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용역
별다른 목적 없이 휴학을 감행한 방구석 잉여인간은 영어 공부라도 알차게 하겠다던 아빠와의 약속은 잊은 지 오래다. 제멋대로 길게 뻗치고 빛바랜 볏짚과 같은 헤어 칼라는 처참한 몰골을 부각시켜 잉여력을 강화하는데 한몫했다. 어쩌다 친구를 만나러 부평역에만 나가도 내 머리꼴을 본 사람들은 신기한 듯 한 번 더 돌아보고 쑥덕이곤 했다. 십중팔구 월급쟁이 노동자가 되는 전공을 가졌고 졸업이 늦춰지는 만큼 취업과 경제적 독립의 길은 요원해지건만 아무 꿈 없이 살았고 누군가는 그토록 바라던 소중한 하루를 아낌없이 탕진했다.
종종 보던 고교 동창들은 작년부터 하나 둘 군대로 사라졌다. 작전동에 사는 친구 녀석들은 먼저 입대한 동창들과 같이 만나보기가 매우 어려운 처지는 아니었으나 ROTC 장교 교육으로, 사법시험 준비로, 공인 회계사 준비로 저마다 목표를 향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군대에 가야 하나...? 중학 시절과 같이 머리털을 모두 잃은 머털이 꼴이 되긴 싫고 단체생활에 매우 부적합한 캐릭터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고민 끝에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병역특례업체로 국방의 의무를 퉁치려 했으나 인맥 없이는 참 힘든 루트여서 금방 손을 떼고 말았다.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인 친구의 꼬드김에 깜짝 1학기 복학을 했다. 그는 작년에 ROTC를 지원하여 내년까지 4학년 교육과정을 마치면 장교로 입대하게 되는데 교내에서 선배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큰 소리로 경례하는 것을 놓쳤다간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인다고 했다. 그는 강의실 바깥으로 나서자마자 소머즈라도 된 양 동공의 줌을 최대한 끌어올려 누군가를 찾아댔다. 교양 과목을 들으러 공대건물에서 5호관으로 걸을 때에도 무한 공깃밥 리필이 가능한 후문 쪽 뒷골목 식당에 갈 적에도 ROTC 선배를 만나면 그는 괴성을 지르다시피 “충성!”을 외쳐야만 했다. 길을 지나던 여학생들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서둘러 자리를 피하거나 피식 대곤 했다.
때마침 내게도 병무청으로부터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만 놀고 숭고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나라의 부름에 응하라는 명령이다. 학익동에 위치한 병무청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병무청에 있던 직원들은 귀한 자식들을 모아놓고 국방자원으로 쓸만한 가치가 있나 체크하는 자리에서 친절하지는 못할 망정 꽤나 고압적이다. 특히 각 검사과정마다 앉아있는 군의관들은 언제 봤다고 매사 반말에 명령조로 일관했다. 등급별 소고기나 난각에 찍힌 번호처럼 국가가 인정한 나의 상품가치는 3급이었다. 1급이 아닌 이유는 마이너스 9 디옵터나 되는 좋지 않은 시력 때문이다. 그래도 현역 징집대상이었지만 지역에 TO가 있고 운이 따르면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상근 예비역(이것도 현역)으로도 편성 가능했다.
70년대 병무청의 날림 신체검사덕에 방위를 나온 아빠는 사회생활을 하며 온갖 멸시를 당했는지 자식만큼은 현역으로 복무하길 원했다. 그 때문인지 당시에 고가였던 시력 교정술을 받고 싶다 하니 흔쾌히 지원해 주셨다. 제대로 된 군대에 가서 제대로 총은 쏘라는 뜻이 담겼을지도 모른다. 각막 두께 이슈로 내 눈은 라섹수술 대상이었고, 거금 300만 원을 들여 탤런트 김희선도 시술받았다는 청담동 강남 밝은 안과까지 먼 거리를 수시로 내원해 거추장스러운 안경과의 인연을 끊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아빠는 임원답게 거의 8년간 이용했던 현대 쏘나타 II를 처분하고 황금색 XG 그랜저를 들였다. 80년대 후반~90년대 초만 해도 최상위 계층이나 타던 그 각 그랜저의 위상은 다이너스티에 이어 에쿠스가 계승했지만 XG 그랜저도 꽤 괜찮은 세단에 속했다. 이때 만큼은 우리 집 되게 잘 사나 보다 싶었다.
2001년 11월 19일 월요일 새벽 그 고급진 차에 외할아버지와 부모님 그리고 나까지 탑승해 생전 가보지도 않은 강원도 양구군으로 향했다. 부모님에겐 징집되는 내 신세가 처량했는지 좀 더 안락하고 신속하게 배웅하고픈 마음이 있었나 보다. 외할아버지께 그럴싸한 식사라도 대접할 겸 마지막으로 아들놈에게 좋은 먹거리를 제공할 겸 그럴듯한 계획을 세웠으나 시간이 너무나 촉박한 관계로 생략됐다. 꼬불꼬불 산길을 급하게 질주하는 차와는 다르게 난 차분하면서도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외할아버지는 내 외이도를 튕겨나가기 십상인 라떼이야기와 자신이 마음만 먹었으면 경찰서장까진 해 먹었을 것이라는 약간의 후회 섞인 이야기도 하셨다.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거대한 태양이 내 태몽이었다고 여러 차례 들어 나는 군대에 가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그 믿음은 머지않아 꿈과 같은 이야기임을 깨닫고 다른 이들처럼 군입대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나라 놈들아 어서 내 목을 쳐라’ 하는 심정으로 목을 길게 뺐다. 언제 죽일지 알려는 줘야 하는데 국방부 놈들 아무런 기별이 없다. 앞서 입대한 친구들은 입대 1주기가 코 앞인데 이것 참 야단 났다. 우연히 계양경찰서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의무전투경찰순경(이하 ‘의경’이라 칭한다)으로 복무 중인 고교·대학 동창을 만났다. 그는 의경제도는 지원만 하면 금방 입대하고 그럭저럭 지낼만하다는 얘길 해줬다. 나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인천지방경찰청에 원서를 넣어 최종합격을 한 뒤 나라의 부름에 따라 강원도 양구군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양궁 과녁처럼 생긴 양구 2사단 노도부대(지금은 해체됨) 심볼 앞은 입대하는 사람들과 배웅하는 이들로 뒤섞여 매우 정신사나웠다. 상상했던 바와 같이 서로가 눈물콧물 빼며 애틋함이 담긴 당부의 말이 오가진 않았다. 입소 시간도 임박해 인사를 하는 둥 마는둥하며 연신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군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뛰어가기 바빴다. 중절모에 진녹색 계열의 블레이저를 입은 멀끔한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식사 때를 지나친 노인은 엄청 시장하셨을 것이다.
몹시 추운 날인데 산 속이라 그런지 칼바람이 노출된 피부에 스칠 때마다 뜯기듯 아렸다. 밤송이머리를 하고 우울한 표정을 한 청년들은 대개 두툼한 패딩을 걸치고 있었고 간혹 머리를 짧게 자르지 않은 채 그대로 들어온 아이들도 보였다. 잘은 모르지만 얘넨 곧 혼나지 않을까 속으로 생각하며 대대장인지 연대장인지 하는 아저씨의 일장연설을 들었다.
허름한 가건물에 들어가니 TV로만 봤던 그 내무실이 나왔다. 예전 주안 외할먼네 외삼촌 방의 백 이십 배쯤 농도가 더 짙은 홀애비 냄새와 뒤섞인 오래 묵은 곰팡내가 코로나 검사하듯 코를 찔렀다. 연병장보다 오히려 더 응축된 냉기가 감도는 바닥에 잠시 걸터앉았더니 군인 몇이 들어와 종이 박스를 나눠주며 다시 연병장으로 집합하라고 명령했다.
마사토가 깔린 널따란 연병장은 어느새 플리마켓처럼 간이 매대와 새 물건들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차례로 줄을 서서 푸르른 타올, 베이지 톤의 손수건, 국방색 면장갑과 가죽 외피, 캉가루 군용 가죽장갑, 구두약, 구둣솔, 공중목욕탕 일회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칫솔, 페리오 치약, 오이비누, 갈색 비닐 세면백, 역시 일회용으로 보이는 조악한 면도기, 국방색 BRAVE MAN 속옷 세트, 상아색 방한 내의 세트, 귀마개와 까슬까슬하고 어두운 참개구리 패턴의 목토시, 중고 태권 V 체육복과 프로스펙스 운동화, 발폭 EEE의 290mm 검정 군화, 참개구리 군복 상하의와 군모, 야상, 착용할 때 보단 다시 매만질 때 더 손이 가는 국방색 고무링 그리고 깔깔이로 불리는 잇템 방한 내피까지 빠짐없이 지급받았다. 아주 잠시 신분을 망각하고 쇼핑하듯 물건을 받아 들며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군인들은 프렐요드 칼바람보다 매서운 말투로 다 받았으면 다시 내무실로 돌아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을 환복 하라고 닦달했다.
작은 박스에 입고 있던 연회색의 미키마우스 트레이닝복 상하의와 패딩 조끼 그리고 속옷과 양말은 물론 신발까지 압축백에 넣듯 꾹꾹 눌러 담았다. 얘들은 따뜻한 집으로 보내지겠지. 잘 가라 나의 미키마우스.
부대 정문과 연병장에서와는 달리 조교들은 반말과 고성을 섞어가며 아이들의 군기를 잡았다. 모든 말은 ‘다’ 나 ‘까’로 끝나야 하고 간부들이나 조교들을 만나면 왜인지는 모르나 “충성!”하고 크게 경례를 해야 하며 여긴 사회가 아닌 군대라는 점을 수시로 주지 시켰다. 또다시 밖으로 집합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밖이나 안이나 추운 건 같은데 적응할만하면 바뀌는 환경으로 인해 벌써부터 짜증이 밀려온다.
첫 주는 내내 제식훈련만 했다.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걸음을 걸을 때 같은 쪽 팔과 다리를 동시에 내밀었다. 조금만 틀려도 연대책임을 물어 모두가 얼차려를 받거나 같은 동작을 수회 되풀이해야 했다. 훈련을 하면 많이 움직여야 해서 힘들고 잠시 무릎 앉아 자세로 대기할 때는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많은 이들이 이런 혹독한 훈련 때문에 군생활을 힘겨워하는 줄로만 알았다.
일분일초가 매우 더디게 흘렀다. 시간이 살과 같이 너무 빨라 야속하다는 이가 보이면 군입대를 권하고 싶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시간만 오매불망 기다리며 하루하루 간신히 버텼다. 군대 다녀온 사람 열이면 열 군대밥은 맛없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고된 훈련 덕분인지 난 오히려 훈련소 밥을 잔반 제로로 싹 비워댔다. 어디서 방패로 썼는지 구불구불 흉터투성이의 스테인리스 식판 위로 세상에서 제일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한 배식 담당자들이 밥과 반찬, 국을 퍼담아 준다.
훈련병들을 비롯한 장병들이 사용한 식기는 스스로 세척해야 했다. 잔반이 오랜 기간 배관 속에 방치돼 발효된 냄새가 곳곳에 퍼지다 못해 베여버린 콘크리트 수돗가 구석에서는 훈련병 두 명이 한 조를 이뤄 세숫대야 앞에서 뭔가를 종일 주물러댔다. 세재를 아주 조금 물에 희석하고 거품이 많이 나도록 준비를 해두는 임무를 받은 자들이다. 식기를 들고 그들 앞으로 가면 3cm도 안 되는 닳고 닳은 초록 수세미 조각을 힘없이 내민다. 훈련병 몸에 머무를 수도 있는 잔류 세재를 우려했던 간부들의 조치였을지, 몇 푼 되지도 않는 세재부터 쥐어짜며 국방비를 절감하고자 하는 목표 때문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손가락에는 덜 닦인 거품이 그대로 얼어있다. 분대 단위로 식당 앞에 모여야만 내무실로 이동이 가능했으므로 찝찝함은 잊고 장갑을 낀 채 연신 입김을 불어대며 전우를 기다렸다. 간간이 막사 외부에 설치된 온도계를 봤는데 빨간색 알코올 기둥은 섭씨 -20도에 가깝게 위치했다. 국방비를 아끼다 보니 고장 난 온도계를 두었나 싶었는데 다른 곳의 온도계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화씨온도계인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상황은 변치 않았다. 툰드라에서 볼 법한 광경을 한반도에서 목격하고 있다. 영하 10도 정도면 제법 훈풍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훈련병의 일과시간은 말 그대로 훈련이다. 제식부터 사격, 유격, 행군, 화생방 등의 정해진 시간표대로 차질 없이 진행됐지만 그 외의 시간에도 국방부는 최선을 다해 인력을 부렸다. 훈련을 하러 온 것인지 환경미화 교육과정인지 헷갈릴 정도로 인원을 배분하여 그리 티도 나지 않는 부대 곳곳의 청소를 맡게 했다.
나는 취사반에 배정됐다. 쌀을 찌는 사각 철통을 비롯하여 각종 식기를 세척하거나 감자, 양파, 파 등의 식자재를 다듬고 씻는 일은 물론 잔반통 옆에 쌓인 쓰레기들을 분리수거하는 일까지 맡아야 했다. 커다랗고 새파란 잔반통 근처에는 짙은색의 쥐들이 자주 출몰했다. 쥐꼬리만 보여도 엄머나! 하고 소리치며 호들갑 떨던 나도 어느새 적응이 돼 내 옆으로 쥐가 쓱 지나가도 묵묵히 쓰레기만 치웠다. 그렇게 쥐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시식하던 잔반통이 꽉 채워지면 외부에서 1톤 트럭이 와서 그것들을 옮겨 담고 어디론가 떠나곤 했다. 트럭 적재함의 잔반통 틈에 내 몸을 숨기면 밖으로 나갈 수 있으나 그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없겠다는 부질없는 상상도 해본다.
매일 반복된 주방일로 손은 붉게 트고 군용 귀마개에 짓눌려 더 빠알간 빛을 띈 내 얼굴은 당장 6·25 전쟁 배경의 영화 속 중공군 역으로 투입돼도 이질감이 없었다. 이 군부대는 쓰레기만 생산하는 곳인지 아무리 열심히 치워도 마법처럼 다음날 쓰레기가 똑같이 쌓여있다.
가끔은 취사반 하수구가 막혀 직접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 배관을 막고 있는 잔반 퇴적물을 인력으로 제거해야만 했다. 하수구에 직접 들어갈 두 명의 인원을 자원받는다며 조교가 모처럼 제안을 했다. 아이들이 자원을 망설이니 미션을 훌륭하게 소화하는 이에게는 행정반에 데려가 외부로 통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며 꼬드긴다. 취사반 하수구는 식당 건물 앞에 위치했고 판형의 두꺼운 콘크리트 덮개를 들춰내면 딱 사람 두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찌꺼기와 숙성되고 있는 잔반이 하수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 찌꺼기지 사실상 송내역 앞에서 닭둘기들이 쪼아 먹던 토사물 보다 더 험한 것들이 뒤엉켜있었다. 쥐들은 사람이 오든 말든 그들만의 뷔페활동에 심취해 있었고 알 수 없는 액체로 표면이 미끈거리는 콘크리트를 조심스레 짚어가며 두 명의 자원자는 그렇게 땅 속으로 투입됐다.
나는 하수관을 덮고 있던 덮개가 열리자마자 반사적으로 헛구역질을 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그렇게 용맹한 자원자들의 운동화 틈바구니엔 용케 썩지 않은 콩나물 대가리와 고춧가루가 어지럽게 끼어있었고 조교는 그들을 불세출의 영웅처럼 받들어 칭송하며 선심 쓰듯 중고 태권 V 활동복을 추가로 지급했다. 더럽게 춥다는 말은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이 분명하다.
저녁 점호 청소라는 큰 산을 넘으면 비로소 오이비누로 씻을 수 있는 잠깐의 자유가 주어진다. 어느새 검게 돋아난 수염을 지급받은 면도기로 다듬다 보면 입 주변으로 피가 주르륵 흐르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 짬을 이용해 꼼쳐둔 건빵과 맛스타 주스 혹은 종교활동으로 얻은 초코파이 따위를 즐기기도 했다.
진드기와 곰팡이가 가득할 것만 같지만 고단한 몸을 한시라도 빨리 눕히고 싶은 욕망이 앞서 그 어떤 때보다 재빠르게 움직여 삼단 매트리스를 펴고 그 위에 낡은 모포를 반으로 접어 깔았다. 빨래망 같은 망사에 짧게 자른 빨대를 수백 개쯤 넣어 제조된 베개도 정위치 시킨다. 양말 두 겹과 방한 내의에 활동복 그리고 방한 내피까지 끼어 입곤 침낭으로 들어가 5령쯤 된 누에나방 애벌레 꼴로 변신하면 잘 준비는 끝이다. 수면내시경을 위한 프로포폴 주입될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잠에 드는데 불침번 순번이라도 오면 달디단 꿀수면은 뜻하지 않게 끊겨 고달프다.
나는 매일같이 내무실 안의 철제 관물대(옷장 겸 수납공간)를 보며 이런 다짐을 했다. 내게 자유가 주어진다면... 내가 또다시 바깥세상에서 활동하는 그날이 온다면... 이렇게 폭이 1m가 채 되지 않아 간신히 누울 공간만 주어진다 해도 난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바닥에 아무리 물을 뿌려놓아도 한랭건조했던 내무실은 바이러스의 통로역할도 톡톡히 했다. 누군가 감기로 콜록대기 시작하면 거의 전원이 감염되었으며 이는 4주간 낫지도 더 악화되지도 않은 채 잔기침과 콧물을 달고 살게끔 만들었다.
어떻게 보내나 싶던 4주의 훈련소 생활도 어느덧 끝이 났고 군용 더플백에 그간 지급받은 물건들을 순대처럼 쑤셔 넣은 채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춘천역에 우리를 내려줬고 그곳부터는 군복이 아닌 네이비색 경찰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욕설을 섞어가며 우리를 거칠게 몰아붙여 기차에 태워 충주 중앙경찰학교로 향하게 했다. 우리를 부리는 주체가 국방부에서 경찰청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충주 중앙경찰학교는 군부대보다 형편이 나았다. 건물은 학교와 다름없이 느껴졌고 라디에이터를 통한 난방도 이뤄졌으며 식당도 보다 더 깨끗했다. 일과시간 이후에는 마음껏 매점과 공중전화 이용도 가능했다. 깔끔한 네이비의 경찰 기동복과 하늘색 근무복 그리고 점퍼와 가죽장갑은 물론 금강제화에서 제작한 경찰 단화까지 지급받았다. 제식이나 진압훈련과 같이 외부에서 진행되는 일정도 있었지만 비교적 깔끔한 착장으로 강당에서 이뤄지는 교육도 꽤 있어 제법 사람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교육은 대게 경위나 경감 급의 간부로부터 진행됐고 경찰관 직무집행법이나 운전면서 필기시험 수준의 교통법 등이 다뤄졌다. 3주간의 교육 말미에는 시험을 거쳐 순위대로 각 지역에 배정되었기 때문에 각자 희망하는 지역이 있는 아이들은 꽤 성실한 태도로 임했다. 대부분의 경력 TO는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그중에서도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방범순찰대(경찰 업무 보조와 부수적 진압 업무)로 배치받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기동대(시위 진압 업무가 주)로 보내지는 상황이 아이들로 하여금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다.
교육 중 한 경감의 발언이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우리 의경은 과거와 같은 구타나 가혹행위는 싹 사라졌습니다!”
나는 그 말을 수차례 되뇌며 하루빨리 인천광역시 관할 경찰서로 배치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