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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부모님께!

'출생의 비밀'

by 바람꽃

이미 녹슬 대로 녹슬어 버린 머리 굴려가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글'이라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쓰게 되었고 ‘브런치 스토리’에 작품을 올린 지 1년 하고도 반년이 채 못 되었다.

부족하나마 글을 쓰는 동안 아팠거나, 힘들었거나, 복잡한 마음들이 정리되는 것 같았고 오히려 내가 치유 받는 느낌이 들면서 '꾸준히 계속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거의 매 주마다 빠지지 않고 올린 덕분에 어느새 100번째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는 나 자신과 싸우는 과정이기도 했고 무척이나 소심하고 울퉁불퉁 고르지 못한 내 마음을 다독이며 잊고 있었던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어 조각 맞추듯 하나씩 정리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잘 버텨 준 나 자신이 스스로 뿌듯하기도 하면서 100번째 글에는 뭔가 색다른 글을 써보자는 마음가짐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글은 미처 자식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아무런 당부나 유언도 없이 외롭게 떠나신 친정 부모님께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진작부터 공을 들였다. 두 분이 가신 지 벌써 3년이 지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마음을 툭 터놓고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혼자 내내 속만 끓이고 있었다.

오늘은 두 분께 글로나마 속엣말도 전하고 부족함 많고 철없는 막내딸의 진심 어린 사과와 고마움을 대신 전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다.

나이 50이 다 되도록 내 인생에 이런 '쇼킹한 반전'이 있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철없을 때는 흔히들 돈 많은 부자가 나타나 ‘내가 너의 친부모다’라며 해피엔딩이 되는 상상을 한번 쯤 해 봤을 텐데 진짜로 '내 부모가 친부모가 아니었다'는 영화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혹시나 하고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엄마나 언니들 혈액형도 나와 전혀 달랐다. 그동안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었던 것 같다. 나와 언니들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8년, 12년, 15년)조차도 그저 '아들을 얻기 위해 늦둥이를 낳은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몇 해 전, 친정 아빠와 대화 중 우연히 “나는 너를 특별하게 키웠다, 네 생모한테 부끄럽지 않게 말이여”

이 한마디가 남긴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더군다나 더 충격적인 사실은 정작 나만 까맣게 모르고 친척이나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교사였던 외숙께서 교장선생님께 나를 '친동생 딸'이라고 소개하신 적이 있었는데 교장선생님이 ‘선생님과 조금 닮았네요’라고 답하시니 ‘유전적으로 닮을 일이 하나도 없는데요’라며 멋적게 말씀 하신 적이 있었다. 왠지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있던 그 어색한 상황이 이제야 점점 이해가 되면서 내가 정말 너무나 무디고 눈치가 없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한창 반항기 심한 사춘기에 알았다면 방황하지 않고 순탄하게 잘 지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30대나 40대에 알았더라면 여전히 기죽지 않고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돌이켜봤다.

원래 워낙 소심한 성격이라 혼자 많이 고민하고 아파했을 테지만 정작 내 마음을 행동으로 직접 표출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오히려 잔뜩 움츠린 채로 눈치 보며 살았을 것 같긴 하다.

지금도 가끔 날 버린 엄마를 찾아 나서야 하는 건지, 찾으면 만나야 하는지 갑자기 잡생각이 무척 많아졌다. 나는 항상 ‘평범한 삶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홀로 떨어져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도는 조각배가 된 기분이었고 그때부터 친정 부모님과 본의 아니게 약간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만의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사이 시간은 제멋대로 흐르다가 1년이 조금 넘어 두 분 모두 어떤 암시나, 잘 있으라는 인사도 없이 영영 먼 곳으로 떠나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엄마를 만나러 애들과 함께 남원병원에 갔었다. 치매가 약간 있고 파킨슨도 앓으셨지만 그때 까지만 해도 정정하셨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 언니들이 엄마와 함께 요양원에서 하룻밤 같이 자자고 제안했었는데 아빠와 마주칠까 봐 일부러 피했다. 그날이 두 분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전혀 모른 채!

기회가 있었음에도 엄마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이 너무 커서 두고두고 후회로 남았다. 엄마를 기억하면 할수록 친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모든 사랑과 책임을 나에게 다 해 주셨다는 감사함과, 넘치는 사랑에 비해 무뚝뚝하고 철없고 속없던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게 여겨졌다.


요양원으로 엄마의 유품을 챙기러 갈 때도 사실 별로 울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은 너무나 슬프고 죄송한데 여기서 무너져 내리면 엄마를 제대로 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날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제대로 전하지도 못했는데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어서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했다. 마음은 한없이 슬펐는데 제대로 울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큰언니, 작은 언니, 아빠까지 모두 코로나에 걸려 식구들조차도 함께하지 못하고 지인들에게 부고도 알리지 않은 채 마지막까지 너무나 초라하게 보내드렸던 상황이 생각할수록 어이없고 기가 막혀서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죄송함과 서글픔이 소나기처럼 한꺼번에 밀려올 때가 있다. 아빠는 다른 병원에 입원해 계셨었는데 엄마 소식을 듣고 병실에서 속앓이만 하시다가 결국 나흘 새로 부리나케 엄마 뒤를 따라가셨다.

가끔 '두 분이 잉꼬부부였냐?'고 물어보시는데 생각해보면, 고운 정보다 미운정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나를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두 분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너무 허망했고 더 가슴이 아팠다.

요양원에 계실 때 전화하면 항상 ‘어 엄마 잘 있어. 걱정하지마’ 라며 나를 위로해 주고 웃음 지어주던 엄마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또렷한데 너무나 큰 불효를 한 것 같아 여전히 마음이 무겁고 아리다.

언니들에게도 많이 미안하고 무척 감사했다.

셋째 언니가 여덟 살 쯤 되던 한 겨울에, 갑자기 집에 데리고 온 낯선 갓난아기를 대하는 언니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를 데려왔을 때의 상황이나 생모에 대해 이것저것 아무나 붙잡고 물어 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조차 낼 수 없었다. 집안 형편도 무척 어려웠다는데 어릴 적 나는 어떻게 자랐는지, 언니들은 내가 밉지 않았는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내 생일(12월25일)은 맞는 건지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괜스레 긁어 부스럼 만드는 상황이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어 여전히 물어보기가 겁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이젠 정말 남인가?’ 싶어 스스로 위축되고 손 내밀기가 쉽지 않았는데 언니들은 평상시처럼 나를 보듬어 줬다.


항상 순하고 부지런하셨던 엄마는 나를 가슴으로 낳으시고 내가 전혀 의심하지 못할 만큼 진정한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나에게 화를 내신 적도 거의 없고, 맛있는 거, 좋은 것이 있을 때마다 항상 나를 먼저 챙겨주셨다.

그리고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뿌연 잔상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입학 하기 전 쯤, 내가 다리가 아파서 일어서면 바로 주저앉아 버리고 한참을 못 걸어다녔던 것 같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엄마는 나를 낫게 하기 위해 매일 등에 업고 동분서주하며 발품을 팔고 갖은 수고와 노력 끝에 다시 걷는 기적도 만들어 주셨다.

학교도 언니들처럼 타지에서 공부했고 결혼하고 나서도 가끔 친정에 가면 여비라며 꼬깃꼬깃한 지폐도 매번 내 손에 쥐어 주셨다. 생각해 보면 내가 막내처럼 자라서 언니들이 받아야 할 사랑을 모두 독차지한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비밀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되는 건지, 아니면 끝까지 모르는 것이 더 좋은 것인지 여전히 답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내가 고민하고 있는 생각들을 막아서는 건 딱 하나, 내가 살아가는 동안 전혀 눈치 채지 못 할 만큼 나를 진짜 친자식처럼 사랑과 희생으로 키워주신 엄마 가슴에 못을 박는 것 같고 불효하는 것 같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서야 생모 찾겠다고 때 아닌 반항을 할 수도 없고, 누구에게 툭 터놓고 말도 못하겠고 가슴이 많이 답답하고 힘들었다.

내 상황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남편 역시 '그냥 잊고 살자'고 했다.

그 이후로 ‘봄이 되면 산수유 꽃이 가득한 시골 마을에 치매가 약간 있는 나이 든 생모가 살아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내 입장만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냥 그대로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나를 짓눌러왔던 수많은 번민과 갈등을 내려놓고 마음속 평화가 오래 유지되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이라도 엄마, 아빠를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전하고 싶다.

‘엄마, 날 친딸처럼 사랑해 주시고 잘 키워주셔서 많이 감사합니다!

나에게 엄마는 한 분 뿐인거 알고 계시죠?

정말 정말 사랑해요! 그리고 많이 미안해요.

아빠도 감사합니다.

이제 두 분 모두 자식들 걱정 하지 마시고 못 다한 행복 가득 쌓으시면서 즐겁게 잘 지내셔요!

저희도 걱정하지 않게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동안 꼭꼭 억눌렀던 마음이 산소 입구에만 들어서면 봇물 터지듯 눈물이 되어 쏟아진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 정말 잘못해드린 것만 생각나고 더 챙겨드리지 못해 못내 아쉽고 죄송했다.


매 년 4월이 되면 언니들을 만나 친정 부모님 추도식을 지내며 우리의 추억과 언니들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함께 나눈다.

3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아쉬움도 후회도 상처도 모두 내려놓으려 한다.

나중에 엄마 만나면 '덕분에 웃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래도 나의 방황은 생각보다 덜 했던 것 같다.

큰 고민이 생기면 작은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는 것처럼 지금은 그냥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오롯이 나만을 생각하며 나의 현재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들을 다잡으니 오히려 마음도 편해졌다.

철통같이 비밀을 잘 지켜주시고 덕분에 별 탈없이 잘 살 수 있도록 응원해 주신 다른 분들께도 늦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엄마, 아빠 정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P.S

나를 아는 지인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냥 모른척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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