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일이니까 당연히 할아버지도 언젠가 죽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그 부고를 듣고서 나는 과연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쉽게 결정 내리기 어려운 일이었으며 차라리 내가 해외에 있을 때 부고가 온다면 처지를 핑계로 '그냥 그렇게' 넘어가기를 간절히 바랬는지도 모른다.
제주도에서 집으로 올라온 늦은 점심. 버스터미널로 나를 마중 나온 엄마가 안부 뒤에 덤덤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돌아가셨대"
"그래.. 그렇구나.."
신호 몇 개와 과속방지턱 몇 개를 넘을 동안 정적이 흘렀고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운전하면서 몇 달 전부터 할아버지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으며 서울에 있는 '그 사람'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아빠와 간간히 연락했다는 소식을 나에게 전했다. 나는 엄마로부터 소식을 듣자마자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 육친의 부고를 듣고도 슬프거나 감정의 동요가 없는 내가 과연 옳은 사람인가에 대해서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할아버지는 해방을 15년 앞둔 강점기 한복판 이북에서 태어났다. 강원도 이천군 개미골인가 광탄골인가 하는 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며 해방 이후 경찰을 하다가 전쟁 때 피난을 와서 할머니를 만났고 아들 셋을 낳았으며 서울에서 또 결혼을 해서 아들 둘을 낳았다. 나와 생물학적 유전자가 일치하는 할아버지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내가 초등학생쯤으로 기억한다 일 년에 두어 번 명절에 내려와서 제사를 지낼 때 작은할아버지한테서 용돈을 받아가는걸 몇 번이나 내 눈으로 봤는데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쯤 더 이상 포천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건강 문제 때문이라고 했다. 유년시절을 포함한 내 삶 속에서 '할아버지'는 딱 티끌만큼 존재했다. 오욕과 상처로 굴곡진 아버지 형제의 성장기와 우리 할머니의 뼛속 깊은 고통을 들여다보게 될 때쯤부터 '우리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동생인 포천에 있는 작은할아버지였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기로 했었다.
아버지 형제의 상처의 역사는 말로 하기 어렵다. 전쟁 이후 베이비 붐 세대에 태어난 자식 세명을 마누라와 함께 자기 동생 근처에 방치해 버린 것이 할아버지였다. 생존을 위해 시골 광산마을에서 몸부림쳤을 네 모자의 움직임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가혹했다. 큰아버지는 옷이 없어서 운동복을 입고 혼자서 육사 시험을 쳤는데 신원조회에서 떨어졌고 작은아버지는 그나마 돈을 구해서 옷을 입혀서 시험장에 보냈는데 공사 시험 신원조회에서 떨어졌다. 그때만 해도 호적이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국가시험의 문턱은 굉장히 높았으며 '연좌제'가 이런 식으로 사람 발목을 잡았다. 신정국가도 아니면서 인간의 '원죄'를 물었다.
무엇보다 슬펐던 건 아버지 형제들이 느꼈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내 아버지가 어릴 적 할아버지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고 작은 아버지와 함께 며칠을 나무를 해다 팔아 서울에 갈 수 있는 차비를 마련했다고 했다. 그리고 날을 잡아 서울에 올라갔는데 서울 할아버지 집 담벼락에서 숨죽여 울기만 했다고 했다. 담 넘어 평화롭고 아름다운 가정에 이 두 사람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고 그랬다. 그때가 내 아버지가 6학년 었고 작은 아버지가 4학년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동생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다시 집에 왔다고 했다.
우리 할머니는 어떠한가 90년대 전국을 휩쓸던 '아씨'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이 드라마 내용이 할머니의 삶의 궤적하고 똑같았다. 할머니는 매번 이 드라마를 가슴을 치면서 눈물로 봤고 우리는 그런 할머니를 말릴 수도 응원할 수도 없었다. 몇 년이 지나서 아씨에 나왔던 선우재덕이라는 배우가 '캐슬'이라는 레스토랑을 집 근처에 오픈했는데 할머니는 극 중에서 두 집 살림을 하던 선우재덕을 아직도 사무치게 미워하고 있었다. 할머닌 경양식집에 나온 좋아하는 돈가스를 속이 안 좋다면서 한입도 먹지 않았다.
서울 사람들과의 불화까지는 적지 않는다. 가정사를 이렇게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고통스러운 일임에도 이것을 기록으로 적어서 남기지 않는다면 우리 할머니와 우리 아버지 형제들의 고통과 한스러운 세월이 손위에 모래처럼 바람에 흩어져버리는 것 같기에, 이것이 너무나 억울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결심으로 글로 남겨 정리하기로 했다.
코로나 때문인지 장례식장 섭외가 어려웠다. 내가 나설 일이 아니지만 은근히 신경 쓰이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엄마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마당 의자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장례식에 가고 안 가고 이것조차 강요할 수도 없었고 부탁하기도 어려운 관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사촌동생에게 전화를 걸고 작은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부고를 전했다. 결국 올게 왔지만 아무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그런 것 같았다 분명한 건 전화 속 할머니 목소리는 무척이나 덤덤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이런 순간을 대비해서 할머니 주변 모두는 할머니에게 강요에 가까운 주입식 교육을 했다 '잊으시라' '제발 잊으시라' 그 고통과 고생의 순간을 잊으시라.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할머니를 둘러싼 모두는 그렇게 잊으라고 부탁하고 또 당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감정이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어차피 서울에 병원에 가야 하는 길이었으므로 가는 길에 아버지를 내려주고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냥 옷만 좀 어둡게 입으면 되겠지 딱 그런 느낌이었다. 정말 걱정이었던 건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보다 그것 때문에 겨우 아물어가는 우리 아버지의 상처가 벌 어질 것 같아서 그게 걱정이었다. 새벽에 누가 집 초인종을 눌렀다. 주변에 사는 이웃이었는데 우리 밖으로 나온 암 거위 한 마리를 차로 치었다고 했다. 거위는 이미 절명했고 빠른 속력이었는지 거위털은 이미 사방에 흩날렸다.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보다 거위의 죽음에 더 화가 났다. 지갑을 만지작 거리면서 얼마를 물어주면 되겠느냐는 이웃에 물음에 나는 그만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고 지금 그런 소리를 하시냐"며 쏘아붙였고 엄마는 사람 안 다쳤고 차 안 망가졌으면 됐다고 그랬다. 이제 우리 집 거위는 숫 거위 하나 암 거위 하나가 남았다.
며느리인 우리 엄마 입장도 그랬다 시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과 미움을 떠나 시아버지는 며느리에 관심 자체가 없었으므로 아버지는 엄마에게 아무것도 말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우리 엄마는 죽은 사람 생일까지 챙기는 이북식 제사들을 내가 서른이 다되도록 준비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넌지시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곤 부끄럽다고 했다. 돈이 많은 집에서 장례식 이후에 재산 갈라먹자고 싸우는 것도 아닌데 그냥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고해를 했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이것은 우리 아버지가 택한 '원죄'가 아니다. 나는 그냥 우리 아버지를 꽉 안아주고 말았다.
아버지를 내려주고 병원에 다녀온 다음 할머니를 보러 갔다 그냥 통닭 한 마리 시켜서 아무 소리 안 하고 같이 먹었다. 긴 침묵 끝에 넌지시 할머니 친정에 가고 싶지 않냐고 내일 춘천으로 바람 쏘이러 가자고 했는데 할머니는 아직 춥다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장사가 끝나고 가자고 했다. 우리 최 권사는 교회를 그렇게 열심히 다니는데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되는 것인지 당신네 예수께 한 번쯤 묻고 싶었다.
작은아버지는 부고 다음날 아침부터 연락이 안 됐는데 지금 이 순간 가장 고통받을 사람이 어쩌면 작은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유난히 공부를 잘했던 작은아버지는 공부하지 말고 농사나 지으라는 모두의 반대를 엎고 명문대에 진학했으며 대기업에 취직했다. 공사를 못 간 한을 이렇게 풀어냈다. 그리고 아침 통화에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잠수를 탔다. 걱정돼서 작은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술은 먹고 있지 않다고 했다. 육친의 죽음이 이렇게 상처를 들춰내는 일인가에 대해서. 끝인데 끝이 아닌 상처의 고리가 무척이나 견고해 보였다.
저녁쯤 술 한잔 마신 목소리로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필요한 것은 없으며 내일 화장을 하니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보통 이런 일에 부탁을 하지 않고 명령조에 익숙한 아버지가 부탁을 하는 일은 지금도 아버지 내적으로 무척이나 복잡한 감정선이 오고 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4월 2일 토요일 열 시. 원래 계획은 정경모 선생 추모비 제막에 갈 예정이었다. 추모비는 모란 화장터는 벽제였다 경기도 반대와 반대. 육친께서는 죽어서도 이렇게 발목을 잡으시는구나 뭘 서로 이런 정을 주고받을 게 있다고 또 이러시는지. 육친의 죽음이 우선이 아니고 죽은 지 일 년이 넘은 사람의 추모를 하려는 내가 우스웠다.
벽제에서 아버지를 데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내내 잠만 잤다 돌아와서도 잠만 잤고 아버지는 이틀을 더 자다가 출근했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잊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니듯 그냥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와 버렸다
마치 언제 누가 이 세상에 있었냐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