에서 고생하는 내 모습이 자신의 젊은 시절과 겹쳐진다고 말해줬다 2008년 몽골 고비사막을 자전거로 혼자 건넜을 때 아버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몽골 학생에게 밥을 사줬다고 했다 한국 집에 계실 아버지가 떠올랐다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취미생활이라 매주 모여서 활을 쏠 때는 소소한 금전도 오고 갔다 팀전으로 할 때는 라면 내기나 50루피정도 소소한 내기를 했지만 과녁 가운데 테니스공만 한 까만 과녁에 맞추면 활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축하금으로 50루피에서 100루피를 줬다 이 까만 과녁을 '황소의 눈' 불스아이라고 불렀는데 모두 쏠 때마다 이곳을 맞추려고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사람이 많을 때는 스무 명도 있었는데 오백 원 천원이 모여 네팔에서는 큰 금액이 되어버렸다 팀전과 개인전을 동시에 할 수도 있고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서 할 수도 있었다 나도 가운데 두 번 맞춰본 적이 있었는데 그동안 얻어먹은걸 다 풀고 갔다 그만큼 나에게 살가운 분들에게 나 역시 살갑고 싶었다 


화살을 실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 말군으로 나누고 팀의 대장이 랜덤으로 하나씩 뽑았다 수제 화살이기 때문에 개인별로 화살이 다 다르다 그렇게 팀을 정해서 팀전을 했다 


활터가 좋은 이유는 관리인 아저씨가 항상 상주했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관리인 아저씨 이름은 이름이 '뱀'이었는데 가족이 아예 회관에서 살았다 아침에는 차를 줬고 간단한 음식을 부탁하면 그 자리에서 만들어줬다 가격도 무척 쌌기 때문에 잔돈은 의례 아저씨 담배 피우시라고 남겨드렸다 아저씨는 매주 있는 정기전에서 심판을 보시기도 하고 과녁을 관리하기도 했다 한국도 그렇듯 어찌 보면 '을'의 입장이 될 수도 있었는데 나는 항상 활을 처음 쥐어준 선생님처럼 생각하고 가끔 술한병씩 사서 몰래 넣어드리곤 했다 


네팔에 있을 때 나에게 가장 친절하고 가족처럼 대해준 활터 형님들을 잊지 못한다 개도국 스타일대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현지인에게 지쳤을무렵 활터 형들은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는 네팔 사람이었다 나를 돈으로 보지 않고 순수하게 막내 취급해줬던 분들. 지금은 코로나로 연락이 어렵지만 부디 건강하시길 빈다 포카라에서 다시 활시위를 당길 그날을 고대하며 


형님들 부디 건강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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