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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May 23. 2021

정들었던 갑상선을 떠나보내며 2


입원날 아침은 모든것이 불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날 밤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에 불필요한 감정들 속에 있기보다는 한숨 푹 잠들면서 생각없이 올라가길 바랐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 오후 네 시 입원이었으므로 점심을 먹고 천천히 출발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전에 마음 편하게 키우는 짐승들에게 밥을 주고 여름이와 놀아주고 있을 무렵이었다. 02로 시작하는 전화번호.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원래는 반 절제 수술로 계획되어있었지만 수술 전 실시한 세침검사에서 오른쪽 결절에서도 암세포가 발견되어 전 절제 수술로 진행한다고 했다 전화를 받기전 번호를 보고서 혹시나 더 안좋은 일이 생기면 어쩌나 했었는데 엎어진데 덮어진 꼴이 되었다 나쁜일은 나를 향해 정면으로 다가오는듯 했다


병원에서 몇 번인가 얼굴을 마주치고 상담을 했던 젊은 레지던트 목소리인 것 같은데 바빠서 그런지 전화를 끊으려고만 할뿐 전 절제와 반 절제의 차이점에 대해 전혀 언급해 주지 않았다 나는 급하게 되물었다 “그럼 이제 평생 약을 먹고 살아야 하는 건가요?” 모르고 한 질문이 아닌데 질문을 하고나니 질문이 참 멍청하게 느껴졌다. 수술일정을 잡을 때 무척이나 반 절제 수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쉽게 말했던 그 젊은 의사는 전절제 수술역시 가볍게 말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네 평생 약을 드셔야 하구요 자세한건 이따가 오셔서 말씀 드릴게요”


원래가 입원일이 출근 날이었다. 5월 초부터  출근을 하고 나가서 무엇을 할지 어떻게 지낼지 한참 의욕을 가지고 준비하는 기간에 입원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반 절제니까 큰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면서 고난은 있으되 넘어지지는 않을거라고, 스스로를 다잡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었는데 바랐던 만큼 좌절감이 더욱더 크게 다가왔다. 수술 전 만났던 많은 의사들은 갑상선이 반절 없는 건 근로능력과 무관하지만 갑상전이 전부없는건 조금 다르다고 했다 수술 후 일정시간 경과관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 역시 자신이 없었다. 급하게 회사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배려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건강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건강 때문에 일까지 잃게 되다니 무척이나 억울했다


일동에 차를 주차하고 버스를 타고 동서울터미널로 올라간 다음, 신당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병원이 있는 안암역으로 향했다 전날 밤 작은 아버지가 태워준다고도 했고 아버지가 태워준다고도 했지만 거절했다 꿋꿋하고 씩씩하게 내 힘으로 이겨내고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동네 마실 다녀오듯, 좋은 곳에 여행을 다녀오듯 그렇게 마음을 먹었고 호기롭게 캐리어에 책도 세권이나 넣었다. 신당역을 걷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서울에서 자취할 때 지내던 곳이 신당이라서 특별한 연고가 없는데도 기분이 묘했다 몸이 이렇게 되지만 않았어도 나는 오늘 아침 신당역에서 사무실로 출근했을 텐데 나는 지금 캐리어를 끌고 병원에 가고 있었다. 극과 극인 삶. 입원 할 짐이 가득 든 캐리어를 끌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뱉은 한숨을 쉬었다. 1월에 끊었던 담배가 무척이나 피우고 싶어졌다 열심히 산다고 살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한방에 잃어버리는 것이 많다.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었고 이렇게 무기력하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더 속상했지만 받아들여야만 했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입원수속을 하고 환자복을 입었다 병실에 올라가기 전 이비인후과에 들러 전 절제 수술에 대해 설명을 들었는데 이미 많은 정보를 통해서 내 몸이 어떻게 되는지는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평생 약을 먹는 나는 이제 법률적으로 장애인이 아니지만 세법을 통한 장애인이 되는 거고 암으로 인한 한정 특례 중증환자가 되는 거였다. 전문가 그리고 예습 많이한 학생이 함께하는 암교실의 설명도 간결하게 끝났고 서로 간에 묻고 대답할 질문도 없었다. 질문시간에 다가온 침묵이 슬펐다.


 12시까지 식사에 대한 제제가 없었으므로 먹는 불편함은 없었으나 입맛이 없었고 수술복을 입고 팔목에 팔찌를 차고 나니 본격적으로 실감이 났다 7층에 있는 6인 병실을 배정받았는데 엄마랑 5층에 있는 소아병동 정원에 앉아서 한참을 이야기하고 또 억울함에 울기도 울었다 환자복을 입었으니까 환자지 나는 증세도 없고 아픈 곳도 없었다. 증상이라도 있고 아프기라도 했으면 환자복이 이런 감정을 주지 않을 텐데 어색하고 또 어색했다. 이렇게 주저앉아서 빌딩 사이로 지나가는 하늘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났다

 

발암(發癌)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 많이 고민해봤다 3년 전 스리랑카 마지막쯤 오른쪽 눈에 노안으로 인한 복시증세가 있었는데 그때 MRI촬영을 두번이나 해서 이렇게 된 것 일까? 라는 정량적(?)인 추론부터 평소의 행실이나 마음가짐 또 누구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 스스로 복기하는 일종의 정성적(?) 복기도 해보았지만 생각만 많아질 뿐 이내 곧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암에 왜 걸리는지 알게 되면 나는 노벨 의학상 메달로 짤짤이를 할 수 있게 되리라.


수술에 대한 준비 작업은 굉장히 늦게까지도 지속되었다 한밤중에 초음파를 다시하고 내 수술로 인해 나온 종양에 대해서 의료적으로 사용하겠다는 기증서에도 자정 무렵에야 서명했다 서명을 받기위해 잔뜩 초췌해진 의사가 왔는데 ‘내 갑상선을 부디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 말고는 서명할 때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수술동의서도 9시 무렵 서명했고 마취과 의사가 와서 수술 전 예진을 했었는데 옆 환자랑 나랑 바뀌어서 질문을 하는 바람에 내 앞니가 수술 중에 부러지는 건 아닌지 잠시나마 두렵기도 했다.

 

나를 위한 수술도 중요했지만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에 대해서 감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수술을 걱정해주는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 대해서....... 내 옆에 남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늦은 밤에 찾아와주신 인연에 감사했다. 갑상선 수술을 하고나면 노래를 부르기 어려워진다고 하는데 노래가 부르고 싶어졌다 집에서 올라올 때 마지막 노래를 부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노래한곡 시원하게 불러보지 못하고 이렇게 내일 수술을 맞이한다.


갑상선 수술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수술 전날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바로 ‘몇 시에’ 수술을 시작하는지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술 전날 자정부터 시작되는 금식시간은 다음날 몇 시에 수술을 하던지 동일하기 때문에 어차피 받을 수술이라면 빨리 수술을 받고 빨리 회복하는 이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구나 빨리 수술을 받고 싶어한다. 어떤 병원은 나이 순서대로 수술 순서를 정한다고 했고 어떤 병원은 무작위로 정한다고도 했다 병원은 무슨 기준으로 수술시간을 정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전날 밤 수술동의서를 작성하면서 들은 내 수술 시간은 오전 11시와 12시 사이였다.


수술아침 당연히 유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밤새 잠을 자다가 뒤척이고, 뒤척이기를 반복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취에서 혹여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상상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수술을 하기 위한 마취도 내가 원해서 잠시 잠드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잠들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 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8살 무렵 심한 중이염으로 전신마취로 수술하고 깨어날 때 의 불쾌한 기분이 떠오르는것만 같았다. 방법이 없다. 수술이 빨리 마치길 바라는 기분. 어른이 되고나서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굉장한 초조함 이었다.


 물 한 방울 입으로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아침에든 생각은 어젯밤 자정 전에 뭐라도 좀 더 먹어둘걸 이라는 후회도 잠시 들었는데 이런 생각은 아주 잠깐이었고 태산 같은 초조함만이 온 병실을 맴돌았다 6인실을 배정받고 같은 병실 구성원에 대해서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는데 알고 보니 모두가 이비인후과 환자였고 모두가 동일한 의사에게서 동일한 날짜에 수술을 받는 상황이란 것을 수술 날 아침에서야 알게 되었다. 간호사들이 아침부터 속옷 벗고 대기하라고 했고 내 오른쪽 병상 아저씨가 제일 먼저 침상에 실린 그대로 실려 갔다. 무슨 영업 하시는 분 같았는데 병상에서도 전화로 영업을 하다가  수술하러 가셨다. 수술은 받는데 직업을 잃지않았다 모쪼록 부러운 아저씨였다 이렇게 병상에서 환자들이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으면 간호사가 안내방송으로 하나씩 하나씩 알려줬다.


병상 전체에 침묵만이 감돌고 엄마가 가만히 손을 잡아줬다. 원래는 입원 당일에 보호자 서명만 한 다음에 집에 가셔셔 쉬게 해드리려고 했었는데 나도 엄마도 그러질 못했다.

 

“XXX환자분 잠시 후 수술실로 내려갈 예정입니다 화장실 다녀오시고 대기 하세요”

 

수술을 준비하면서 갑상선 수술 후 후유증에 대해서 많은 검색을 했었다. 비교적 가벼운 후유증으로 수술 직후 어깨와 목에 근육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병상에 가만히 누워 수술 자세를 상상해봤는데 내 갑상선이 가장 잘 보이는 자세로 어깨 바로 뒤에 베개를 올려두는 자세로 생각했고 그리고 그 자세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2시간정도를 멈춰있어야만 했다. 수술 방에 가기 전에 틈나는 대로 가벼운 준비운동을 했다 운동전 스트레칭을 잘하면 나중에 근육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병실에 침묵이 너무 힘들었다. 여기는 나만 힘든게 아니라 힘든사람이 모이는곳임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누구나 자기 수술이 잘될 것 이라고 믿고 당연히 안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전신마취를 하고 내 몸을 누군가에게 오롯이 맡겨야만 하는 그 상황이 두려웠던 것 같다.


네팔에서 수녀님이 와주셨다 수녀님도 볼일 때문에 한국에 오셨다가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아픈 것 에 대해 여러 지인들에게 알리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닌데 여러 사람들의 지나친 위로가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정신적인 지주 한분 정도는, 한분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연락을 드렸는데 수술 직전 병실에 오셔서 기도를 해주셨다 수녀님께서 어깨에 손을 올리시고 기도를 해주셨는데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 데에도 일순간 눈 주변이 밝아오는 것을 느꼈다 막연하지만 풍요로운 충만함을 느끼고 수녀님과 근황을 나누면서 수술 직전까지 시간을 보냈다.

 

방송이 울렸다 내 이름을 불렀고 화장실에 다녀와서 병상에서 대기하라고 했다. 혼자서 화장실에 가는 복도에서 목운동을 하고 나오지 않는 소변을 방울까지 쥐어짰다. 간호사가 와서 영양제와 진정제라고 엉덩이에 주사를 놔주고 갔는데 진정제를 맞으니까 거짓말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는 걸 느꼈다. 몽롱하니까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이 모두 눈녹듯 사라졌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기분. 침상에 바른 자세로 누웠고 곧 침대를 끌어주시는 분들이 병실로 도착했다.


시점이 주는 어색함이 낯설다. 약기운에 반쯤 몽롱하게 천장을 보고 있노라니 천장이 막 빠르게 움직인다.

고개를 돌려 엄마를 봤는데 엄마가 울먹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울지 마시라고 피식 웃으면서 손을 잡았다.

남들은 별거아니라는 갑상선 환자 수술인데 나만 이렇게 절박했다 4층이었을까 수술 방 입구에서 엄마와 헤어졌고 침대를 밀어주시는 분들과도 헤어졌다 누가 봐도 수술복장을 한분들이 내 침대를 밀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반쯤은 몽롱한 기분에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술실 안으로 들어간 것을 느꼈다 머리위로 천장에 조명이 보였고 영화에서나 보던 기계들이 머리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수술방 간호사는 아직 의식이 있는 나에게 수술용 침대로 건너가줄 것을 부탁했고 나는 조용히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어서 시키는 대로 했다 교수님이 수술복장으로 들어와서 인사를 건넸다 답례를 하고 수술침대에 누웠다 간호사는 내 손가락에 산소 포화측정기를, 몸에다 이런저런 준비를 했고 또 호흡기를 내 입에 가져다 댔다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내 잠들어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 심장이 울리는 것과 같이 울리는 걸 느낄 수 있는 짧은 비프(Beep)음을 느낄 수가 있었고 눈이 떠졌다. 말은 나오지 않았는데 일단 되게 아팠다 아프다고 빨리 진통제를 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파’를 굉장히 부정확한 발음으로 했던 것 같은데도 베테랑은 베테랑이라 내가 아프다고 말하는 걸 회복실 간호사는 아주 잘 알아듣고는 바로 진통제를 놔줬다 어젯밤 분명히 수술에 대해서 설명할 때 배액관 달고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몸이 이상한 게 아무래도 배액관을 몸에 달고 나온 것 같았다. 웅얼웅얼 소리가 일단은 났으니까 성대는 마비되지 않은 것 같았다. 배액관이 아쉬웠지만 성대에서 소리가 나는 것에 감사했다 필리핀에서 아티반 갱에게 당한 이후로 정신이 몽롱한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마취에서는 빨리 깨어나려고 노력했다. 비몽사몽간으로 병실로 옮겨졌고 간호사가 여러 수술후 주의사항에 대해서 설명해 줬다 기침 하지 말 것, 가래 뱉지 말 것, 심호흡을 할 것, 잠들지 말 것 등등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간호사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을 때 올 수 있는 부작용이 하나같이 어마무시 한 것 들 이라서 마취가 깨어나는 그 몽롱한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심호흡을 했다. 수술이 끝났는데 부작용으로 잘못되고 싶지 않았다

 

정신이 어느 정도 들고 나서 가슴팍을 보니 입원복 상의에 피와 소독약이 흥건했고 무엇보다 몸안에서 나오는 체액을 받아내는 배액관을 양쪽에 하나씩 두 개나 달고 나왔다 몸 안에 갑상선이 있다가 없어져서 그 빈틈을 채우기 위해 체액이 모인다고 했다. 상황이야 어찌되었든 몸에서 나오는 피를 받아내기 위해 배액관이 두 개나 가슴팍에 매달려 있고 그 반대쪽 줄이 내 몸속에 들어있었다 암진단을 받고 여기까지 오는데 한 번도 환자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환자라고 느껴졌다 아프다고 안했는데 알아서 진통제랑 막 뭘 놔주는 것 같았다 원래 진통제 맞는 걸 꺼려하는 성격인데 이것저것을 따질 상황이 못 되었다

 

물은 수술 후 4시간부터 식사는 5시간부터 가능했다 저녁 여섯시 반쯤 물을 마시고 일곱 시 반쯤 미음으로 밥을 먹었다 무언가를 먹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지독히도 고통스러웠고 나보다 빨리 수술을 받은 오른쪽 아저씨를 부러워하면서 또 나보다 늦게 수술을 받은 건너편 환자를 위로하면서 심호흡을 하면서 시간을 버텼던 것 같다 지하층에 스무디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어서 스무디를 먹었는데 무슨 천상의 음료 같았다. 네시 쯤 회진을 오신 교수님이 아주 잘됐다고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모든 고비를 넘긴 기분이 들었다.


 자려고 눈을 감는데 비로소 모든 것 이 끝났다는게 실감났다. 나는 이제 갑상선이 없는 사람이라는 비극적인 사실과 빨리 회복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램과 동위원소치료를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애절한 궁금증과 빨리 좀 샤워가 하고 싶은 소소한 소망이 있었지만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비가오고 있었는데 가습기 없이도 습도가 높아진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을 먹기로 했다 미세먼지도 없고 호흡기에도 좋은 거니까.


큰 산을 넘었다고 이제부터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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