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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May 23. 2021

정들었던 갑상선을 떠나보내며 1


우간다 파견을 마치고 귀국 건강검진을 받았다. 작년 스리랑카 귀국 후 받았던 검진에서 갑상선 오른쪽 9미리쯤 되는 결절은 그대로인데 왼편에 전에 없던 6미리짜리 결절이 생겼다고 했다. 주위 모양도 좋지 않고 색도 좋지 않으며 생김새도 안 좋다고 했다. 우간다 다녀와서 바로 일본에 다녀오는 바람에 건강보험이 바로 적용되는 상태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검사는 받아야 했으니까 16만원인가를 내고 무보험으로 검사를 신청하고는 바늘을 목에 찔러 넣었다. 차가운 바늘이 몸안에 있다는 이질감이나 불편함보다 ‘이런 검사를 해야 한다’는 자체가 순수하게 불쾌했다.

 

개도국이 어떻다는 지표를 따지고 들 때, 본인 스스로가 깔끔하고 정갈한 비교를 위한 숫자를 무엇보다도 강조해왔고 암 발병율도 당연히 그 척도가 되었으므로 대략적으로 대한민국 사람 몇 프로가 이러한 질병에 노출되어있는지 평소에 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내가 들었다는 생각이 우스웠다. 내가 결절이라니... 좋은 걸로는 대한민국 소수에 들지 못하는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나마 소수에 들었다는 것이 웃기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건 ‘나쁜 기억의 해프닝’ 정도로 끝나거나 지나온 인생에서 수없이 겪었던 다시 기억하기 유쾌하지 않을 그냥 그렇고 그런 기억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5일 동안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귀국 했으니까...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마셨고 평소와 다름없는 삶을 살면서 다음 파견국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을 때였다. 조직검사를 안내했던 간호사의 말이 결과에 별 내용이 없으면 전화하지 않고 별게 있으면 전화로 연락을 준다고 했었으니까 전화가 온다는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검사를 받고난 5일째 아침 10시쯤이었을까 사무실에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아무 생각없이 받은 전화는 세침검사를 안내하고 보조했던 그 간호사였다. 병원에 한번 내원하셔야겠다고.. 전화기 너머 간호사는 이런 일이 무척이나 익숙한 듯 전화를 빨리 끝내려고만 했다. 검사결과 뭐가 있으니까 나를 부르는 것은 맞는데 ‘갈 때 가더라도 병명이 뭔지는 알고 가자’면서 전화로는 내용을 알려주기 힘들다는 간호사에게 떼를쓰며 애원했다. 체념한 간호사는 갑상선 유두암 이 높은 수준으로 의심된다고 했다. 유두암이 뭔지도 몰랐지만 암은 암이었으니까 암이라는 소리를 듣고 멍해졌다. 일어나서도 안 되고 생각도 해보지 않은 일이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부장님을 찾아가 상황을 말씀드리고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사무실에서 병원 가는 버스가 그렇게 무섭고 길었다. 세침검사를 했던 의사는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굉장히 덤덤하게 말했다 세침검사의 단계가 있는데 1부터 6단계 중 5단계에 속하며 90%의 확률로 유두암일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냥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면서 검사 슬라이드와 3차병원 예약을 도와주었다.

 

해외에서 처음만나는 신입 봉사단원이나 후임 봉사단원을 만났을 때 늘 강조해왔던 말 중에 “그건 너 일수도 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1년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기위해 집 현관을 나서는데, 그중에 내가 해외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죽음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면서 심지어 불쾌한 일을 당할 것으로1도 예상하지 않고 나가는 해외이니까 제발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 달라고 인이 박히도록 말했었는데 내가 암에 걸렸다. 나는 해외봉사에 연관된, 타인을 위한 삶을 살고 있으니 천국은 못가더라도 저 바닥까지는 떨어지지 않겠거니 라는 생각을 무심결에 했었는데 무의식중에 해왔던 나쁜 영향들이 이렇게 상계되어 암으로 왔는건가 하는 자괴감까지... 나는 아닐 줄 알았는데 피해가지 못한 소나기를 맞으면서 누구를 향해 원망을 해야 되는 것인지 몰라서 더 막연해졌다.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 가서 진료를 했다. 의사와 첫 면담이었는데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나에게 의사는 바로 “자를래요 말래요?”를 물었다. 갑상선을 자주 자르시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내 갑상선이 무슨 손톱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적 유치원에서 아이들 손톱이 길면 손톱 잘라주기 좋아하시는 유난히도 자상했던 원장님이 물어보던 “자를래요 말래요?” 같은 느낌이었다. 살면서 본인 갑상선에 얼마나 신경 쓰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만은 자른다니까 무척이나 서운했고 내 소중한 갑상선이 손톱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한번 더 서운했다. 조심스럽게 갑상선과의 준비되지 않은 이별에 대해서 굉장히 슬프다고 말했다 아니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우리 이대로 같이 살게 해줄 수는 없는 거냐고 오래된 연인과의 구질구질한 이별처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의사는 그럼 아직 크기가 작은 편이니 6개월 뒤에 추적관찰을 하자고 했다. 일단 결절의 위치가 갑상선 한복판으로 위치가 좋다고 했다. 위치가 좋다고 말했는데 갑상선 암이 다 나은 것처럼 희망의 기분을 맛봤다. 위치가 좋은 거다 위치만.


우간다 난민캠프에 봉사단을 보내고 관리하면서 각자 주어진 인생의 괴리 같은 것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난민캠프에 몰려든 전쟁난민을 울타리 밖으로 보면서 나는 한 병에 500원짜리 대안 없는 생수를 마셨다.  난민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생활 보조금이 한 달에 2불 남짓인데 나는 한병에 500원짜리, 500미리 생수를 목이 마를 때면 한 번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수도인 캄팔라에서 네 시간 거리에 위치한 캠프를 이따금씩 왔다 갈 때면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다는 고생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보상으로 캄팔라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한판에 500그람, 2만 원짜리 남아공 산 비육된 티본 스테이크를 미디움 레어로 먹었다. 그런데 사실 그 스테이크를 먹을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나도 사람이고 난민캠프에 있던 수용자들도 사람이며 캄팔라 시내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사람이었다. 그런데 달랐다 달라도 너무나도 달랐다.


우간다에서 한국으로 오는 귀국 비행기는 일정이 복잡한 편이었다. 문명의 세계로 순차적으로 차오르듯 우간다에서 케냐로 케냐에서 아부다비로 마지막으로 아부다비에서 인천으로의 여정이었다. 쉽게 정리되지 않을 글처럼 머릿속이 복잡하다. 파견의 마무리를 위해 서울 사무실에 출근하고 점심시간 사람들로 붐비는 그횡단보도를 나 역시 ‘먹기 위해’ 걸을 때,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 왜? 그리고 어떻게 사는가?’ 에 대해서 끝나지 않을 고민을 안고 살던 와중에 갑상선 결절에 대해 통보받았고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모든것이 잘 편집된 영화의 한장면인것만 같았다


병은 자랑을 해야 낫는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갑상선 질환의 경우, 특히나 암일 경우 다들 주변의 반응이 서운하리만치 낙관적이었다 ‘예후가 좋은 암 이라더라’부터 ‘착한 암 이라더라’, ‘그거 잘라내기만 하면 된다던데’부터 요즘 대한민국 암의 트렌드를 알려주듯 자기 주변에서 누가 수술을 했는지를 알려주고 그 사람 지금 잘 산다면서 걱정을 덜어주려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모두가 나에게 위로를 해주려고 하는 말인데 어쩜 그렇게 단 한마디 한마디가 위로가 되지 못했다 


‘별것 아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도로 위로의 마음을 담아 나온 말인것임을 알지만 당장 몸에서 무언가 자라나고 있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낙관의 위로는 오히려 그만큼의 짜증을 불러 오기에 충분했다 현실적인 위로는 더 마음을 후벼 파는 경우도 있었다 보험은 몇 개를 들었는지 보장은 얼마나 되는지를 나에게 묻고, 생각보다 많은 진단금과 치료비를 받게 되는 사실에 감사하자는. 그렇게 지나치게 현실적인 위로를 하는 사람에게 진단금의 열배정도쯤 드릴 테니 우리 갑상선을 맞바꾸는 것에 대해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는 말이 가슴 깊은 곳에서 갑상선까지 차고 왔다가 도로 내려갔다. 남의 일이라고 너무나 쉽게 조언하고 공감하는 척 했었던 지난날의 나를 냉정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는 사람이 많은 만큼 만나는 사람이 많고, 내 몸 상태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 피로감 을 느껴갈 때 쯤 내 몸 상황을 회사에 설명하고 정리된 중재 방안을 도출하는 것도 꽤나 많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원래 올해 파견지로 논의되었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까운 아시아권의 나라로 정리되는 것에도 많은 배려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마저도 불가능한 것으로 정리되었지만 이러한 상황까지 오는데 깊은 배려를 해주신 분들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보낸 지난 시간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 이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아픈 사람 취급을 하고 걱정을 해주지만 나는 밥을 먹을 때 사래가 들린다거나, 목소리가 쉬거나, 몸이 피로하거나 하는 일체의 전조 증상이 없었다. 건강검진 결과에 따라 3월부터 금주를 했고(간수치가 높았다) 새해부터 각오로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우간다에 있을 때 꾸준히 운동을 해왔고 누구보다 건강하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수술을 선택하고 수술실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그리고 수술 후에도 수술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하는 미련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지만 이내 곧 내 몸에는 더 이상 갑상선이 없음을 깨닫고는 이제는 더 이상 부질없는 고민임을 깨닫는다.


이번 수술을 통해서 갑상선을 잃고 직업을 잃었다 사랑했던 연인까지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상선과 직업을 잃었다고 슬퍼하기 보다는 이렇게나 좋은 직업을 통해서 건강검진의 기회를 남들보다 자주 가질 수 있었고 초기에 갑상선 암을 발견해서 치료의 기회를 잡은 것 이었다. 절망 속에서 비참해하기보다 마음을 긍정적으로 먹어야만 나를 포함한 모두가 편안해질 수 있는 현실인 것인데 엄마가 치우라고 시키는 방청소가 그렇게나 하기 싫듯 ‘마음을 강제로 먹어야만 하는’ 상황이 그렇게나 속상한 거였다

 

원래 내 수술일정은 좌측 6미리 결절에 대한 반 절제 수술이었다. 반만 자르는 거니까 수술 후 다음날부터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올해 계획한 일들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한번 해볼만할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초기 진단이 추적관찰이었기 때문에 급하게 수술을 진행할 필요도 없었는데 이번 파견을 앞두고 근로능력에 대해서 의사와 상담하는 와중에 ‘이렇게 고민될 바에 시원하게 떼고 가자’는 의사 선생님의 제안이 있었고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극히 미미하다는 갑상선 전문의의 소견으로 수술을 결심하게 되었다 우측 결절에 대해서도 세침검사를 하고 초음파를 찍고 CT를 찍었다 5월 8일에 수술하기를 원했지만 일정이 밀려 5월 15일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을 기다리는 시간은 무난했다. 갑상선 반 절제 수술과 근로능력에 대해서 이비인후과 전문의들과 외래 진료를 실시하면서 상담을 하거나 갑상선 까페에 가입해서 갑상선 에 대한 정보를 얻고, 누구나 그렇듯 ‘나는 반만 잘라내는 반 절제니까 전절제해서 평생 약을 먹는 사람보다는 나은 상황’ 이라는 상대적인 자기위로를 수없이 하면서 그러면서도 막연했던 것 같다. 


보험사에 연락해서 절차와 금액에 대해서 확인하고 갑상선 커뮤니티에서 소위 말하는 갑상선에 대해서 잘한다(?)는 병원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갑상선이라는 것이 어차피 제로 아니면 전부였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내 담당 의사는 그렇게 친절하거나 자상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물어보는 것만 매우 간결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처음에는 무척이나 섭섭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데이면 저렇게 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이것역시 내가 이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댄 경험과 매너리즘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참 이기적이다 수술전날 밤 바라본 거울에서 목을 10분정도 뚫어져라 쳐다본 것 같다. 평소에는 어디있는지 존재감조차 희미했던 갑상선인데... 슬펐고 억울했고 불안했으며 두려웠다 좋은 감정이 1도 들지 않았는데 몇일 전 부화기 에서 태어난 아기 거위 네 마리와 교통사고를 당하고 재활중인 우리집 개 여름이를 떠올리면서 어둠속에서 피어나는 희망과 긍정의 징조로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강제로 희망적이어야만 했고 강제로 마음이 편안해져야만 했다 누구보다 나를 위해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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