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무인년

고삼씨티

by 김동의

인생의 향방을 가를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것만 같은 고3이 되었다. 교실의 아이들은 리어날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영화 《타이타닉》 개봉 소식을 언급하며 부평역 대한극장에 가니 마니 한다. 한 아이는 우리가 돈을 내고 그 영화를 보게 되면 외화가 유출돼 국채보상운동처럼 뜻깊게 실시된 전 국민 금 모으기 운동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매국보다는 애국이 훨씬 숭고하다고 배워온 나는 그의 말에 수긍하여 개봉 시점에서 한참 지난 12월이 되어서야 부평 동아시티백화점에서 구입한 비디오테잎으로 그 영화를 접하게 됐다. 적어도 국내에서 테잎을 제작·유통·판매한 회사의 이윤 창출에 일조했을 것이라 믿는다.


3학년도 8반, 담임도 그대로 김관회 선생님이 맡았다. 담임이 누구냐에 따라 내 대학 진학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나를 제일 언짢아하는 선생님을 또 한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당시엔 그게 그냥 싫었다. 돌아보면 참 열심히 교내 교재를 편찬하고 착실히 직장 생활을 해 온 분이었는데 몇 번 혼이 났다는 이유로 뒤틀린 시선으로만 그분을 바라본 것 같다.


가나다순으로 27번이 되었다. 26번부터 시작되는 남학생의 번호로 따져보면 두 번째 번호다. 그간 내 앞을 채웠던 강 씨, 구 씨들 다 어디 간 것인가... 번호순으로 평가가 이뤄지거나 발표를 하게 됐을 때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주던 보호 장벽이 사라졌다. 반 배정부터 부여된 번호까지 여러모로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거실 장식장에 이름 모를 작은 향수병들과 나란히 전시돼 있던 24K 황금 오리 한 쌍과 골프채, 골프공이 사라졌다. 엄마가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한다고 오랜 대기 끝에 판매한 오리 일행은 수납원이 받자마자 망치로 내리쳐 찌그러뜨린 채 담아 갔다고 한다. 심난할 때마다 몰래 유리문을 열어 금세공품을 만지작댔는데 작은 상실감이 느껴졌다. 그들과 교감하고 이온화 경향 끝에 있는 Au 원소를 떠올리며 내 곁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지만 그렇게 갔다.


워크아웃과 구조조정이라는 생소한 단어들과 함께 언급되던 회사에서 용케 살아남은 아빠는 오히려 진급을 했다. 무슨 공장장이라고 들었는데 업무용 차량으로 지급된 검은색 뉴그랜저도 간간이 집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작년 말 국가적 외환위기 속에서 할인을 많이 됐는지 현대정공(現 현대모비스)에서 생산한 버건디색 싼타모를 장만해서 그간 우리 가족의 발이 돼줬던 흰색 소나타 II까지 총 3대가 주차면을 차지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중 주차까지 빼곡했던 단지 내 주차 상황을 악화시키는데 504호가 큰 몫을 해냈다. 이때 즈음 차량 할인 폭이 매우 컸던 초록빛 기아 크래도스 II 차량도 도로에 유독 많이 눈에 띄었는데, 이랬던 기아도 다른 기업에 인수됐다. 기아차 소속으로 입사해서 작년에 정년퇴직하신 분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무실에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은 퇴직해야 했어.”


차장부터 사원까지 퇴직을 권해야 했던 김 부장은 김공장장이 되어서도 뉴그랜저의 안락한 시트에 편히 앉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속도 모르고 장남은 고3이라는 이유로 대단한 공부라도 하는 양 집에서 유세 떨어댔다.


그간 TV에 등장하는 가수들은 엄청 어른들로 느껴졌다. 그러나 작년부터 양파, SECHSKIES, S.E.S, FIN.K.L과 같은 내 또래 가수들이 등장해 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친구들 중 누군가는 그들에 자극을 받아 더욱 열심히 살았을 텐데 또래 가수들이 유명해짐에 따라 경제적으로 더 빨리 독립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할 정도로 난 어렸다. 아무런 꿈이 없었다. 그래서 마음은 늘 쫓기는 반면에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한 고3의 학업은 진척이 없었다.


이 난국을 타개해 보고자 새로운 스타일의 학습법을 고안해 냈고 부모님께 뜻을 비췄다. 친구들을 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져 공부에 잘 집중할 수 없던 관계로 밤늦게까지 학교 책상 앞에 앉아있기보다는 집에서 일찍 잠들고 새벽에 일어나는 방식을 택했다. 담임 선생님과의 딥토크를 통해 야간 타율학습에 열외 할 수 있는 기회를 어렵게 얻고 1, 2학년 후배들과 함께 이른 셔틀버스를 이용해 집에 왔다. 밥 먹고 씻고 순풍산부인과까지만 감상 후 잠에 들고는 새벽 1시쯤 일어나 문제집을 폈다. 적막함에 괜히 뢔디오를 여기저기 돌리다가 102.7 Mhz에 맞춰봤더니 AFN 방송이 흘렀다. 빽스트륏 보이즈의 <As long as you love me> 등의 팝송을 들으며 혼자 공부하는 방법은 나쁘지 않았지만 수면의 질을 고려하지 않은 것을 난 가장 큰 흠으로 꼽는다.


명색이 이과인데 수학 점수가 저조했다. 선행 단계의 이해가 없는데 수학 문제만 많이 본다고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은 이미 수학을 마스터한 후 수리탐구영역 II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시기에 나는 고1 과정인 공통수학 집합 단원부터 다시 들여다봤다. 두꺼운 《수학의 정석》은 덮어두고 교과서를 위주로 이론을 이해하며 EBS 교재와 같은 얇은 문제집으로 확인을 하는 식으로 진도를 나갔다. 이게 고3 학기 초의 일이다.


이렇게 공부하니 어느덧 미적분까지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학 문제가 퍼즐 게임과 같이 흥미롭게 여겨지는 지경에 이렀다. 이후 2학기 모의고사부터 수리탐구영역 I 만큼은 만점을 받게 됐다. 이제 수능이 50일 앞으로 성큼 다가올 무렵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처참한 문해력에 언어 영역은 운에 맡기기로 했고 외국어 영역은 버케뷸러리만 외우다 보면 의외로 괜찮은 성적을 낼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매일 영단어장을 보고 하루 중 절반 이상은 공통과학이나 선택 과목인 지구과학에, 남은 절반가량은 사회, 국사 과목을 들여다봤다. 남들은 못해도 4~5 회독은 족히 공부가 된 부분일 텐데 이제야 경기 연천 전곡리, 충북 단양 수양개부터 읊어가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여순 반란 사건, 제주 4·3 폭동이란 말이 더 익숙했던 당시의 현대사 부분은 출제 빈도가 극히 낮았으므로 가비얍게 생략했다.


어떤 친구는 이때부터 반복되는 문제 풀이로 인한 매너리즘에 빠진 듯 막 생겨나기 시작한 부평역 PC방을 수시로 드나들며 스타크래프트 게임에 시간을 쏟는 여유도 보였다. 나는 이제야 간신히 1 회독을 마쳤는데 그들과의 간극이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사실 정조준했던 것은 흰 공이 아닌 수능이었다.


1998년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했는지는 모르지만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세기말 듣보잡 학습지가 있었다. 반에서 한두 명의 아이들만 이 학습지를 구독했고 그 한두 명에 나도 포함되었다.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처럼 수능 출제 문제를 예측한다는 컨셉인데 그 최종 예언집이라 할 수 있는 모의시험지는 정말 수능날에 임박해서 등기로 보내졌다. 불안감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이들은 조심스레 내게 다가와 그 시험지를 복사해도 괜찮겠냐는 허락을 구한다. 성적으로는 나보다 훨씬 앞선 아이들이라 관대한 척 시험지를 빌려줬다. 불행히도 수능날 마주한 문제들은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정말 실 있던 아이들은 내 모의시험지에 관심조차 없었고 열심히 복사해 갔던 아이들은 서울대에 합격하지 못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하루 전인 예비 소집일이었다. 써머리를 위해 들여다본 사회탐구영역은 볼 때마다 새롭다. 요점 정리가 아닌 벼락치기 시험공부하듯 들여보다 보니 어느새 밤을 새웠다. 볼수록 시간이 부족했다는 후회로 가득했다. 《미스터 Q》 재방송을 시청했던, 나이지리아 대 스페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월드컵 경기를 지켜봤던, 환기한답시고 PC를 켜 KOEI 삼국지 II 게임을 했던 지난날의 내가 몹시도 원망스러웠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11월 18일 수요일 새벽 인천 부광고등학교까지 아까 그 싼타모로 아빠와 엄마가 배웅해 주셨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게 움직임이 편한 팬츠에 면 소재의 후드티 그리고 검은색 패딩 조끼를 입고 수차례 수험번호와 자리를 확인하며 여분의 컴퓨터 사인펜까지 병적으로 재차 들여다봤다.


1교시 언어 영역의 듣기 평가가 시작됐다. 스피커에서 지지직하는 신호음이 나오고 본격적으로 녹음된 지문이 나오기 전까지의 짧은 침묵이 너무도 피를 말린다. 지문이 나오는 동안에도 0.1초 정도는 딴생각에 빠져들었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려본다. 헷갈린다. 뭐라고 했더라? 시험지에 인쇄된 객관식 문항으로 성우가 했던 말들을 서둘러 유추해 본다. 모의 연습이 아닌 Final, Real 시험이다. 뚜렷한 목표도 꿈도 없으면서 삐끗하기라도 한다면 인생이 나락 갈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력을 다한다. 집중했더니 그간 읽히지 않던 긴 지문이 제법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어떤 지문은 재밌기까지 하다. 네 녀석만큼은 시험이 끝나도 찾아서 읽어주마 했는데 실제 행동으론 옮겨지지 않았다. 이대로면 역대급 성적을 찍을 수 있을 듯했다.


충분히 긴 휴게시간이 주어짐에도 남자화장실은 소변기 대기 줄로 혼잡하다. 나도 빨리 다녀와서 다음 시간을 준비하겠다는 일념으로 변기 앞에 서서 지퍼를 내렸다. 그러나 내 뒤로 바짝 다가선 어두운 그림자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따가운 시선들은 빨리 물을 내리고 사라져 주기만을 바라는 듯하다. 부담감에 애꿎은 수돗물만 흘려보내고 다음 기회를 노려본다.


2교시 수리탐구영역 I 시간은 수학이다. 첫 장부터 뭔가 막히는 문제가 등장해 일단 스킵하고 나머지를 풀어본다. 맨 뒷장도 두 문제가 풀리지 않는 신비로 남을 각이다.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인데 복병을 만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조금만 생각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는데 아쉬워하며 점심 식사 시간을 맞았다. 평소와 같이 식사를 했다간 식곤증이 올까 봐 오예스 하나를 뜯어 캔커피와 함께 섭취했다.


시험의 성패를 나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3교시 수리탐구영역 II 시간이다. 공통과학은 고통과학처럼 어렵게 느껴졌고 선택 과목인 지구과학은 지구보다 우주의 얘기만 다룬 외계 과목같이 난해했다. 사회탐구 분야는 그럭저럭 수월하게 풀어나갔지만 역시 내 인생에 요행이란 없었다. 언어영역과 합쳐서 40점 정도 감점이 된 만큼 나의 대학 선택지는 점점 좁혀져 갈 것이다.


마지막 외국어 영역 시간은 이판사판이다. 체력적으로도 지쳐 조속히 시험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싶다. 완벽히 해석되는 지문은 드물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찾듯 그저 아는 단어 만으로 지문의 요지를 넘겨짚으며 최선을 다해 답을 골랐다. 어릴 적부터 대학 대학! 못이 박히게 듣던 그 대단한 대입수학능력시험을 그렇게 마쳤다.


어두운 새벽에 들어와 또다시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 낯선 학교 운동장의 마사토를 사박사박 밟으며 퇴장했다. 시험장이 달랐던 친구를 부평역에서 만나 함께 용산역으로 향했다. 그는 그간 절제된 삶을 보상받으려는 듯 그곳에서 플레이스테이션 중고 제품을 구입하곤 다시 돌아왔다. 피곤한 줄도 모르고 처음 가 본 부평 SN PC방에서 조심스레 스타크래프트 CD를 삽입 후 펼쳐진 ‘실시간 온라인 게임’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새벽까지 체험하곤 첫눈에 반해버렸다.


다음날 조간신문을 보고 가채점해 본 결과는 기대만큼 좋지 못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나보다는 높은 득점을 한 아이들 얘기만 들린다. 그래도 고교 3년 과정 동안 2년은 놀고 수개월 바짝 공부해서 얻은 결과에 이내 수긍했다. 내신은 처참한 상태이니 수능 점수로만 입학 가능한 학교를 알아봤다. 딱히 원하는 학교나 전공이 있지는 않았지만 막상 고르려니 선뜻 손이 가는 곳은 없었다.

수험표에 적어본 나만의 정답 (개명 전 이름이다...)


서인천 고등학교에서는 교장선생님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학생에 한하여 졸업식 단상에 올려 도자기를 수여했다. 그렇게 매년 70명에서 80명 정도의 학생이 도자기를 받았고 부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나도 저 단상에 오르내리는 상상도 해봤다. 소위 SKY로 일컫는 학교까지 포함하면 한 학년에 200명을 훌쩍 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 사이에서는 “너 그렇게 놀다가 ○○ 대학 간다~” 하는 말을 농담 삼아 자주 했다. 그러나 시험을 마치곤 많은 아이들이 비웃던 그 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수능 점수 100% 특별 전형을 실시하는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했고 선택 과목이었던 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 시험 간 난이도를 보정하여 반영한 변환표준점수로는 내가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서점에서 해당 대학교의 원서를 구입했고 지원할 과를 선택할 적에 아빠와 의견이 달라 마음고생을 좀 했다. 나는 순수과학이나 공대는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의류학과’를 안정적으로 지원하려 했으나 아빠는 화를 내며 공과대학을 써서 내게 했다. 당시엔 마음이 아팠으나 그때 아빠의 선택 덕분에 지금 사람 구실하며 먹고살고 있는 듯하여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학교 원서에 담임선생님 확인이 필요했는지 교무실 앞에서 한참 대기했던 기억이 있다. 학교별로 원서가 담긴 봉투가 디자인 때문에 금방 표가 났는데 대기 중인 아이들의 손에 의외로 같은 대학교의 봉투가 들려있었다. 3년간 조롱받던 대학교(그래도 내겐 과분한 명문 대학교이다.)에 그렇게 170명 가까이 합격하며 대학교에 가서도 익숙한 얼굴들을 많이 마주했다.


수능을 마치니 매일이 친구들과의 약속이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어쩜 그렇게 약속된 장소에서 하염없이 친구들을 기다렸는지 의문이다. 나는 삐삐를 건너뛰고 바로 PCS를 구입했다. 'One shot 018!' 부모님 도움으로 손에 넣은 현대전자의 걸면 걸리는 걸리버 폴더폰이 생애 첫 휴대기기이다. 한층 편리하게 친구들을 만나호프집으로 PC방으로 종횡무진하며 마지막 10대를 불살랐다. 내년이 되면 난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 과 같은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This is 세기말 style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17화1997, 정축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