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속 빈곤
1999년 마지막 날은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아빠 고향 지인의 별장에서 그 지인 댁과 둘째 큰아버지 댁 식구들과 함께 보냈다. 그냥 잠들기엔 뭔가 후회될 듯하여 시계 초침이 2000년 1월 1일 00시 00분 01초를 가리킬 때에도 TV를 켜놓은 채 깨어있었다. 한 방송사에서는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화제작 《쉬리》를 특선영화로 방영해 줬다.
내겐 비주류 학습지로 더 익숙한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에 의하면 1999년 세상은 멸망한다고 했다던데 내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무사히 해를 넘겼다. 언론에서 Y2K라고 부르며 떠들어댔던 밀레니엄 버그 역시 조용히 지나갔고 우리 집 팬티엄 II PC에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2025년 지금 국가 전산망 화재로 정부 관련 사이트와 안전신문고 앱들이 셧다운 돼 여러모로 불편을 겪고 있다.
평생 누군가로부터 경고를 받아본 적이 없는데 비싼 등록금을 납부받는 학교로부터 학사경고를 받았다. 이런 학교에 또 거액의 등록금을 내야 하니 부모님께 면목이 없었고 1학년 과정을 충실히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과연 2학년이라고 불릴 형편은 되는지 스스로도 몹시 멋쩍은 수강신청을 했다. 이번에는 정신 차리고 부분 장학금이라도 탈 기세로 수업을 들었지만 역시 아무런 목표가 없던 삶의 관성에 의해 머지않아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여전히 같은 광역시 내에서 편도 90분 이상 소요되는 통학 루트는 금방 나를 지치게 했고 벚꽃이 흩날리는 시기에 버스나 전철 차창을 통해 마주한 쾌청한 하늘은 칙칙한 청회색의 공대 건물로 들어서는 것을 주저하게 했다. 새 천년을 맞이해 대학 간 연합하여 OCU(Open Cyber University)라고 불리던 온라인 강의도 개설돼 단 1분도 더 학교에 있기 싫었던 나는 ‘애완동물의 이해’나 ‘수지침의 이해’와 같은 교양선택 과목을 꽉 채워 넣어봤지만 딱히 머리에 남은 지식도 없이 비싼 등록금을 허비한 것 같다.
일부 실험, 실습 과목을 통해 알게 된 친구도 한 둘 있었지만 학기를 마치면 약속이나 한 듯 연락할 일이 없는 시절 인연으로 그쳤다. 변함없이 기계 쪽 고교 동창들과 겹치는 강의 한둘을 듣고 학교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2,300원짜리 무한리필 밥집에서 그나마 덜 외롭게 식사를 할 수 있음에 만족해야 했다.
줄곧 별다른 소득창출 행위 없이 부모님 등골을 빼먹는 더부살이 신세지만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소정의 용돈이나 유흥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항상 전철 표와 마을버스 토큰 꾸러미 그리고 밥값과 같이 지출 목표가 확실한 곳에만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딱히 강의를 빠지고 일탈행위를 벌이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모뎀에서 ADSL로 인터넷 속도가 비약적으로 증가된 우리 집 IT환경은 포트리스 2나 스타크래프트: 부르드워와 같은 온라인 게임 실행 도구로 전락되었다. 가장 자주 만나던 동네 친구들의 학교가 각각 고려대, 성균관대, 순천향대로 멀리 떨어진 관계로 평일에 이들의 얼굴을 보긴 어려웠는데 모처럼 주말에 이들과 풀코스로 놀게 되면 가뭄에 단비를 맞듯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다들 술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어서 작전공원에 모여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축구 경기를 압승한 후 PC방에 갔다가 7천 원만 지불하면 육고기 무한리필이 가능한 고기뷔페에서 배를 채우곤 24시간 운영하는 찜질방에서 1박을 하는 것이 우리가 일컫는 풀코스였다.
아빠는 회사에서 ‘이사’라는 직함을 달아 소득도 매우 괜찮아졌음에도 집안의 재무를 맡은 엄마는 내게 지출되는 부분엔 전과 다름이 없었다. 아니, 그냥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아니꼽고 더러웠다면 성인이니까 내가 벌면 되는데 그러지 않았고 등록금과 교재는 지원받았으니 그 정도로도 감지덕지했다.
엄마는 1997년 갑상선암 양성 판정을 받고 치료와 지속적인 추적 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많이 바뀐 듯하다. 국민학교 시절에 찰흙 준비물이 예정되어 있으면 안 그래도 되는데 밀가루를 물감과 함께 반죽하여 알록달록한 미술 재료를 쥐여주었다. 육개장이나 소고기 미역국을 차릴 때에도 질 좋은 백화점 고기만을 구입하여 끓였다가 식힌 후 굳은 기름을 일일이 걷는 방식을 고집했다. 도시락을 싸 줄 적에도 비엔나소시지에 추가로 칼집을 내어 굽거나 사과 껍질조차도 예쁜 토끼 모양으로 잘라 담아주는 식으로 열성적인 편이었다.
그렇게 이 집 남자 셋에게 헌신적이었던 엄마는 큰 병을 앓고 나서 삶의 중심축을 가족에서 자기 자신으로 옮겼다. 오로지 자기 관리에 힘써 매일같이 헬스장을 드나들고 그간 관심 없던 춤도 배우느라 생전 발 들이지 않던 홍대 앞까지 매주 빠짐없이 참석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배고프다고 하면 롯데리아에서 가장 싼 데리버거 두 개를 사두고 갈 뿐 전처럼 끼니를 잘 챙겨주는 모습이 점점 줄어들었다. 뭐, 거기까지도 좋았다.
가처분소득이 크게 증가한 만큼 엄마의 주 활동 무대는 백화점이 되었고 본인을 치장하는데 들이는 비용도 점점 늘어났다. 건강을 챙긴답시고 매일 새벽 찜질방을 나섰고 집안일에 소홀해진 만큼 빨래와 청소, 밥 등 가사노동을 외주 의뢰할 아주머니를 파트타임으로 고용하기까지 했다.
엄마가 찜질방에 나가는 시간은 보통 새벽 5시 이르면 4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이게 점점 당겨지더니 새벽 2시가 조금 된 시간에 현관문을 나서다가 잠에서 깬 아빠가 불러 세워 다투는 소리에 잠에 깬 적이 있다. 나는 눈치가 엄청 없는 편임에도 그 순간만큼은 느낌이 싸했다. 두 분이 언성을 높이는 동안 엄마의 휴대전화 통화목록을 봤다. 가장 최근에 찍힌 낯선 번호로 SEND 버튼을 눌러보니 웬 젊은 남자가 받았다. 일부러 침묵으로 텀을 두다가 그자가 누구인지 감이 오는 순간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거친 욕설을 하다가 끊었다. 그는 나와 엄마가 다니는 헬스장에 있는 코치가 분명했다. 나보다는 한 열 살쯤 많은 사람으로 훗날 TV에도 등장해 반짝 인기를 얻기도 했던 사람. 그놈도 십중팔구 내 목소리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간 내가 알던 엄마는 누구였는가? 못된 귀신이라도 들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엄마가 몹시 혐오스러웠다. 한 가정의 유부녀가 새벽시간에 헬스 코치와 통화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하는 사람은 내게 그 이유를 알려주거나 대신 변명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나의 이런 생각에 아빠는 엄마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수습하려 했지만 속아 넘어가기엔 머리가 너무 커버렸다. 이때부터였다. 나는 동생과는 달리 엄마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져 갔고 매사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헬스장을 나와 친했던 동네 친구도 다녔다. 친구와 올려다본 헬스장에 걸려있는 여러 대의 TV에서는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평양 땅을 밟는 순간이 송출되고 있었다. 혹 달린 괴물이 수괴가 있던 비밀스러운 장소에선 그 수괴의 아들이 다름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해 환하게 웃으며 우리 대통령과 손을 맞잡았다. 방문 기간 내내 적국의 흉탄에 대통령이 잘못되거나 독살당하진 않을지 조마조마하며 그 모습을 지켜봤는데 나의 망상은 실현되지 않아 참 안심이 됐다.
또래 사촌들과 명동에 모여 《공동경비구역 JSA》를 극장에서 감상했다. 영화의 재미를 떠나 북한군을 저렇게 등장시킨 작품은 처음 봤다. 북쪽 괴뢰군은 늘 이빨이 늑대처럼 뾰족하고 눈에선 불을 뿜는 그림으로 묘사됐고 똘이장군쯤은 돼야 그 악의 세력을 궤멸시키는 장면이 익숙한데 살다 보니 대통령도 북한 땅을 밟고 픽션이지만 국군과 괴뢰군이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을 다 보게 된다.
방학이 되었다. 학기 중에도 늘 그러했으나 방학에도 이 잉여로움을 영위하려면 필히 돈이 필요하다. 엄마는 여전히 백화점 실적을 올리는데 여념이 없어 보였지만 손을 벌리기는 싫었다. 작년에 공사장 알바를 제안했던 친구에게 마침 또 연락이 왔다. 약 2주간 이어지는 일자리인데 지방에 가야 한다며 괜찮겠냐는 물음에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다.
관교동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처음으로 고속버스를 타고 또 처음으로 전라북도 김제시에 방문하게 됐다. 프레지오 승합차로 우리를 마중 나온 아저씨는 김제시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의 빈 세대에 짐을 풀게 한 바로 현업에 투입시켰다. 일당 잡부였으니 일에 대한 목표나 역할에 대한 설명 따윈 생략됐지만 구축 아파트에 인터넷 통신선을 설치하는 일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이곳 작업자가 시키는 잔심부름부터 직경 2cm쯤 되는 전선 다발을 CD관에 넣어 그 전선이 CD관으로 다시 들어가 버리지 않도록 절연테이프로 단단히 감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때론 땡볕이 작렬하는 옥상에서, 때론 습하고 퀴퀴해 쥐들이 지나다녀도 전혀 놀랍지 않을 지하실에서 8시간 내내 전선과 사투를 벌였다. 끼니는 늘 정해둔 식당에서만 해결했는데 난 보름 가까이 ‘뼈해장국’ 단일 메뉴만 고집했고 매끼 두 공기 이상의 밥을 먹어대니 질리지도 않냐는 어른들의 질문도 나의 한결같은 식습관을 보곤 어느 시점부턴 계속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숙소는 아저씨들의 담배 연기로 자욱해 습식 사우나보다 가시거리 확보가 더 어려울 지경이다. 그들끼리 오가는 일상적인 대화에는 욕이 빠지는 문장이 거의 없고 거칠었는데 듣고 있자니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첫 외지 돈벌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일당 3만 원으로 계산된 금액이 입금되어 있다. 아빠는 인력사무소 잡부 일당이 5만 원인데 그럴 리가 있냐며 관리자에게 직접 연락을 하셨다. 괜히 분란만 만드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의외로 일은 잘 풀려 일당 5만 원으로 계산된 차액만큼 추가로 입금됐다. 인생 첫 임금체불을 겪을 뻔 봤지만 아빠 덕에 작고 소중한 일당을 지켜낼 수 있었다.
나름 목돈을 손에 쥐어 친구들과 뭐 할까 고민하다가 바이크를 구입해서 전국 일주를 떠나기로 했다. 갈산동 허름한 단층 건물에 위치한 오토바이 전문점 아저씨에게 매매 의사를 비추니 혼다 TACT를 총 4대 100만 원에 맞춰주겠다며 하루 뒤에 와서 인수해 가라고 했다.
다음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과외 알바 중인 녀석을 제외하고 나까지 셋이 먼저 상점에 방문해서 제품의 상태를 관찰했다. 싼값에 구입하는 개체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패치로 기운 청바지처럼 여기저기서 수급한 부품으로 간신히 굴러가게끔 제작해 둔 바이크 네 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중 한 대는 바디 칼라(블랙)와 프런트 커버(레드) 간 색이 맞지 않았다.
그 과외를 하던 녀석이 뒤늦게 그 칼라 언매칭 개체를 인수하며 우리에게 불만을 표출했지만, 그저 전과 다른 기동력을 얻었다는 사실에 무리는 들떠있었다. 시운전 조로 인천 시내 곳곳을 돌고 중동 신도시까지도 순식간에 다녀왔다. TACT 바이크는 분명 버튼으로 시동을 거는 타입인데 짜깁기 재생산을 한 물건이다 보니 잠시 멈췄다가 다시 출발을 하려면 모두가 온 힘을 다해 발로 킥 스타터를 밟아대는 모습이 참 웃프다. 개중에는 간헐적으로 버튼 시동이 걸리는 개체가 있는가 하면 유일하게 클랙슨이 작동되는 개체도 있었다.
다음날에도 시운전은 이어졌다. 시운전을 하며 공히 느낀 문제는 함께 출발한 아이들이 주행 중 자꾸 사라진다는 사실이었다. 연료 게이지가 고장 나 주행 가능 거리 예측이 불가능한 관계로 연료가 바닥난 것도 몰라 갑자기 멈추거나 과열된 엔진이 퍼지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럴 때면 역주행을 해 낙오된 친구를 찾아내거나 인근 주유소에서 PET병에 휘발유를 담아 배달하는 일까지 잦아지다 보니 이 상태로는 도저히 전국 일주가 불가능하다 판단했다.
대안을 고민하던 중 과외 알바를 하던 그놈이 매형에게 싸게 얻은 은회색 르망 차량을 끌고 나타났다. 확실한 교통수단을 마련한 무리는 외부에 놔도 딱히 탐낼 것 같지 않은 구닥다리 TACT 4 대를 협력하여 우리 아파트 지하실에 고이 숨겨두곤 어렴풋이 계획해 뒀던 여행을 떠났다. 부평동의 한 의료상에서 벌당 1만 2천 원에 구입한 환자복을 유니폼으로 맞춰 입고 집을 떠나 몹시도 설레는 우리들만의 휴일이 시작됐다.
내비게이션과 같은 신문물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두꺼운 지도책을 봐가며 강원도로 향했다 중간에 오대산 계곡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폐교 운동장에서 야영을 해가며 양양 낙산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텐트를 설치하려는데 햇빛에 검게 그을린 아저씨가 자릿세를 요구했다. 좀 떨떠름했지만 원래 그런갑다 하고 돈을 건네 누울 자리를 살폈다. 해변엔 젊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고 활기가 넘치다 못해 폭발한듯한 인근 나이트클럽에서는 채정안의 <무정>과 같은 곡들이 밤새 재생되었고 동시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져 선잠을 잘 정도였다. 그에 반해 젊음으로 가득한 해변을 우리 넷은 아주 잠시 밟아봤을 뿐 다시 텐트 안에 틀어박혀 열심히 고스톱을 쳤다. 그저 밥 당번, 설거지 당번을 선정하기 위한 게임이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등줄기인 동해를 루트로 포항, 경주, 부산까지 환자복 사총사는 쉼 없이 달렸다. 아끼고 아꼈으나 자금난에 시달려 무리 중 그나마 현금이 있는 그 과외맨에게 셋이 빌붙기 시작했다. 피서지로 유명했던 해운대 해수욕장도 들렀다가 인근 목욕탕에 들러 찐득한 몸과 곳곳에 달라붙은 모래 알갱이를 떼어내고 밀린 빨래까지 마치곤 바로 경부고속도로에 올라 또 한참을 주행했다.
딱히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캐리비안 베이에 가보고 싶어서 어둑한 새벽에 넓디넓은 에버랜드 노외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비좁은 르망 안에서 창문을 연 채 잠을 청했다. 열대야에 들끓던 모기로부터 피부를 뜯겨가며 또 선잠을 잤다. 한 녀석은 내게 차 옆에 텐트(아빠 거 몰래 가져온)를 펴자고 졸랐지만 접는 과정이 매우 번거로웠던 관계로 가비얍게 무시했다.
새벽 내내 더위와 모기와 씨름을 하다가 오히려 일출 후 잠시나마 깊게 잠들었다. 눈을 떠 보니 9시가 다 됐고 주변은 어느새 가득 주차된 차들과 사람들로 붐볐다. 우린 서둘러 매표소로 향했고 탈의실에서 환복 후 한여름 극성수기의 캐리비안 베이에 첫 발을 디뎠다.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틀 카메라로 넘어가기 전 시점이었고 열심히 촬영해 모아둔 필름통에는 대부분 인화가 불가능했던 관계로 사진을 남겨두지 못한 것이 참 아쉽다. 지금과 같은 레시가드 따윈 세상에 등장하지 않는 아이템이고 트렁크형이 아닌 딱 붙는 실내용 삼각 수영복만 걸친 촌놈 넷은 좋다고 시시덕거리며 곳곳을 누볐다.
그곳은 마치 롯데월드를 처음 봤을 때처럼 신비로움으로 가득했고 수많은 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썸머 바이브로 충만한 Lou Bega의 <Mambo No. 5>와 Cartoon Heroes의 <Aqua> 곡이 반복해서 재생됐다. 그때도 외부 음식 반입이 금지된 관계로 공복에 유수풀과 여러 슬라이드를 신나게 이용하느라 금방 허기가 졌다. 또 과외 녀석에게 의존해 아주 비싸고 양 적은 워터파크 식당 음식을 사 먹곤 해가 뉘엿뉘엿 져 갈 때쯤 집으로 돌아와 또 고스톱을 쳤다. 이번엔 여행 후 남은 사발면이나 3분 카레와 같은 물건을 나누기 위함이다.
또 어렵게 알바하고 순식간에 탕진했다. 당시 함께 놀던 친구들은 모르지만 적어도 난 미래의 꿈, 목표, 걱정 따윈 안중에 없었다. 학교에 가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아빠의 반대에도 휴학을 강행했다. 나무늘보보다도 철저하게 움직이지 않으며 아주머니가 해 주시는 밥과 냉동 생선가스를 축내고 다시 방 안에서 디아블로 II 따위의 게임만 이어갔다.
한술 더 떠 무슨 생각에선지 탈색을 하고 싶었다. 돈도 없이 동네 미용실을 찾아 한 번에 8번을 탈색 작업을 하다가 열처리 과정에서 두피에 화상을 입었다. 하루 내내 탈색을 하곤 PCS로 엄마에게 연락해 결재를 요청했다. 미용실 사장님이 계산하며 “아드님이 곧 군대 갈 건가 봐요? 이런 머리를 다 하고.” 하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집에 와서 보니 머리카락은 매우 가늘어지고 물만 닿으면 고무줄처럼 늘어져 빗질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드라이 시간도 20분은 족히 소요되었다.
백사자꼴을 한 한량 한 마리가 들판을 누비지는 않고 우리에 처박혀 포효하고 있다. 차라리 워킹 홀리데이를 알았다면... 뭔가 경력에 도움 될만한 일을 해봤다면... 남들처럼 군대에 가버렸다면 인생이 더 순조롭게 펼쳐졌을 텐데 하며 글을 쓰면서도 수없이 생각했다. 이래서 어른들 말씀은 틀린 게 없다고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