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단풍잎이 아직 다 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눈이 오는가 싶더니 하얀 추위가 주춤거리는 동안 또 며칠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따스한 햇살 여럿이 조금씩 반짝거리고 있었다.
주말에 갑작스럽게 김장을 하게 되서 딸이 조금이라도 일손을 돕기 위해 늦은 시각 경산에서 내려온다고 했다. 엊그제 내린 폭설 때문에 뉴스에서는 일부 지역에 몇 중 추돌사고가 있었고 낮은 기온으로 인해 블랙아이스 현상이 발생 할 수 있다며 운전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는 소식을 연일 보도했는데 아무리 고속버스라도 늦은 시간에는 바닥이 미끄러워 혹시라도 내려오는 길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많이 되었다. 금요일 오후 수업을 마저 마치고 오는 것이라 할 수 없이 저녁차를 타야 하는 상황이었고 또 일요일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아침 일찍 다시 가야한다고 하니 괜히 고생만 시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더 미안했다.
다음 날, 온갖 잔심부름을 군소리 없이 다 해주고 손을 보태주어 '언제 다하나' 한숨만 더하던 김장 작업도 생각보다 이른 시간 내에 후딱 끝낼 수 있었다.
목포에서는 대구 가는 고속버스가 아침 8시 반과 오후 5시 반 딱 두 대만 운행되어 보통 아침 버스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일요일에는 남은 양념으로 배추 김치와 파 김치를 더 담을 요량으로 남편과 재래시장에 들러야해서 할 수 없이 이른 시간, 목포버스터미널에서 딸을 먼저 보냈다.
집에서 빠듯하게 이틀 밤을 자고 대구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면 지하철을 갈아타고 하양까지 가서 또 시내버스를 타야한다. 목포에서 한 번씩 왔다 갔다 할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여정이 너무 힘든걸 알기 때문에 자주 오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딸이 보고 싶으면 남편과 가끔 올라가기도 하지만 자동차로 가도 최소한 4시간 정도 걸리므로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가끔 일부러 광주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면 그나마 한 시간이라도 편하게 간다 싶어 보내는 마음이 덜 무겁지만 목포에서 출발할 때면 고속버스를 함께 기다리는 동안 가장 마음 짠하고 안쓰러움이 더해지는 시간이 된다. 헤어짐이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시간을 아쉬워하며 애잔한 눈길과 따스한 포옹을 더한다.
딸 아이가 대학에 들어간 이후 처음 배웅할 때는 눈물을 삼켜야 할 정도로 울컥했었는데 몇 년의 시간이 흐르니 어느정도 적응이 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항상 '이별' 이라는 감정 앞에서는 '슬픔'이라는 친구가 먼저 나서는 것 같다.
고속버스가 도착하고 출발할 때까지 남편과 같은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데 버스 안에서 손 흔들며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하는 딸의 모습에서 영락없이 친정엄마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광주에서 혼자 자취를 했는데 친정엄마가 나를 보기 위해 올라오셨다가 다시 내려가시는 길을 배웅할 때마다 고속버스 안 앞자리에 앉아 '어서 들어가'라며 손짓하시던 아련한 모습이 떠올랐다. 혼자 남아 고생할 딸을 남겨두고 뒤돌아 가시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며, 친정에 들렀다 다시 광주로 가는 딸을 보내는 엄마의 심정 또한 지금의 나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고 서운하고 더 못 챙겨준 것 같아 미안한 여러 감정들이 가슴 한켠에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다 큰 딸이어도 마음은 항상 냇가에 내다 놓은 어린아이만 같고 옆에 있으면 조금 귀찮긴 해도 함께 좋은 시간 보내며 즐거운 추억을 하나라도 더 만들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만 남는다.
딸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깜빡 잊고 한두 개씩 챙겨주지 못한 물건이 있을 때면 하루 종일 미안함은 더 커져만 갔다.
커가는 애들을 볼 때마다 '친정엄마도 날 키우면서 순간순간 이런 마음이었을까?' 생각 해 보며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엄마의 기억에 콧등이 시큰해졌다. 지난 시절, 손톱이 닳고 닳아 길 새가 없을정도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시면서도 자식을 향해 쏟아내시던 엄마의 사랑과 희생이라는 감정이 과연 지금의 나의 마음과 조금이라도 비교가 될까? 싶은 마음에 또 한번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주 멀리 보내는 것도 아니고 다시 못 보는 것도 아니었는데 '버스터미널에 서서 한참을 서성이며 나를 배웅하시고 마지못해 돌아서시던 희미한 엄마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그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