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주왕산 국립공원에 도착!
주왕산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바위산 중의 하나라고 한다.
역시나 우리 식구는 생전 처음 방문하는 곳이다. 커다란 암석이 병풍처럼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고 절경도 무척 빼어났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절벽이 저절로 숨죽이게 했다.
대전사라는 절을 지나고 숲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 울창한 나무들이 비를 가려주었고 깊고 잔잔한 계곡이 가는 곳마다 맑게 흐르고 있었다. 바위 동굴처럼 생긴 주왕굴을 들르고 용추폭포까지 다녀오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시누이는 너무 힘들다며 주왕굴에서 바로 내려가셨다.
산에 올라가는 중간에 화장실에 잠깐 들렀다가 한참 올라간 후에야 내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빛의 속도로 죽어라 내달렸다가 '맨 마지막 칸에 그대로 있어서 겨우겨우 되찾았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시숙님들이 머물고 있는 제주도는 햇볕이 쨍쨍하다는데 왜 우리가 가는 곳에는 먹구름들이 계속 따라다니는지 그나마 잠깐씩 이슬비만 오고 흐린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이제는 비가 오던지 말던지 다들 조금씩 지금의 상황에 적응해 가는 것 같았다.
점심을 배불리 먹어서 배는 안고팠지만 주전부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추억의 과자라고 써진 뻥튀기와 기름에 튀기지 않은 호떡으로 또다시 배를 채웠다. 열심히 운동한 보상이라고 위로했지만 계속 쉬지 않고 먹어댔더니 뱃 속에서 '힘들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기분좋게 청송을 벗어나고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밭을 지나 울진으로 향했는데 비가 더 많이 내렸다. 오후 시간인데도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해안도로는 주변 경관을 보기 힘들 정도로 깜깜해서 바다색을 제대로 구분할 수도 없었다. 식구들은 곰팡이 펜션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오늘은 어제와 다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졌다.
드디어 겨우겨우 울진군 봉평해수욕장 근처 펜션에 도착했는데 사장님이 또 추가 요금을 달라고 했다.
'이것은 또 무슨 상황인가?' 싶어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니 '기본 4명에 8명까지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은 남편은 당연히 거기서 끝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나마 숙소가 깨끗해서 조금 비싸도 다들 만족했다.
오늘은 저녁 식사도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과 음료 등으로 아주 간단하게 해치웠다.
계속 비를 맞고 다녔더니 이제는 몸도 춥고 따뜻한 것이 그리워졌다. 다행히 보일러가 방을 금방 따뜻하게 데워줘서 아주 뜨끈하게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아이들은 따스한 것이 싫다고 해서 에어컨도 같이 켜고 잤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치며 비가 내렸다. 내 성격상 집안에만 가만히 있지 않고 여기저기 동네 한바퀴를 여러번 돌았을텐데 앞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비바람이 불어 오늘은 그저 안에서 조용히 보냈다. 아마 태풍의 영향도 약간 있었던 것 같으나 이렇게 연휴 내내 비가 온 경우도 드물었던 것 같다. 깜깜해서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성난 파도 소리와 빼꼼이 열린 창문 사이로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가 이제는 자장가처럼 들렸다.
날이 밝아 아침에 깨어보니 다행히 비는 멎어 있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시누이와 함께 어제 보지 못한 해수욕장 주변을 산책했는데 내 몸을 떠밀 만큼 세찬 해풍의 힘이 어마어마했다.
사실 목포 앞바다에서 살랑거리는 바다 물결만 보다가 망망대해의 높은 파도를 마주하니 길게 뻗은 방파제를 매섭게 넘나드는 거친 파도의 위용에 조금은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산책을 가볍게 마치고 아침 식사는 어제 산 과일로 대신하고 울진의 대표적 관광지인 망양정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동해를 마주하고 있는 관동팔경 중 하나인 '망양정'은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소개될 정도로 절경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담한 언덕에 위치한 작은 정자 위에 서서 탁 트인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온갖 잡념이 사라지며 마음이 평온해지고 점점 힐링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 역사속 송강 정철의 마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마지막 일정을 끝으로 다시 포항으로 내려갈 때는 해안로를 따라 천천히 내려가고 싶었지만 큰아들이 약속이 있어서 할 수 없이 바로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내내 바닷가 주위만 돌았는데도 일출이나 일몰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오늘도 여전히 날씨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점심으로 갈비찜을 먹고 큰애를 먼저 보내고 둘째는 포항역에서 보냈다. 저녁에는 시누이까지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하나둘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며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점점 막바지를 향해갔다.
문득 날씨를 확인하니 동해상에 물결이 높아 파도를 주의하라는 예보를 했다. 우리의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햇볕은 영영 못보는 것인지 내내 아쉬움이 남았다. 비 때문인지, 아니면 모두 떠나서인지 일곱에서 겨우 셋만 남은 딸의 아파트가 엊그제와 다르게 무척 썰렁하게 느껴졌다. 딸은 무척 더워하면서도 우리를 위해 평소에 잘 틀지 않는 보일러를 켰는데 역시나 한쪽에서는 방향 감각을 잃은 선풍기가 의미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가을이 이미 성큼 우리 곁에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날 아침,
남편이 볼일이 급하다는데 딸이 화장실에서 나올 생각을 않자 바로 옆동에 있는 큰아들 집으로 쳐들어갔다. 조금 후에 남편이 '화장지가 없다'며 나한테 갖다달라는 전화를 했다. 집에 화장지 한 통이 없는 게 말이 되나 싶어 궁시렁거리면서도 할 수 없이 가봤더니 아들은 진즉 여친에게 가고 남편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들 집에 오랜만에 갔더니 여기저기 눈에 밟히는 곳이 많았다. 재활용 쓰레기도 쌓여있고 씽크대며 화장실도 전혀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부모의 마음이 되살아나 두 팔 걷어부치고 쇠수세미 들고 구석구석 열심히 청소를 했다. 남편도 방 정리하고 쓰레기를 버리며 손을 보탰다. 주인도 없는 빈 집에 들어와 '혹 떼려다가 혹 하나 더 붙인 것 같은 기분'으로 바쁜 오전을 보냈다.
아침에는 날씨가 좀 개는가 싶어서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곤륜산에 갈까 했는데 배도 고프고 기운이 없어서 딸에게 가고 싶은 곳을 추천하게 했다. 딸은 경주 보문단지에 들러 산책하고 새로 생긴 카페에 가자고 제안했다. 딸의 계획대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가자마자 점심을 먹고 보문단지로 갔는데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하천 옆의 경주월드에서는 놀이기구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고 쏟아져나오는 비명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잠깐 산책하려던 참에 공원 주변 보수공사를 한다고 차를 빼달라고 해서 바로 카페로 향했다.
경주의 핫플레이스 <노경보차라파>는 최근에 오픈한 대형 카페로, 황량한 시골 논두렁 주변에 전원 주택이 몇 채 있고 소를 키우는 축사도 있는데 외길 끝자락에 스케일이 남다른 고풍스러운 한옥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다. 방문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마을 입구부터 주차관리인이 통제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할 수없이 차를 근처에 세우고 제법 먼 길을 걸어갔다. 점잖게 고개 숙인 벼들 사이로 훈훈하게 불어오는 가을 바람을 맞으며 농노길을 걸어가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건물은 운치있는 분위기를 풍기면서 동그랗게 이어진 기와지붕들이 무척 옛스럽고 멋스러웠다. 주차장이 꽤나 넓은데도 차들이 계속 밀려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가 걸어가는 시간보다 차로 들어가는 시간이 더 긴 것 같았다. 이곳은 음료와 빵 뿐만 아니라 노경보라는 한의사가 몸의 상태에 따라 발효차를 만들어주기도 하는데 1인 1개씩 시음도 가능하다고 했다. 아마 그래서 더 유명해 진 것 같기도 하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포항으로 출발!
오후에 시간이 되면 곤륜산에 갈 계획이었으나 산 주변에 구름도 많고 시간이 어중간해서 집에서 맛있는 밥을 지어 먹기로 했다. 가는 길에 이마트를 들러 고기와 파스타 등 재료를 사서 아주 저렴하면서도 가장 맛있는 저녁 식사를 했다.
우리의 마지막 일정은 둘째와 부산에서 만나 집으로 다시 내려가는 거였다. 북적거리던 식구들을 하나둘 모두 떼어내고 평상시처럼 남편과 부산으로 향했다. 죽으나 사나 항상 내 옆에 남아있을 남편에게 문득 더욱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항 오천터널을 지나면 졸음 방지를 위한 알송달송한 음악도 나온다. 또한 이쪽 터널과 저쪽 터널의 날씨가 다를 정도로 긴 터널이 많았다. 숨 멈추기 게임을 하면 모두가 숨이 꼴딱 넘어갈 정도로 끝도 없는 터널을 지나며 우리나라 기술에 다시 한번 감탄하고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는 굽이굽이 깊은 골짜기들을 어떻게 헤치고 다녔을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바로 부산 해운대가 보이는 동백섬으로 갔다. 해안로를 따라 산책을 하는데 파도가 높아서 더욱 스릴있었다. 수평선이 맞닿아 있는 드넓은 하늘에는 어두운 먹구름이 한 가득이었지만 한쪽에는 밝은 햇살도 살짝 내비치고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 저 멀리 어디론가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손톱만한 배들과 아득한 수평선을 내비치고 있는 황금빛 윤슬이 내 마음을 더욱 풍료롭게 하는 것 같았다.
광안대교를 지나 점심때 쯤 둘째와 합류했다. 부산에서 유명하다는 개미집에서 낙곱새도 먹었다.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는 요즘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다는 ‘감천 문화마을’이었다.
이곳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는데 오래된 언덕길에 줄지어 선 집들을 배경으로 온갖 상점과 카페, 기념품 가게 등이 줄지어 있었다. 외국인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알록달록한 마을을 사이에 두고 골목길 체험도 할 수 있고 한복 입기, 어린 왕자 모형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도 있었다. 자칫 사라질 수도 있었을 언덕 마을을 이렇게 다시 복원하여 관광지를 형성한 아이디어가 무척 남다르게 여겨졌다.
구석구석 동네를 한바퀴 구경하는 동안 볼일이 급한 마누라가 휴지도 없이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여성분을 붙잡고 화장지 좀 넉넉하게 빌려달라고 했다는 웃픈 헤프닝을 끝으로 우리의 길지 않은 여행은 막을 내렸다.
우리의 여정은 서해에서 출발하고 동해를 지나 남해쪽으로 돌아왔다.
긴 연휴로 인해 평상시에 가기 힘든 곳도 가보고 이젠 성인이 되어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는 아이들과 짧지만 너무나 뜻깊고 의미있는 연휴를 보냈다. 집에 홀로 남아 있는 냥이는 별일이 없는지 이제서야 새삼 걱정을 하며 다시 집으로 향했다. 여행하는 동안 딱히 교통체증도 별로 없었고 좋은 기억만 남았다.
남은 연휴에는 조금 멀리 있는 친정 부모님 산소에 들렀는데 다음 날도 쉴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또 오늘 밤새 놀아도 아직 연휴가 남아있다는 생각에 든든하기까지 했다. 내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10일이나 되는 기간동안 복무 처리 없이 이렇게 길게, 여유롭게 쉰 적이 있었나 되새겨보았다. 정말 한가롭고 즐겁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앗싸~~ 아직도 하루가 더 남았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얼굴에 뾰루지가 생겼다. 밥을 대부분 사먹고 여기저기 구경하며 놀러다녀도 몸은 역시 힘들었나 보다.
여행하는 내내 마치 비를 쫒아다닌 것 같았었는데 다시 집에 오니 날씨가 화창해졌다. 문득 어린이 동화 '파랑새'가 생각났다. 행복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왔더니 행복이 가까이 있었다는!
날씨는 연휴 내내 흐렸지만 그나마 다행히 여행하는 동안 비 때문에 크게 고생하지는 않은 것 같다.
가장 젊은 오늘날 난 또 비의 여정을 들여다보며 '비오는 날의 수채화'라고 이름 지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