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여정
딸애의 임관식이 무사히 끝나고 이제 남은 과제는 '다시 집으로 무사히 귀가하는 것'이었다.
꼭두새벽부터 출발해 낯선 지역에 와서 큰 행사를 치르고 이른 해가 서산에서 기웃기웃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웃픈 에피소드가 있어 적어본다.
하루 동안 600km가 넘는 길을 왕복하자니 남편이 너무 힘들 것 같아 겸사겸사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전북 장수군 자연 휴양림’에 1박을 신청했다. 평소에 '지독한 길치'인 나는 괴산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금방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당연히 피로도 적고 가벼운 여정이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독’이었다.
거의 3시 반쯤에 행사가 끝나고 행사장까지 왔던 방법으로 다시 '4번 주차장'이라고 쓰인 셔틀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내려서 우리 차를 타면 되는 간단한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추억의 순간을 남기기 위해 사진 몇 컷을 찍는 동안 '6번'까지 쓰인 각각의 주차장에는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미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렸다. 딸도 다시 대구로 돌아가야 해서 3번 주차장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근처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우리는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있어서 짊어지기에도 버거운 딸의 ‘더블백’까지 들고 맨 끝줄에서 이제나저제나 순서를 기다리다가 다리도 아프고 짐도 무거운 터라 '금방 빠져나가겠거니' 싶어 잔머리 굴리며 앞쪽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웬걸!’ 오히려 늦장 부리던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들어서 우리 줄은 도무지 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더 길어졌다. 참고로 오늘 임관식에 참석한 전국의 ROTC 장교만 해도 2800여명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딸은 1시간 조금 넘게 지루한 시간을 기다린 후 버스를 타고 먼저 나갔다. 우리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아예 포기하고 간식이라도 먹으면서 차분히 주변 구경을 하려고 짐을 한쪽에 세워 놓고 뒤쪽으로 이동했는데 대부분의 정류장들이 아직도 복잡한 가운데 2번 주차장 셔틀버스는 거의 마지막 손님을 태우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또 열심히 잔머리를 굴렸는데 '저 차를 타고 나가다가 아무 곳에나 내려서 택시를 탈 생각'에 이르러 미친 듯이 달려가 짐을 가져오고 5시쯤이 되어서야 겨우겨우 버스에 몸을 싣고 답이 보이지 않던 이 곳을 먼저 탈출할 수 있었다.
'이제 됐다' 싶어 한시름 놓고 있는데 이 버스는 우리가 가야 하는 목적지의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결국 인적 드물고 자동차들이 쌩쌩 지나다니는 외곽도로에서 멈췄다. 행사 요원에게 물어보니 '이곳은 시내에서 먼 곳이라 택시 잡기가 쉽지 않을 거라며 차라리 다시 돌아가서 정문에서 내리는 것이 낫다'고 알려줬다. 할 수 없이 다시 돌아와 정문에서 내렸는데 여기에서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 콜택시조차 잡기가 쉽지 않았다.
‘더블백을 짊어지고 걸어서 우리 셔틀버스가 있는 곳으로 다시 들어가자’는 남편과 그렇게 고생하는 꼴을 절대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는 실랑이 끝에 문득 ‘괴산 택시’를 검색해 보았다. 다행히 누군가 전화를 받으셨고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택시를 탈 수 있었다.
택시 기사님은 연세가 있어 보이시는 분이었는데 80세가 넘으셨다고 했다. 그리고 문득 '내 첫 월급이 5천 원이었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 첫 직장생활 급여를 말씀하시나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당신도 여기 군사학교에서 장교 훈련을 받고 군에 입대한 후 받은 첫 월급이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도 2번씩이나 다녀오시고 전역 후 예비군 중대본부에서 사회생활을 하시다가 은퇴하시고 거의 30년째 택시를 하고 계신다고 했다.
짧은 시간 동안 기사님의 인생사를 들으며 조금은 위로도 받고 부모의 입장에 대한 심정을 전하면서 ‘어쩌면 우리의 예기치 못한 고생이 기사님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참 기이한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차를 찾아 겨우겨우 출발한 시각에는 땅거미가 조금씩 밀려들기 시작했다. 괴산을 한참 벗어난 후에도 '4번 주차장 대기 사람들은 모두 차에 탔을까?' 궁금했다.
아마 ‘아직도 대기하고 있다’에 남편과 같은 표를 걸었다. 아님 말고^^!
가는 길 역시 만만치 않았다.
괴산에서 장수를 가는 길은 우리나라 지도에서 볼 때 구불구불한 산과 들을 지나 시골 마을을 모두 거쳐 수직으로 내려가야 하는 국도였다. 호랑이도 숨어 있을 것 같은 컴컴한 산봉우리를 오롯이 희끄무레한 달빛과 자동차 불빛에 만 의지한 채 몇 개씩 넘어야 했던 우리는 눈이 빠질 것 같은 피곤함을 느끼며 거의 녹초가 되어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괴산에서 장수로 향하는 여정은 '007 작전'을 연상시킬 만큼 몇 배는 더 힘들고 긴장된 시간이었지만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바로 머리 위에 쏟아질 것만 같던 수많은 별들이 우리를 반겨주어 잔뜩 쌓인 피로를 털어낼 수 있었다.
다음날은, 코앞이 3월인데도 아직 겨울 풍경이 가득한 산길을 여유롭게 걸으며 산책도 하고 마침 인근 마을에 옹기와 된장을 직접 만드는 곳이 있어 방문했다가 재래식 된장과 고추장을 듬뿍 샀다. 친정 부모님도 시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셔서 된장 얻어먹을 곳이 없었는데 좋은 곳을 알게 되어 이제 된장 떨어질 걱정 없이 마음껏 먹어도 되겠다.
몸뚱이 조금 편하고자 남편과 잔머리를 열심히 굴린다고 굴렸는데 결과는 예측불허였다. 조금은 험난하고 힘든 일정이었지만 오랫동안 떠올릴 것 같은 잔잔한 에피소드를 추억하며 또 다시 방문하고 싶을 만큼 좋은 기억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