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나의 최애 그림책
책의 표지와 일러스트레이터의 이름만 보고도 무조건 사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Dan Yaccarino의 그림책은 저에겐 그런 책 중 하나예요. 심플한 선과 밝은 색상의 일러스트레이션이 깔끔합니다. 그의 일러스트레이션 스타일이 만화 같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정말 티비 만화 시리즈를 제작한 적도 있네요.
2021년에 출판된 그림책 중 저의 최애 그림책은 그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The Longest Storm"입니다.
리뷰를 위해 부득이하게 아래의 유튜브 동영상의 화면을 몇 장면 캡처했어요. 전체 책은 이 동영상으로 읽으셔도 좋겠습니다. 한국 독자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려는 저의 의도를 작가가 이해해 주겠죠?
https://www.youtube.com/watch?v=V_g28RtwXHA
표지엔 한 어른과 세 명의 아이 그리고 개 한 마리가 큰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목에 storm이 있으니 왼쪽 위 파란색 구름이 storm 임을 짐작할 수 있지요. 책 커버를 넘기니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간단한 선으로만 표현되어 있지만 바람의 세기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A storm came to our town. It was unlike any storm we'd ever seen."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폭풍에 큰 딸은 얼굴을 찌푸리며 집 안으로 들어옵니다. 동생들과 강아지도 급히 집으로 들어옵니다.
"No one knew how long it would last. We were going to have to stay inside, maybe for a long time."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락다운에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의 표정이 심각합니다.
가족 구성원을 자세히 살펴볼게요. 엄마가 없는 한부모 가정이에요. (아내의 사진을 보는 장면이 살짝 나옵니다. widower로 짐작됩니다.) 자녀 셋 중 첫째는 틴에이저로 보여요. 아래 두 명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요. (어쩌면 쌍둥이) 네 명의 가족이 평소와는 달리 폭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집에 갇혀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틴에이저인 큰 딸은 동생 둘이 자기 근처엔 오지도 못하게 하고, 아래 두 명은 왜 하필 같은 장난감으로 놀고 싶어 할까요?
책을 읽고, 야구공으로 캐치볼을 하고, 그림을 그려도 시간이 잘 가질 않네요. 괜히 집에만 갇혀 있으니 리모컨을 가지고 싸움만 납니다. 면도도 하지 못한 아빠의 얼굴이 상기되고 책의 한 페이지를 통째로 화가 나서 큰 소리를 치는 아빠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후 자녀들은 각자의 방으로 올라갑니다. 싸우다 못해 이렇게까지 얘기하면서요. "We were completely sick of each other."
대화는 단절된 지 오래고, 서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어느 날 밤 집이 흔들릴 만큼 큰 천둥번개가 집을 덮치고 정전이 되자 각자의 방에 흩어져있던 아이들은 아빠의 침대로 모여듭니다. 혼자서도 잘 살 것 같던 틴에이저 큰 딸도 결국은 아빠의 침실로 옵니다. 어둠 속 좁은 침대 안에서 서먹해하던 가족들은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책의 두 페이지를 다 사용해서 그려낸 번개에 비하면 사람은 그저 미미하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그래도 우리에겐 그 번개를 피할 집이 있고 부둥켜안을 수 있는 가족이 있으니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위력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다음날 폭풍은 여전히 외출을 못 하게 막고 있지만 어제와는 다른 태도로 식구들을 대할 수 있게 됩니다. 같이 보드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고, 사진첩을 꺼내 보면서 추억을 얘기합니다. 아빠 혼자 보던 엄마 사진을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보겠지요? 지금 겪는 폭풍 이전에도 이 가족에게는 엄마를 잃는 고통이 있었을 거예요. 그것뿐 아니라 다른 크고 작은 어려움들도 분명 있었을 거예요. 락다운으로 집 안에 갇혀있는 가족들은 예전의 모든 어려움들을 서로 의지하면서 이겨냈던 기억을 떠올릴 거예요. 그리고 생각하겠죠. "이번 어려움도 함께한다면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익숙해져 갈 때쯤 처음으로 노란 볕이 집 안 깊숙이 들어옵니다. 폭풍이 멈춘 것이죠. 그림은 문을 열고 나가려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들의 표정을 상상할 수밖에 없어요. 과연 어떤 기분일까요? 기쁨, 안도감, 기대감으로 문을 활짝 열어봅니다.
집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람에 떨어진 나뭇가지와 잎들입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네요. 평소라면 귀찮았을 집안일이지만 모두 불평 없이 다 같이 도와가면서 합니다. 기나긴 폭풍의 날들을 기억하면 이 정도 일거리는 번거로운 일이 아니죠.
대담하고 간결한 선과 선명한 칼라의 일러스트레이션이 맘에 듭니다. 책의 페이지를 꽉 채운 일러스트레이션과 손글씨로 쓴 텍스트도 이쁩니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팬데믹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모두가 경험했을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극단적으로 슬프지도, 극단적으로 기쁘지도 않게 표현함으로 언젠가 올 다른 폭풍에도 그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책의 초반에 이 폭풍에 대해 "언제 끝날지 모른다"라고 했었지만 결국 이야기의 끝에 가족들은 집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곧 오겠죠? (유튜브 동영상에는 없지만) 책의 가장 마지막 일러스트레이션인 속표지에는 선명한 해와 구름이 있는 화창한 하늘을 보여줍니다. 작가가 마지막으로 속삭이는 것 같아요. "Everything is going to be ok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