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행복 찾기
최근에 조금 바쁜 일정을 보내고 엊그제는 평소에 가기 힘든 경상북도 안동으로 2박3일 출장을 다녀온지라 이번 주말은 집에서 재충전도 하고 편히 쉬기로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평소에 '마누라에게 끌려다닌다'고 노래를 부르는 남편이 문득 ‘신안군 어느 섬의 쌀이 맛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난데없이 그곳까지 쌀을 사러 가자고 제안했다.
작년에 지인에게 받은 새 쌀을 모두 먹고 묵은 쌀로 밥을 지었더니 ‘밥맛이 없다’며 불평을 하는 날이 많았는데 밥이 찰지고 좋았던 식당에 가서 대놓고 물어봤다고 했다.
장거리 출장을 다녀온 뒤끝이라 잠도 쏟아지고 많이 피곤했지만 남편만 혼자 두고 며칠 외박한 것이 못내 미안해 할 수 없이 함께 집을 나섰다. 오전에 여기저기서 볼 일을 먼저 보고 난 후 늦은 점심을 먹고 여러 개의 연륙교를 지나 목적지까지 찾아갔으나 신안을 대표하는 쌀은 있어도 다른 섬의 쌀을 직접적으로 판매하지는 않았다. 결국 먼 길까지 가서 헛수고만 하고 돌아왔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왕 거기까지 간 김에 인근에 있는 '핫플레이스'라도 들렀을텐데 오늘은 얌전히 차안에 머물렀다. 아무리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나여도 피곤 앞에서는 장사 없듯이 오늘만큼은 아무데나 머리 대고 누워서 자고 싶을만큼 피곤이 가득했다. 결국 저녁시간이 다되어 큰마트에 가서 올해 도정된 새쌀을 샀다.
일요일 역시 몸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집에만 콕 박혀 있기에는 바람 한 점 없는 햇살이 너무 좋아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새로 산 햅쌀에 맛있는 점심을 먹고 집안 일도 대충 마치고 부릉부릉~ 어디로 마실을 나갈 것인지 슬슬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볼일이 있어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서면서 핸드폰으로 인근 지역에 ‘단풍 구경하기 좋은 곳’을 검색하니 조금 먼 곳을 추천했다. 가까운 곳에 갈만한 데가 있나 찾아보다가 문득 눈앞에서 노란 은행잎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찍는 것 처럼 작은 떨림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바로 집 앞 도로에도 햇살에 반짝이는 각양각색의 나뭇잎들이 분주하게 팔랑거리며 파란 하늘을 천연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엊그제 다녀온 안동 지역은 은행잎이 모두 떨어져서 마지막 남은 잎새조차 보기 힘들어 많이 아쉬웠는데 우리 지역은 전혀 물들지 않은 푸른 은행나무도 남아있어서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가을이 쌓여간다’는 모습이 이런 것일까?
공원 산책로를 비롯한 거리 위에는 다양한 색의 단풍과 은행잎들이 부스럭부스럭, 푹신푹신하다는 느낌이 들 만큼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남편과 나는 먼 곳으로 드라이브를 하는 대신 동네 근처에 주차를 하고 가을이 가득 쌓인 거리로 무작정 길을 나섰다. 남편과 손잡고 남은 가을을 한발한발 나란히 밟으며 걷다보니 색다른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아 조금은 흥분되기도 하고 잔잔한 행복이 내 곁에 있음을 새삼 실감했다. 가을 햇살이 포근한 날, 살랑살랑 나를 감싸안는 따스한 바람이 불어 일부러 만들기도 힘든 예쁜 풍경속에 머무르니 더 낭만적으로 여겨졌다.
오래된 곡이긴 하지만 가을 노래도 하나둘 생각났다.
'부모’(김소월 시 - 이 곡이 김소월의 시인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
♬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랴 ♬
'가을은 참 예쁘다'(박강수)
♬ 가을은 참 예쁘다
하루하루가
코스모스 바람을
친구라고 부르네
가을은 참 예쁘다
파란 하늘이
너도나도 하늘에
구름같이 흐르네 ♬
얼마 남지 않은 가을 끝자락에 서서 그림같은 전경과 가을 정취에 흠뻑 빠져들다 보니 내 마음도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산책을 하다가 항상 지나치기만 했던 기차 카페에도 들렀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옛 기찻길에 진짜 기차를 개조해서 만든 '낭만카페'인데 내부도 부드러운 조명과 다양한 식물들을 진열해서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남편과 차 한 잔씩 오붓하게 마시고 남은 산책길을 마저 걸었다.
거리를 걷던 어느 누군가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은행잎들을 모아모아 나무 한쪽에 예쁜 하트를 만들어놨다. 덕분에 보는 재미가 더해졌다.
오늘은 별다른 계획없이 소소하게 보냈지만 생각지도 못한 작은 행복도 여럿 찾을 수 있었다.
우선 무척 오랜만에 세차를 했다. 주인의 게으름 때문에 그동안 많이 지저분해진 모습으로 다닌 내 차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었더니 생각지도 못한 무지개를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집을 나서면 여기저기서 은은하게 향기를 내뿜는 은목서도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가섰는지 며칠 전 거세게 몰아치던 모진 바람에 올망졸망한 하얀 꽃잎들을 대부분 떨구고 색이 약간 바랜 작은 꽃잎에 희미한 잔향을 머금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은목서의 계절이 또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세차를 해서 조만간 눈이나 비가 올 수도 있겠다.
마음은 항상 오늘처럼 푸르고 청명한 가을 하늘이 오래 남아있기를 바라지만 이제 곧 12월이라 금방 추워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유난히 길었던 것 같으면서도 좋은 기억과 추억을 많이 선물해 준 따스한 가을에게 작별 인사를 전해본다.
'가을아 고마워, 그리고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