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쟁이
개천절부터 이어진 기나긴 연휴 동안 사색할 시간이 많을 줄 알았다. 유치원에 가지 않는 여섯 살 놈과 치대며 모래놀이 나무틀 스테인 칠하기, 팬트리 선반 정리와 같은 묵혀둔 집안일을 하느라 오히려 더 바쁜 느낌이다. 그래서 초안만큼은 대학 시절까지 완료할 줄 알았던 어렴풋한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고 이제야 간신히 PC를 켜 고등학교 2학년 시절로 돌아가 본다.
2학년은 8반, 역시 가나다순으로 난 29번이 됐고 담임은 매우 점잖고 유머감각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김관회 수학 선생님께서 맡았다. 여전히 반 아이들 대부분은 성적이 우수했으며 방학 내내 논 주제에 학년이 바뀌면서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바랐던 나는 여전히 반석차 40등대 초반에 머물렀다. 옆자리에 앉은 28번 녀석도 좀처럼 성적이 나오지 않아 고민인 모양이다. 하필 짝으로 만나 서로의 점수에 위안이라도 받은 것처럼 열심히 딴짓을 일삼고 파리 키우기, 올챙이 잡아오기와 같은 대학 진학과 무관한 활동에 열을 올렸다. 서로가 서로를 대포(대학 포기자의 줄임말)라며 놀려대기 일쑤다.
학기 초에 아이스브레이킹 목적으로 누군가가 제안한 마니또가 실시됐다. 남고였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이벤트 일 것이다. 반 아이들끼리도 경쟁자였기에 앞만 보고 공부하기도 바빴던 시간이었지만 돌아보면 이렇게 종종 쉬어가기도 했다. 또 다른 누군가의 제안으로 급우들에게 십시일반 돈을 걷어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 선물을 주기도 했고 학기에 한두 번은 인천대공원이나 호프집(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엄격한 단속행위가 없어 탐색해 보면 교복을 입은 채로 호프집에 갈 수 있었다.)에 모여 친목을 다지곤 했다. 게다가 대서양 물방울조차 구경할 수 없는 나라의 대통령이 NATO 정상회담에 참석하듯 1학년 동창 녀석들의 생일부터 이들의 이성교제 백일 기념 따위의 행사까지 빠짐없이 챙기다 보니 그 어떤 해보다 바쁜 주말이 이어졌다.
교실에서는 성적뿐만 아니라 마니또 이벤트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쟁은 계속됐다. 감정 표현에 서투른 때여서 그랬는지 정체를 숨긴 채 물질적으로만 상대에게 뭔가를 쥐여주기 바빴고 또 그런 것들을 받아 들고 꺄르륵대는 여학생들을 보며 나도 마냥 가만히 있기가 눈치 보였다. 누군가는 꽃다발을, 음악 테잎 등을 선물 받고는 좋아라 하는데 내 마니또만 아무 일도 없다면 그거 참 비참할 것 같다. 큰맘 먹고 없는 용돈을 쥐어짜 학교 앞 문구점에서 묵직한 커터 칼 심 세 set 구입해 정성스레 포장해 주었다. 아마 그 친구는 한동안 칼날 무뎌질 걱정 없이 살았을 것이다.
집에다가는 부족한 성적을 향상해 보겠단 핑계를 대고 학원비를 들고 나와 주안역 앞 한샘학원 수학 단과반에 등록했다. 과목당 3만 원이었고 수학 과목 중에서도 수강생들이 몰리는 ‘수준’ 반에(동방신기처럼 수학의 ‘수’에 각 선생님들의 이름 중 한 글자가 뒤에 붙는 형식. 예) 수준, 수동, 영일) 지원했다. 강의실은 넓었지만 수강하는 학생은 빼곡해 간신히 구석진 곳의 책상 자리를 맡았다. 미분을 듣는데... 젠장 칠판의 글씨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저렴해 뵈는 스피커를 통해 곧잘 들렸으나 누적된 이산화탄소량이 산소량을 앞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공기가 탁해 잠만 쏟아진다. 견디지 못하고 함께 등록한 1학년 동창들과 수업을 제쳤다.
친구들과 분식집에 가서 끼니를 때우거나 때론 오락실을 가기도 했고 대부분은 담배연기로 가득해 가시거리가 2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10분당 천 원 혹은 천이백 원 하던 학원가의 당구비는 토, 일 연 이틀 게임을 하다 보면 어느새 유흥비가 학원비를 앞지르게 된다. 소위 ‘물리기’라는 내기 당구까지 패배하는 날이면 부평역에서 집으로 향하는 마을버스 창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더욱 어둡고 냉혹하게만 느껴졌다.
저렇게 열심히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니 성적은 나아질 리가 없다. 수업을 듣고 있어도 선생님 말씀을 듣는 건지 눈뜨고 망상만 하는 건지 스스로도 헷갈릴 정도로 집중하지 못했다. 다시 산만했던 국민학교 5학년이 돼버린 것만 같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아이들이 저마다의 매력이 있어 어울려 다니는 재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렵게 입학해 놓고 겁도 없이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지나고 나서 들었지만 나처럼 멍청하고 순수하게 놀던 아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무리 지어 놀러 다녀도 다들 자기 할 공부는 해놓고 나오거나 정말 주중에 모든 걸 쏟아부었던 녀석들이 머리를 식히러 잠시 모습을 비췄을 뿐이었다. 시험 때면 의례히 “나 공부 진짜 안 했는데. 큰일이야.” 하던 아이는 많았지만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최선을 다 해 헛짓을 일삼는 내 모습에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친구도 있다.
푸른색 스트라이프 패턴이 들어간 하복을 입고 토요일 클럽활동을 할 때였다. 단순히 친구를 따라 ‘국화반’에 편성되어 딱히 할 일 없이 교정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한 여자아이가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부른다. 그녀가 있는 벤치로 가니 그 아이가 대뜸
“난 네가 좋아.”
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에 놀란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고
“그래? 그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잘해줄게.”
하고 돌아서버렸다.
내 인생에서 극히 드문 일이라 매우 설레면서도 피부에 한가득 꽃 피운 여드름에 두꺼운 안경알 속 왜곡된 눈은 8mm에 수렴해 가는데 뭘 보고 좋다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 됐다. 나 어쩌면 꽤 멋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해봤다. 친한 이들에게는 이 사실을 알렸는데 믿기지 않았는지 딱히 도움 되는 얘길 해 주는 이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 아이와는 그 시절 꿈꿔볼 법한 첫사랑의 아름다운 추억 같은 건 만들어내지는 못한 채 모쏠의 정도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손 편지 한두 번 오가고 5개 들이 한국 야쿠르트 한 묶음을 구입해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책상에 살포시 두고 온 기억이 전부다. ‘네가 좋다’ 얘기를 듣던 날 자판기 유자차라도 뽑아 마시며 토커바웉 해볼 걸 그랬다. 다른 의미의 '좋다' 였거나 짓궂은 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과 제자 간에 캐미라고 표현하긴 좀 그렇지만 점잖았던 담임 선생님과는 묘하게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다. 눈 밖에 날 법한 일을 떠올려보면 담임 선생님의 캐리커처를 그리다가 발각당하거나 성적이 좋지 않아 반 평균을 깎아먹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 외에는 어른들에게 그다지 미움살일이 없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체질을 지녔고 담배연기조차 매우 혐오하던 자였으며 교실 청소를 할 때에도 단 한 번 열외 하지 않은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다. 오히려 제도나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것들을 굳이 어기는 아이들을 눈살 찌푸리며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학급에 딱히 문제아나 불량학생으로 불릴만한 아이가 없어서였는지 학급 아이들을 불량한 정도로 정렬했을 때 내가 그 스펙트럼의 끄트머리쯤에 위치했나 보다.
물론 한 번이었지만 매를 버는 짓을 한 경우도 있다. 반 아이들의 절반 이상은 대학 진학에 있어 마이너스가 되는 요소인 내신을 포기했다. 나 역시 그런 부류에 해당됐고 수능에 출제되지 않는 과목인 제2외국어 불어 시험은 거의 문제를 보지 않고 찍는 지경에 이렀다. 시험 시간이 너무 남아 지루한 마음에 OMR 카드 앞 면에 낙서를 했다. 빨간색은 컴퓨터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어서 빨간 볼펜으로 ① ② ③ ④ ⑤ 사이를 넘나드는 만화를 그려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 선생님께서 조례를 마치자마자 나를 교실 밖으로 부르셨다. 무슨 일일까 하며 미닫이문을 여는 순간 둔탁한 물체가 휙 날아와 내 안면을 강타했다. 금색 안경테는 복도에 나뒹굴었으며 한쪽 렌즈는 이미 깨져있다. 담임 선생님이 물으신다.
“너 왜 맞는 줄 알아?”
“혹시 제가 어제 에어컨을 안 끄고 갔나요?”
하는 순간 선생님은 검고 두툼한 출석부의 모서리로 내 두개골을 쪼갤 듯 내리쳤다. 그렇게 한 십오 초는 족히 맞았나 보다. 쉬지 않고 이어진 체벌에 피부로 전해지는 통증도 무척이나 아팠지만 정상적인 산소 호흡이 불가능하여 더 괴로웠다. 교무실로 따라가서 선생님이 내 눈앞에 들어 보인 그 불어 과목의 OMR 카드를 보고 나서야 아침부터 먼지 나게 맞은 이유를 깨달았다. 부러져 버린 안경과 어느새 각막을 가득 채운 눈물로 인해 세상이 일그러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열심히 새 OMR 카드에 답을 옮겨 적었다. 옮기는 중에도 학생들의 OMR 카드는 교육청의 누군가가 볼 것인데 그따위 짓을 해서야 되겠느냐라는 식의 꾸중이 이어졌지만 귀에 잘 전해지지 않았다. 젊고 1초 고소영 느낌의 예쁘장한 불어 선생님이 “어머~ (시험을) 잘 보지도 못했네~” 하는 이야기를 할 때 비로소 청력이 정상으로 돌아온 듯하다.
억울하게 혼난 일도 있다. 내 생일을 앞두고 한 친구는 내게 지포 라이터를 선물했다. 비흡연자인 내게 웬 라이터? 하며 상자를 여니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가 되지 말자’는 그의 편지가 들어있다. ‘불’ 필요한 존재라는 썰렁 아재 개그 코드가 담뿍 담긴 선물이었지만 그조차 소중하게 여겨졌다. 라이터 선물은 학생 간 매우 드문 물건이어서 반 석차 1등을 놓치지 않는 친구가 잠시 구경하고 싶어 했다. 그 친구가 맨 앞자리에서 지포 라이터에 불을 붙이다가 담임 선생님께 딱 걸렸다. 담임 선생님은 이 물건의 주인을 교무실로 호출하며 조례를 마쳤다. 나와 선물을 한 그 친구 둘이 가서 해명한답시고 했는데 내가 흡연이라도 하며 순진한 1등 친구에게 라이터를 들이민 학생 정도로 오해하셨는지 잘 들으려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억울했다. 이런 일을 겪자 어린 마음에 참 이 선생님이 싫었고 학교도 공부도 다 싫어졌다. 검정고시의 존재를 알았다면 자퇴를 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친구들과 더욱 친밀하게 지내게 된 계기는 점심, 저녁 식사 후 툭하면 치러지는 축구 경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와서야 축구 경기를 뛰어봤는데 이렇게 흥미로운 스포츠를 왜 이제야 알게 됐을까 싶다. 덩달아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치르는 국가대표 축구 경기도 모든 일을 제쳐두고 빠짐없이 시청하게 됐다. 우즈베키스탄과 UAE를 상대로 다득점을 한 최용수 선수가 스포츠 신문 1면을 자주 장식했다.
아시아 예선의 백미는 단연 한일전이었다. 도쿄에서 치러진 1차전은 휴일이었고 외할아버지도 마침 우리 집에 와 계셔서 함께 시청을 했다. 적이지만 실력이 뛰어났던 나카타와 우리나라의 골문을 수차례 위협한 브롸질 출신 귀화 선수 로페스는 유독 얄미웠다. 첫 골을 일본에게 빼앗겼고 절망적으로 후반전을 시청하는데 로페스 선수가 교체됐다. 외할아버지는 “저놈이 잘했어.” 하며 다행스러워했다. 머지않아 서정원 선수가 작은 키로 동점 헤딩골을 넣었고 약간 빗맞은 듯한 이민성 선수의 중거리 슛이 골망을 흔들며 역전에 성공했다.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던 송재익 캐스터의 멘트에 섞인 흥분감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으며 다음날 학교 전체로 이어져 아이들 입에 오르내렸다.
무슨 일로 중단됐는지는 모르지만 1997년부터 학교에서 가을 축제를 재개했다. ‘정파제’라는 재단 이름을 딴 행사는 어두운 밤까지 이어져 잠시나마 학생들이 축적된 학업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 같다. 몰랐는데 다른 학교도 비슷한 시기에 축제를 열었다. 2차 한일전을 함께 우리 집에서 시청한 친구들과 계산여자고등학교의 축제를 잠시 구경 갔지만 경기를 패배해서인지 그리 흥미로웠던 기억은 없다.
축제를 비롯해 여러모로 들떴던 마음은 머지않아 심연으로 가라앉게 됐다. 1교시 국어시간으로 기억하는데 선생님은 아이들의 인사를 받자마자 대뜸 칠판에 ‘國恥’라고 큼지막하게 쓰시곤 알아듣지 못할 나라 욕을 장시간 동안 이어가셨다. 온 나라가 외환위기나 IMF라는 생소한 단어로 뒤덮였다. 절대 망할 것 같지 않았던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세운 대우그룹도 해체됐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도 이때부터 어려워 보였다. 이듬해까지 경영상 위기로 여러 직원들에게 해고를 권고해야만 했던 김 부장은 회사에 사표를 내밀었고(가족 입장에서는 다행히 반려되었다.) ‘워크아웃’이란 말도 심심찮게 들렸으며 아는 기자마다 절박한 말투로 기사를 내지 말아 달라는 청탁 전화를 여러 차례 돌렸던 모습도 뚜렷히 남아있다.
이 시기에 엄마도 큰 병을 앓았다. 요즘 같아서는 암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갑상선암이지만 양성반응이 나왔다. 암은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비운의 캐릭터만 걸리는 것 아니었나? 나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고 엄마를 자칫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느 해보다 울적하고 추웠던 겨울을 맞았다. 서울 삼성의료원에 입원하실 동안 또다시 애꿎은 외할머니 손을 빌려 다 큰 학생 뒷바라지를 맡겼다.
학교에서는 갑자기 슬립온을 금지시키고 삼선 슬리퍼를 공식 실내화로 지정했다. 평소 불평불만이 거의 없던 아이들도 IMF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휘청이는데 멀쩡한 실내화를 왜 쓰레빠로 바꾸느냐 하는 볼멘소리도 이어졌다. 발이 조금 시원해져서 좋은 점도 있었지만 수돗가에서 양치라도 한 번 하고 오면 낙수에 발끝이 젖기 십상이다. 이 찝찝함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쾌했는데 의외로 잘 마르지 않아 그저 한시바삐 집에 돌아가고 싶어진다. 일간지 경제면에서 매일같이 떠들어대던 ‘낙수효과’가 이런 느낌인가 잠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1998학년도 수능 소식에 고3으로 진화할 날이 머지않았음이 피부로 와닿았다. 축축한 양말과 더불어 냉기 어린 삼선 슬리퍼는 준비돼있지 않음에서 오는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