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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Aug 17. 2021

공포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2017.08.15


ENTP의 사고방식은 스스로 생각해도 남다르다 보통 실행에 옮기기까지의 의식의 흐름이 예사롭지 않은데 산에서 혼자만의 캠핑을 선택한 계기도 장준하 선생의 평전을 읽은 직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장준하 선생의 역동적인 인생사가 애잔하기도 했지만 '의리'와 '절개'로 점철된 삶 자체가 존경스러웠으며 그 최후마저 미궁에 빠짐으로써 깊은 슬픔의 완성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죽은 자리, 그것도 의문사한 자리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장준하 평전을 한번 더 읽으며 이루지 못한 큰 뜻을 애도하기로 했다 


선생이 의문사한 약사계곡은 집에서 멀지 않다 한 시간에 한대지만 한 번에 가는 버스도 있었고 집에 캠핑장비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짐을 챙겨 길을 나섰다 캠핑에 어울리지 않을 장준하 평전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 해보는 홀로 캠핑이었지만 집에서 멀지 않다는 점이 조금은 편안했고 누군가 의문사한 자리라는 것이 조금은 두려웠다 버스 종점에서 이십 분 정도를 걸어 약사계곡에 도착했다 선생이 의문사하신 자리에는 자리를 기념하는 표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앞 텐트 치기 좋은 너른 바위는 사고당시 의식이 혼미한 선생을 모셔두고 이송을 기다린 자리라고 들었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텐트를 쳤다 


준비해 간 술을 붓고 묵념을 한 다음 텐트에서 책을 읽었다 더운 여름 시원한 계곡에서 책 읽기는 또 나름의 매력이 있었고 또 이것이 의미 있는 장소에서 하는 의미 있는 행동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책 읽기에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라면을 끓여먹었다 랜턴을 준비해 갔지만 계속 켜고 있을 이유도 없었고 계속 끄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어두운 텐트 안에서 나는 갑자기 공포를 느꼈다 낮에는 시원하기만 했던 계곡의 물소리마저 두려움이 되었고 스산하게 부는 바람에 펄럭이는 텐트 소리가 두려움이 되었다. 두려웠다 여기는 산이고 누군가 의문사한 장소였으며 나는 홀로 있었다


한참을 그러다 문득 나는 무엇으로부터 공포를 느끼게 되는지 냉정하게 돌아보기로 했다 당시 나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 첫 번째는 야생동물이 있었는데 멧돼지 말고는 나를 위협할 수 있는 동물이 근방에는 없었으며 그나마 멧돼지보다 덩치가 큰 나를 돼지가 먼저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두 번째는 나에게 해를 가할 '사람'이었는데 나에게 해를 가할 사람이었다면 진작 해를 가하고도 남았을 거란 생각과 남에게 해코지를 당할 만큼 척을 지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이 시간에 이 계곡을 올 사람도 만무했다 세 번째는 모든 것을 초월한 영적 존재 '귀신'이었는데 장준하 선생같이 큰 위인을 기리고자 술을 붓고 책을 읽었는데 과연 이 자리에 어떤 귀신이 나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그리고 귀신이 존재할리 만무했다 


불안에 떨다가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바람에 스치는 텐트 소리도 잔잔해진 것 같았고 계곡의 물소리도 은은해진 것만 같았다 야외에서의 거친 자리가 단잠을 주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악몽을 꾸거나 불안한 잠을 자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을 맞이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면서 문득 큰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흐르는 계곡을 바라보면서 빙긋 웃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감고 한참을 있다가 다시 눈을 떴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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