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 기묘년

잉여로운 대학생활

by 김동의

내신 성적이 포함된 일반 전형을 거쳐 고대에 어렵게 합격한 친구 놈과 운전학원을 등록했다. 그냥 운전연습학원이 있고 각종 시험까지 대행하는 운전전문학원이 있었는데 미리 알았더라면 수차례 남동구 고잔동 구석탱이에 위치한 면허시험장까지 찾는 고생을 덜 했을 것이다. 친구네 집에서 운전면허 기출문제집 한두 시간 보고 시험장에서 1종 보통 필기시험을 치렀는데 친구는 80점 커트라인으로 합격, 나는 한 문제 차이로 불합격을 했다. 너무 창피해서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다음 회차에 치러진 필기시험은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고득점으로 패스했다. 얄궂게도 이후 필기시험 커트라인은 1종 보통은 70점, 2종은 60점으로 하향 조정됐다.


1차 실기인 장내 코스 시험에선 학원과 시험장의 컨디션이 사맛디 아니하여 번번이 떨어졌다. 한 번은 T자 코스 연석에 올라타 직원에게 거의 목덜미를 잡혀 가다시피 퇴장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세 번째 시험장을 찾아서야 평행주차 코스까지 완벽히 마쳤고 같은 해 여름 보슬비가 내리던 날 도로주행시험까지 통과할 수 있었다.


설 연휴 동안 어른들께 두둑이 받은 세뱃돈은 이제 엄마에게 맡기지 않았다. 늘 돈을 맡아두겠다던 엄마의 말은 기약이 없기도 하고 통장이나 금고에 모아두는 일을 전혀 목격하지 못했기에 아주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제법 뚱뚱해진 지갑을 가지고 친하게 지내던 동네 친구 셋과 목동에 있는 아웉레트를 찾아가 96NY, GV2, BASIC, Yah 등의 매장에서 옷가지를 사는데 탕진했다.


수능점수 100% 특별전형으로 일찌감치 합격한 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OT)을 실시한다며 참석하라는 안내가 왔다. 같은 고등학교에서 170여 명이나 이 학교에 합격했지만 정작 같은 ‘과’에 합격한 이는 나 혼자뿐이다. 정문으로 들어가 마주한 공과대학 건물은 일부러 조색하려 해도 어려울법한 칙칙한 청회색 계열의 페인트로 칠해졌고 현관 안쪽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공간이나 드나드는 학생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둡게만 느껴졌다.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거나 김대중 정부를 규탄하는 내용의 현수막은 락카로 어설프게 쓰인 채로 여기저기 어지럽게 걸려있다. 그 건물 옆에서 ‘선박해양공학과’라고 쓰여있는 표지판을 찾아 명단을 들고 있는 아저씨에게 성명을 확인 후 쪼그려 앉았다.


극히 일부 학생은 안면이 있는지 서로 활발하게 대화를 했으나 대부분은 그냥 나처럼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여학생은 보이지 않는 남탕 그 자체였다. 명단을 확인하던 아저씨 무리가 안내한 버스에 올라 적당히 구석진 창가 자리에 앉았다. 어느 정도 자리가 채워지니 아저씨 무리 중 한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자기를 소개하거나 뭔가를 공지하고 신입생들에겐 또 뭔가를 지시했다. 우리를 주로 인솔하는 이 아저씨 무리는 알고 보니 2학년 혹은 3학년 선배들이었다. 그리 간절함 없이 이 과를 지원하여 합격해서인지 고속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자신을 소개하거나 먼저 누군가에게 다가가 아이스브뢔이킹을 하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다.


피닉스파크 유스호스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로 절어있는 카펫이 깔린 강당에 모여 본격적인 행사를 시작했다. 학교 전체 OT였기 때문에 다른 과에 있는 동창들도 보였고 재수를 거쳐 의류학과 98학번으로 입학한 사촌형도 만났다. 사람도 많아 정신없는 강당에서는 우스꽝스러운 행사가 이어졌고 이름 모를 밴드 동아리에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며 신입생들의 호응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응원 동아리의 절도 있는 공연까지만 보고 숙소로 올라와 챙겨 온 백팩을 쿠션 삼아 비스듬히 베고 누웠다.


빈 방에는 나 말고도 한 두 명의 신입생이 있어 간단히 통성명만 하고 침묵을 이어갔다. 서로에게 그리 호기심이 없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타인에게 말 걸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2021년 6월 G7 정상회의가 있었다. 정상들 간 비공식적인 환담시간으로 기억하는데 각국 정상들과 활발히 이야기를 이어가던 문재인 대통령과 달리 난감한 표정으로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홀로 서있던 스가 총리의 모습이 인상 깊다. 기사도 많이 났는데 스가 총리를 보며 마냥 비웃기만 할 수 없었던 것이, 초점을 거의 잃은듯한 그의 자신 없는 눈빛에서 어딘가 익숙한 내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OT기간 내내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힘겨운 2박 3일을 보냈다.


고요했던 숙소는 본격적인 학교 행사가 끝이 나자 인솔자 격인 선배들과 신입생들이 몰려 소란스럽게 변했다. 숙소 안에서는 페트병에 든 소주와 ○○깡 시리즈의 스낵 몇 개를 뜯어 놓고 선배들의 주도로 작은 행사가 이어졌다. 다시 주변을 보니 오전에는 보이지 않던 여학생들도 보인다. 총 104명의 신입생 중 네 명의 여학생이 존재했는데 이 작은 행사에서 스포트라이트는 시커먼 남학생보다는 주로 이들에게 집중됐다. 유치 찬란한 술게임이 이어졌고 어쩌다 보니 나도 벌칙에 걸려 종이컵에 한가득 담긴 소주를 반강제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고2 무렵부터 숱하게 친구들과 호프집을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많은 양의 소주를 단시간에 마신 적은 없었다.


우리 집안은 주량이 약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술을 못하는 혈통을 지녔다. 아버지와 삼촌들은 물론 얼굴을 뵙지 못한 할아버지도 알코올분해효소가 전무했다. 외가 쪽에서는 그나마 외할아버지께서 술을 좀 하셨는데 엄마도 맥주 몇 잔을 마시면 취해 잠에 들기 바빴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던 90년대의 직장인보다 앞서 80년대부터 직장생활을 해 온 아빠는 술 한 방울을 입에 대지 않고 대체 어떻게 버텼을까? 직장 상사를 모시거나 거래처 직원들과의 회식 자리가 많았는데 n차 회식을 모두 마칠 때까지 자리를 지켜 취한 직원들을 모조리 챙겨 택시를 태우거나 아빠 차로 기사노릇을 하며 버텼다는 이야기는 숱하게 들었다.

지금은 납골당에 모셨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묘가 존재했던 2004년 진천군의 한 야산에서 추석맞이 벌초 작업을 할 때였다. 뜨거운 햇살 아래 예초기와 낫, 갈퀴로 열심히 풀을 깎아내곤 진천 아저씨께서 목이나 축이자고 내민 술을 아빠가 받아 마신적이 있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봉분 앞의 상석에 앉아 계시던 아빠는 일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대로 잠이 드셨다. 설마... 장난이겠지 했는데 정말 그대로 한참을 주무셨다. 소주 한 모금만 마시면 얼굴과 온몸이 불긋해지는 대중에게 환영받지 못할 저주받은 피는 내게도 내 동생에게도 이어졌다.


페트병 소주 종이컵 원샷은 바로 신호가 왔다. 정신은 온전한데 숙소의 벽과 바닥은 다람쥐통처럼 회전하고 숨을 쉴 때마다 매스꺼움은 강해져 행사고 선배고 뭐고 보이는 것이 없었다. 방 안에 붙어있는 싸구려 UBR 화장실에 한가득 구토를 했는데 위를 비롯한 장기 일부가 쏟아져 나온 줄 알았다. 몇몇 사람들의 “어으~”하는 탄성만 들릴뿐 괜찮냐며 등 한 번 두드려주는 이 없었다. 이 학교 이 전공의 학생들은 뭘 공부하고 무슨 꿈을 꾸며 졸업하고 뭐 해 먹고사는지가 궁금했는데 이곳에 머무는 동안 지루하고 한심한 술파티는 계속됐다. 《우리들의 천국》이나 《남자셋 여자셋》 류의 TV속 세상과 같이 캠퍼스 안 잔디밭 위서 남녀가 무리를 이루며 하하 호호할 줄 알았던 나의 대학생활은 2박 3일간의 OT 경험으로 전혀 그렇지 않음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대학교에도 교가는 존재했지만 가사를 외우거나 재창하지 않아도 문제 삼는 이는 없었다.


보다 자유로운 대학교는 고등학교와 다르게 시간표를 스스로 작성해야 했다. 얼마 전 2백만 원 가까이 주고 구입한 현주컴퓨터는 무려 팬티엄 II의 강력한 CPU에 무려 5600K의 모뎀을 갖춰 비교적 빠른 IT 환경이 집에 조성되었다. 덕분에 학교 전산실이나 PC방에서 길게 줄 설 필요 없이 집에서 원하는 과목을 클릭했다. 학기당 최소 18학점에서 24학점까지 수강이 가능했는데 제길 무슨 과목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OT 때 이런 거나 좀 물어볼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스몰토크를 나눴던 선배들의 전화번호를 교환한 것도 아니어서 다소 막막했다. 그냥 교양필수나 교양선택이라고 쓰여 있는 과목들로 채우려는데 한 두 과목은 벌써 마감이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수업 좀 듣겠다는데 클릭조차 불가능하다니 이게 나라냐 싶었다. 게다가 애송이의 시간표는 효율적이지 않았다. 센스 있게 점심시간을 확보하고 1교시를 피하거나 가급적 공강을 적게 가져갈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못했다.


학교도 집도 모두 인천광역시 내에 위치하지만 편도로 90분 이상은 족히 소요됐다. 아파트 정문의 마을버스 정거장에서 3번을 타고 30여분 가면 안내표에는 ‘부평소방서’라고 써 놨지만 한빛은행 앞에 정차한다. 23번 지하상가 출입구를 통해 10분 남짓 걸으면 부평역 매표소가 나왔고 1호선 열차를 탑승해서 또 10분을 가면 주안역이 나왔다. 주안역 지하상가까지 길게 늘어진 마을버스 1번 대기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최소 20분 이상 줄을 서야 입석으로라도 버스 탑승이 가능했고 그렇게 사람들 틈에 끼여 20여분을 더 가야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9시에 시작하는 1교시를 주 2회만 참석해도 아침부터 탈진상태가 되기 십상이었다. 점심시간 없이 강의가 이어지는 날엔 한 줄에 천 원 하던 공대건물 앞 김밥을 구입해 휴게실 구석에서 누가 볼까 무섭게 빠른 속도로 입에 쑤셔 넣은 날도 있다. 목표의식이 없으니 진행되는 강의들이 귀에 잘 꽂히지 않고 교정에는 어느새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과 개나리가 괜히 마음만 들뜨게 한다. 공대 아웃사이더는 다른 과 아웃사이더가 된 고교 동창들과 만나 수업을 빠지고 학교 앞 식당에서 2,300원짜리 메뉴를 골라 먹은 후 10분에 600원 하는 당구장이나 PC방을 찾아가 스타크래프트 무한맵 팀전을 하며 시간을 학살했다.


당구를 치는 20살 애송이. 내 4구 실력은 그때도 지금도 80이다.


아침부터 샤워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 학교에 왔건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레포트 과제는 무슨 도서를 참고해야 할지 몰라 엉뚱한 책만 복사해 댔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전처럼 벼락치기해서 대응하기에는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기도 했지만 전공서적의 양이 방대해 무리였다. 교수나 조교들이 설렁설렁 수업하는 것 같았는데 그 두꺼운 전공책의 절반이나 진도를 뺐다. 선배들과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학생회나 하다못해 동아리 활동이라도 하는 아이들은 시험 족보와 같은 Tip을 얻어 한층 수월하게 대학생활을 헤쳐나갔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주어진 조건에 맞춰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이 수동적으로 자라난 외톨이 애송이는 대학이라는 살짝 넓은 세상을 마주하며 맥을 못 추렸다. 풀어줘도 좀처럼 날지 못하는 새장 속에서만 자라난 새처럼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지 못했다. 요령을 가르쳐주는 이 하나 없다. 차라리 아르바이트라도 했으면 경험도 쌓고 용돈벌이라도 했을 것을... 게이트웨이에서 드라군이나 뽑아대며 인생을 허비했다.


고교 동창들이 다른 학교와 메이드 하거나 한참 유행했던 채팅 사이트를 통해 미팅을 잡아오는 경우도 있어 두어 번 참석했다. 아웃사이더 모쏠 공대생은 이런 무대에서마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해하며 진땀을 뺐다.


1:1 소개를 받게 된 상대를 학교 앞 '노란 잠수함'이란 다방에서 만난 일도 있다. 어색한 대화가 몇 마디 오가지도 않았을 무렵 난 차가운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켜버렸다. 토커바웃 과정에서 홀짝홀짝 마시는 음료로 인해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상대는 주문한 볶음밥의 1/3도 못 먹었는데 난 벌써 고기만두를 다 먹고 찜통 위에 놓인 하이얀 거즈만 젓가락으로 콕콕 쑤시고 있었다. 처음 마주 앉은 소저에게 쩝쩝대며 입 속 한가득 음식물을 넣는 모습이 무척이나 추접스레 보일까 봐 의도적으로 한 입 사이즈의 고기만두를 주문한 것이었다. 상대가 마음에 들었는데 그날 이후 그녀는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고기만두 외에도 꼬마 김밥을 추가로 주문해야겠다며 나름 전술을 손봤지만 더 이상 내겐 소개팅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기 하듯 누군가와 연애라도 했더라면 20살의 내 삶은 좀 더 풍요로워졌을 텐데 지금 돌아봐도 그 젊음이 너무 아깝고 아쉽다.


6월 20일경 마지막 과목 기말고사를 마치자 자동으로 방학이 시작됐다. 9월 초 개강까지 짧지 않은 기간이다. 여러모로 인생 경험을 쌓으라고 주어진 시간이었을 테지만 그저 노는 시간으로만 알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본격적인 집돌이 폐인 생활을 시작했다.


아빠는 집에만 있지 말고 친구들과 산이라도 올라가라고 했건만 그저 잔소리로만 치부하고 한 귀로 흘렸다. 친하게 지내는 동네 친구 셋은 과외로, 부평 용우동 알바로, 집안 가게일로 저마다의 노동을 했는데 나만 느지막이 일어나 PC를 켜고 엄마가 집 전화도 못쓰게끔 5600K 모뎀을 통한 인터넷 세상 배회하곤 했다.


그런 생활도 지겹다 느껴질 때 고등학교 동창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와 함께 일당이 센 아르바이트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즉석에서 알겠다고 답했다. 5시 50분까지 간석동에 위치한 한 인력사무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모처럼 알람을 맞춰 일찍 기상했다. 5시에 탑승한 마을버스나 전철은 매우 한산해 마치 내가 잠든 세상을 깨우는 선구자가 된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허름한 건물 2층에 위치한 인력사무소에는 철제 책상 하나와 짝이 맞지 않는 허름한 소파가 몇 개 놓여있을 뿐이다. 책상에는 야들야들한 소재에 기하학적인 패턴의 피케셔츠를 입은 깍두기 머리 아저씨가 장부 같은 걸 펼쳐두고 앉아있었고 머리가 희끗한 할저씨부터 나보다 10살 이상은 족히 많아 보이는 형님들까지 그 소파에 앉거나 서서 담배를 피우며 일부는 장기알이나 화투 따위를 손에 쥐고 있었다.


6시 정각이 되니 책상에 앉은 그 깍두기 머리 아저씨는 차례대로 호명했고 호명된 아저씨들은 삼삼오오 승합차에 탑승해 어디론가 가버렸다. 거의 마지막에 나와 친구이름이 불렸고 소파 못잖게 낡은 그레이스 승합차에 올라 어느새 밝아진 여름 아침을 맞으며 알 수 없는 행선지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우리 집에서 불과 1km 정도 떨어진 계양구청 신축 현장이었다. 헬맷을 눌러쓴 아저씨의 지시대로 나와 친구는 건물 지하로 향했다. 양생이 덜 된 콘크리트 냄새가 진동했고 습한 날임에도 먼지가 자욱했으며 바닥은 철근, 철봉과 여러 폐목재로 어지럽게 뒤덮여 있었다.


이 분야에 관록이 있는 듯한 아저씨는 빠루로 못을 빼 콘크리트 거푸집이 되었던 방수 합판 자재 각목을 분리해 냈고 나친구는 그 잔해와 비계 철봉을 지시하는 대로 옮겼다.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온몸에 땀이 났고 허리가 뻐근했다. 치워도 치워도 크게 현장이 변화되는 것 같지도 않고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10시쯤 되니 반갑게도 수퍼마케트에서 파는 빵과 우유가 간식으로 지급됐다. 허기짐보다 잠시 쉴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먼지 가득한 그곳에서 순식간에 빵을 먹어치웠다.


구청 건설 현장에는 함바집이라고 불리는 식당 가건물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그간 눈길도 주지 않던 반찬들과 국을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오후 작업 중에는 함께 일을 하던 친구가 거푸집 각목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대못이 발바닥에 박히는 사고가 났다. 생각해 보니 안전화와 같은 변변한 안전 장구 없이 평범한 운동화를 신고 목장갑에만 의존한 채 험한 곳에서 일을 하니 이런 크고 작은 사고가 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분명 산재인데 함께 일하던 아저씨는 망치로 친구의 발바닥을 쳐 피를 조금 빼내곤 붕대를 감아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다행히 친구는 업무를 재개했고 17시가 되니 다시 우리를 싣고 온 그레이스를 타고 인력사무소로 돌아왔다.


책상머리의 깍두기 아저씨는 만 원권을 잔뜩 쌓아두었고 호명하는 족족 그 현금을 지급했다. 나와 친구도 알선 수수료 오천 원을 제외한 사만 오천 원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곳곳의 근육통이 도져 힘겨웠지만 그 돈으로 땀과 먼지로 얼룩진 하루가 충분히 보상받은 듯했다. 용우동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친구의 시급이 1,600원 정도였으니 꽤 큰돈을 번 셈이다. 못에 찔린 친구는 이 일을 마치고 밤에 호프집 서빙 알바까지 가야 했다. 난 도저히 연이어 인력사무실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이틀에 한 번 꼴로 참석했다. 일감이 없어 허탕을 치는 날도 있고 동부제강에 가서 압사위기를 피해 가며 현장 정리를 하거나 인천 지하철 1호선 건설현장에서 온열질환을 극복해 가며 철근을 묶는 일에도 참여했다. 이러다 몸이 남아나지 않겠다 싶어 이 십만 원을 살짝 웃도는 돈을 손에 넣었을 때 인력사무소 쪽으론 발길을 끊었다.


어렵게 번 돈은 또 흥청망청 PC방에 당구장에 흘러들어 갔고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 호프집 안주를 축낼 적에는 술값 각출로 소진되었다. 하루가 더럽게 느리게 가는 세상에서 더럽게 먼지와 땀과 사투를 벌여가며 번 돈인데 소비되는 건 찰나였다. 용우동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친구와 같이 비교적 깔끔한 일터에서 알바를 하고 싶었으나 수요대비 공급이 적어 지원하는 곳마다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미용실을 가지 않고 덥수룩하게 기른 히끼꼬모리형 헤어스타일도 개인사업자가 채용을 주저하게 하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장발 폐인의 오른발 약슛


소위 노가다라고 불리는 현장 잡부보단 공부해서 좀 더 그럴싸한 일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2학기 수강신청은 신중히 했다. 호기롭게 선택한 역학과목과 일부 교양과목은 잠깐 조는 순간 전혀 다른 영역을 설명하고 있어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마음에서 멀어진 강의는 한두 번 결석을 하다 보니 수업을 제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고 급기야 해당 과목이 진행되는 강의실마저 희미해졌다. 그래도 대학수학을 진행하는 조교와 컴퓨터개론 수업을 하는 교수님의 수업 진행 방식이 마음에 들어 열심히 했더니 괜찮은 성적 내기도 했다. 매일 진도 나간 것에 대해 복습만 철저히 했어도 성적이 좋았을 텐데 시간 부자이면서 이쪽에 할애하는 시간이 뭐 그리 아꼈나 싶다.


이 전공을 졸업하면 십중팔구 조선소, 해양 등 각종 플랜트, 자동차, 건설 부문의 회사에 소속돼 그런대로 괜찮은 밥벌이를 할 수 있는데 그런 사실을 조금도 모른 채 세상에서 제일 따분하게 대학생활을 했으니 결과가 좋을 수 없다. 다시 20살로 돌아간다면 대학진학을 선택할 것 같지 않다. 바로 국가기관이나 공기업 쪽 시험 준비를 해서 빠른 경제적 자립을 꿈꾸는 편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다. 언제나 후회는 부질없는 짓이지만 1999년의 허송세월이 돌아보면 볼수록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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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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