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침묵
새해가 밝았다. 대충 비닐 봉다리에 넣고 묶어 다용도실 세탁기 뒤에 있는 사각 구멍으로 던져 넣음으로써 쉽게 마무리되던 쓰레기 배출은 이젠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쓰레기는 규격화된 봉투를 구입하여 지정된 장소에 배출해야 했고 종이나 유리, 캔은 아파트 단위로 모아서 자원순환시설로 보내졌다. 이름도 생소하고 발음하기도 어려운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됐다.
각 세대별로 뚫린 사각 쓰레기 구멍들의 종착지는 각 동 1층 밑 트렌치로 통했는데, 이곳에서 더는 악취가 진동하거나 쥐들이 들끓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북한이 침공하면 한 번쯤 저곳에 숨어볼까 생각했던 사각 쓰레기 배출구는 관리사무소가 용접까지 하는 수고를 아끼지않으며 봉인시켜 버렸다.
중학 최고 학년인 3학년이 되어 최고층인 4층 끄트머리에 위치한 1반에 배정받았다. 희끗한 머리가 가득하고 항상 단추가 여며지지 않은 밝은 그레이 톤의 정장을 착용하며 이순신 장군님의 장검과 같이 기나긴 막대기를 영혼의 단짝처럼 소지하시는 최웅부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셨다. 학년 주임까지 맡은 선생님은 기술 과목을 담당하셨고 수업 중 ‘W×h=쩐이다’라고 하실 정도로 자주 돈을 쩐으로 지칭하셔서 아이들 사이엔 ‘쩐’으로 불리던 분이다.
얼마 전 아내와 블로그 체험으로 다녀온 게장 맛집 사장님께서 후기를 잘 써달라는 부탁과 함께 “요즘 사람들이 쩐이 없는지 잘 오질 않아~” 하며 하소연하셨는데 근 30년 만에 최웅부 선생님이 불현듯 떠올랐다. 좋든 나쁘든 사람에게 붙는 별명이 참 하찮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항상 남녀공학에 합반이었던 우리 중학교는 올해부터 남녀 분반이 되었고 아래 학년인 2학년부터 여학생을 들이지 않았다. 아울러 학교 측은 내년부터 계산중학교가 아닌 계산남중학교로 개명될 것이라 공언했다. 함께 졸업하는 여자 동창들의 출신학교는 이제 계산남중이 되어 훗날 많은 기업 인사담당자들을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새로 개교한 계산여중은 울타리 하나 사이로 옆 부지에 별도로 존재했다.)
까까머리에 칙칙한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아이들로 가득한 교실은 이제 진짜 교도소 느낌이 물씬 난다. 동공이 흐리멍덩하고 근처만 가도 사악한 아우롸가 느껴지는 일부 학생들은 최상위 포식자의 위치에서 조금 덜 불량한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작고 약한 1번이나 2번 급우에게 쉬는 시간마다 군것질거리를 구입해 오도록 심부름을 시켜댔다. 훗날 전문용어로 빵셔틀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행위다. 포식자들은 FILA 가방이나 라코스떼, 잭니클라우스 등의 브랜드 벨트 따위를 소유자로 부터 어렵지 않게 그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다수의 급우들은 이를 애써 못 본채 하며 행여나 포식자들과 엮일세라 열심히 침묵하며 방관하였다.
작은 키 순으로 5번인 나는 방관자이자 툭하면 수탈의 대상이 되는 먹이군에 속했다. 공부 좀 하는 아이는 건들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은 이제 무너진 지 오래다. 키에 비해 발만 큰 나에게 엄마는 275 mm 사이즈의 멋들어진 하이탑 나이키 신발을 새 학기를 맞아 구입해 주셨다. 포식자 무리 중 한 녀석이 그것에 눈독을 들이더니 표면적으론 부탁의 형식으로 내 신발을 빌려 갔으나 그 후로는 당연하듯 자기 신발인 양 신고 나가 열심히 농구를 해댔다. 그렇게 투명하고 영롱하게 뒤꿈치를 빛내던 AIR와 화려했던 쓰뢰드는 거친 마사토에 의해 갈려나갔다. 집에 가야해서 신발을 돌려달라고 했으나 그 포식자는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농구공으로 슛을 쏘며 자기 신발을 신고 가라고 한다. 농구장 구석에 다 낡아빠진 그의 FILA 캔버스 스니커즈가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불편한 심기는 내내 얼굴로 드러나고 있었고 머지않아 엄마는 무슨 일이 있냐며 내게 물었다. 좋지 않은 일을 집에서 떠올리는 것도 괴롭고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하기 귀찮았다. 반 아이가 새로 산 신발을 빌려 가더라 전하니 동급생 간 약육강식의 구도는 전혀 고려하지 못한 듯 “얼마나 돈이 없으면 신발을 구입할 돈도 없데니?” 하며 금방이라도 지갑을 열고 빌려줄 기세로 안타까워했다.
다음날도 그 녀석의 방과 후 농구 행위는 계속됐다. 인기 고공행진을 벌이던 농구 대잔치와 만화 《슬램덩크》, MBC 드롸마 《마지막 승부》의 영향으로 그는 농구선수가 될 결심이라도 했나 보다. 더는 그의 낡은 신발을 신기 싫었고 그의 땀으로 나의 나이키가 절여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제발 내 신발을 돌려달라고 용기를 내어 부탁했다. 자기 신발로는 집에 못 가냐 하길래 순간적으로 “엄마가 걱정하셔.” 하며 대꾸 했더니 그는 “순 마마보이 새끼네.” 하며 불쾌한 듯 내 신발을 벗어 발끝으로 휙 던져준다. 순간 십이지장에서 부터 훅 올라오는 살의가 꿈틀댔지만 나는 작은 초식 동물일 뿐이다. 돌려준 것만으로 감지덕지하며 찝찝한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내 신발을 신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이후 일부러 엄마에게 시장에서 이름 없는 운동화를 사달라고 하여 나이키 신발은 집에 모셔두고 시장표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나갔다.
어느 날엔 포식자와 추종자 무리가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는다. 화장실에 다녀와보니 책상 옆에 가지런히 걸려있던 가방이 어지럽고 실험실의 해부된 개구리처럼 지퍼가 아무렇게나 열려있다. 그들이 하이에나 무리와 같이 낄낄대며 맛있게 먹던 도시락은 내 도시락이었다. 민족 특성상 남의 밥만큼은 건드리지 않는 법인데... 또 살의를 느끼지만 내겐 그 무리에 저항할 용기와 힘이 없었다.
그 무리와는 별개로 혼자 가출하고 혼자 비행을 일삼는 고독한 포식자도 있다. 얼굴과 입술이 검고 주근깨가 가득하며 눈이 날카롭게 찢어진 그에겐 항상 찌든 라면 스프 냄새와 담뱃내가 뒤섞인 악취가 났다. 머리는 감지 않아 떡이 진 건지 멋을 내느라 젤이나 무스를 바른 것인지 항상 날티싼티 가득한 윤기가 흘렀다.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초록색 LACOSTE 악어 와펜을 그가 네이비색 교복 바지 좌측 손 주머니 부분에 억지로 붙여봤지만 조악하기가 짝이 없다. 포식자로 분류되는 빌런 중에는 최고로 곤궁해 보인다.
무리를 이룬 포식자들이 거쳐간 약자들을 또 건들지 말라는 법은 없나 보다. 상도덕 없이 그 고독한 포식자는 그런 약자들의 물자를 재차 수탈해 갔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수틀리면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흑표범 같던 그 포식자의 사냥 범위에 나라고 예외일 리는 없다. 매일 같이 ‘야! 물!” 하며 마치 물 시중드는 사람에게 명령하듯 내 보온병에 담긴 물을 수시로 마셨다. 때문에 등교해서 가방을 걸자마자 쫓기듯 보온병의 물을 한 번에 다 마셔버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는 그렇게 마실 물이 없어져서 심통이 났는지 내 책상에 자신의 공책을 툭 던지며 오늘 숙제를 대신하라고 한다. 내게 그럴 시간이 없다고 답했다. 다시 공책을 들고 그대로 물러가나 싶던 찰나 그가 내지른 매서운 족도(足刀)는 대비 없이 활짝 열려있던 내 왼쪽 갈비뼈와 강하게 충돌했다. 짧은 시간 동안 숨을 쉴 수 없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통증을 호소하며 측은하게 보여 포식자의 후속 공격이 멈춰지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포식자들에게 매일 같이 당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저 정도는 양반이었다. 진심으로 그들이 덤프트럭에 치여 갈려버리거나 다른 곳으로 전학 가기만을 바랐다. 방과 후에도 주말에도 방학에도 그들 생각에 절로 이가 갈렸으며 야만적인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해 분비된 코르티솔만 18kg이 넘었을 것이다. 호르몬의 비정상적이고 불균형한 분비 때문인지 내겐 딱히 사춘기라고 할만한 시기도 오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급우가 포식자에게 당해도 기분이 우울하고 뒤에서 그들을 헐뜯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나 자신이 한심했다.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쩐 선생님과 1학기 진학 상담을 할 적에 누가 괴롭히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참지 못하고 가감 없이 포식자들의 만행에 내내 괴로웠음을 토로했다. 쩐 선생님께서 소지한 정의의 장검은 언제나 망설임이 없다. 특히 불량함을 뿜어대는 포식자들이 조금이라도 명분을 제공하면 막대는 여지없이 그들의 등줄기를 향해, 팔뚝을 향해 거세게 내리 꽂혔다.
“너가 꼬질렀냐?”
내 신발을 더럽힌 포식자는 급우 간의 폭력을 의리없이 고해바친 파렴치한을 색출해 내고자 1번 아이부터 순차적으로 피식자층을 심문하기 시작한다. 16번인 내 친구 B(현재까지도 친구다...)는 심문 현장 옆에서 재밌다는 듯 웃으며 “에이~ 너네 너. 너가 일렀네~” 하며 빈정댄다. 2번 그리고 5번인 내 차례에서도 밀고자를 찾아내려는 포식자보다 근처에서 히죽대는 방관자가 더 미웠다. B와 반 석차 1~2등을 다투던 Y란 아이는 그 모습에 격분하여 달려 나가 웃고 있던 B의 멱살을 잡으며 말한다.
“네가 저 아이들의 심정을 헤아려보기는 했냐!”
그렇다고 그가 포식자들에게 창 끝을 겨눈 것은 아니었으나 저런 생각을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느껴졌다.
신은 왜 침묵하는가!
합기도장에서 그들을 떠올리며 분노에 찬 발차기를 해보고 기합을 넣어 주먹을 내질러 봤지만 막상 포식자들을 마주했을 땐 등껍질에 머리와 사지를 재빨리 넣고 움츠러든 붉은귀거북처럼 몸이 얼어버렸고 훈련할 때만 해도 민첩했던 나의 손과 발은 무겁고 흐느적대는 문어다리로 돌변했다. 이 무렵부터로 기억한다. 잠꼬대로 고성을 지르며 욕을 하는 버릇이 생겼고 냉소적인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봤다. 훗날 어떤 이로부터 인천이란 도시를 비하하는 뜻이 담긴 이부망천, 마계인천 따위의 말들에 적개심이 드는 것보다 앞서 본능적으로 일부 수긍하는 내 모습에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 나날이 이어졌는데 거의 모든 TV 채널이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뉴스로 가득했다. 현대백화점이나 미도파 백화점, 동아 백화점은 방문해 봤으나 강남에 위치한 초호화 백화점인 ‘삼풍’은 나에게 생소했다. 연보라색 외벽의 백화점은 말도 안 되게 끔찍한 형상을 하고 있었고 어린 내가 봐도 구조 인력은 체계적이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엉망으로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잔해 사이에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들 정도로 비관적이었다. 소방관 외에도 생존자 수색과 시신 수습을 위해 자원했던 구조대가 해산할 때 울음을 멈추지 못하던 아저씨들, 지옥과 같은 현장에서 미소를 띠며 백화점 물건을 절도하던 아줌마 그리고 한줄기 희망을 걸었던 외국인 초능력자가 기억에 남는다. 세상은 절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쩐 선생님은 수업 중 목을 축이는 아이에게 “저런 놈이 삼풍에 깔려 있었더라면 단 하루도 못 살 놈!” 하며 면박을 줬다. 다른 아이에게 방해되지 않게 물을 마셨을 뿐인데 많은 희생자를 낸 인재에 울화가 꽤 지속된 듯하다.
착실히 진급하여 김부장이 된 아빠는 전과 같이 지방으로 가족여행을 갈 시간이 많지 않은 모양이다. 짬이 생겨도 업무상 접하게 된 골프 약속으로 그런 여행은 항상 후순위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R.ef의 《이별공식》을 차 안에서 들으며 홍은동 스위스 그랜드 호텔로 가족 여행을 갔다. 가족여행은 늘 강원도나 경주, 목포와 같은 먼 곳으로 떠났는데 도심에서의 순수한 호캉스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곳에서 고급진 뷔페 음식을 실컷 먹고 에어컨 빵빵한 방에서 뒹굴거리던 중 아빠와 업무적으로 알게 된 지인 한 분이 나에게 용돈으로 쓰라며 10만 원짜리 자기앞수표를 건넸다. 어른들께 받은 용돈 치고는 전무후무한 큰 금액이었는데 기쁨도 잠시 엄마가 맡아두겠다며 가져갔던 엄마앞수표는 30년째 아무런 소식이 없다. 아마도 그 호텔에서 아빠의 회사일과 관련된 세미나가 있어 겸사겸사 온 여행으로 추정된다.
럭셔리한 호캉스의 추억이 아직 생생한데 묵었던 호텔에서 한 유명 가수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어제만 해도 생방송 TV가요를 통해 《말하자면》이라는 신곡에 맞춰 춤을 추던 그를 봤는데 다음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우리 집 철제 현관문 우유 구멍을 통해 배달되던 일간지는 그의 팔에 주사 자국이 있다며 마약 투약을 사인으로 꼽았다. 역시 예술을 하는 이들에겐 마약의 유혹이 쉽게 따르나 보다 하며 그도 내 머릿속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그 모든 순간들은 결코 우연들이 아니었을까?
매일매일이 생존에 위협을 받던 1995년이었지만 본격적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연합고사를 대비할 때가 도래했다. 연합고사는 그간 학교에서 치러진 200점 만점의 모의고사와 출제 형태가 유사했다. 반에서 내신 1등은 주로 아까 등장한 Y란 아이가 차지했고 모의고사 1등은 역시 아까 등장했던 B 녀석이 차지했다. Y는 민족사관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고배를 마시고 지역에서 성적이 좋은 아이들만 지원한다는 비평준화 ‘서인천 고등학교’를 노렸다. B는 모의고사에서 160점을 상회하는 점수를 받곤 했는데 얘도 서인천 고등학교를 목표로 했다. 내 점수는 140점 전후, 잘 나오면 150점대로 반 석차는 4~5등 사이에 머물렀기 때문에 나까지 그 고등학교 합격을 노리기엔 전망이 그리 밝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교실에서 연합고사 기출문제 모음집인 《26년간》을 학습하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아주 공부를 잘했던 국민학교 동창을 마주쳤다. 걔답지 않게 훔친 자전거를 락카로 도색까지 해가며 열심히도 타고 다닌다. 내 걸음 속도에 맞춰 자전거 체인을 수차례 뒤로 되감아가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 역시 서인천 고등학교를 지원할 것이라 했고 나도 같은 곳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니,
“용의 꼬리가 될지 뱀의 머리가 될지 잘 판단해 봐~”
하곤 그의 집 방향으로 핸들을 틀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조금 기분은 나빴지만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부모님 주변에 엄친아가 없진 않았을 텐데 학업 성취 측면에 있어 자주 언급됐던 두 살 많은 사촌 형은 이미 부천지역에서 명문으로 알려진 부천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괜히 무리해서 목표를 잡은 것 아닌가 하며 심란한 밤을 보냈다.
연합고사 당일은 컨디션이 꽤 괜찮았다. 마음은 차분했고 노이즈 캔슬 기능이라도 생긴 것처럼 주변 소음은 차단되었으며 문제지의 지문이 또렷하게 잘 읽힌다. 시험 변별력이 떨어졌는지 난 1점짜리 문제 4개만 오답을 써서 200점 만점에 196점을 득점. 서인천 고등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고3까지 이 패턴대로면 최하 연고대는 따놓은 당상이라 여겼다. 몹시도 성급하고 가벼운 캐릭터다.
불량했던 포식자로부터의 해방과 목표한 학교 진학까지 확정된 환희의 겨울방학 동안은 정말 아주 가끔 무협지나 삼국지, 만화책을 읽는 것을 제외하곤 활자와는 담을 쌓았다. 아빠가 어디선가 샘플로 가져온 듯한 비운의 게임기 ‘3DO 얼라이브(올 초부터 LG전자로 불리게 된 금성사 제품)’도 하루 종일 접했다. 마치 공부가 사라진 세상처럼 마음껏 지냈던 겨울이 이듬해부터 좌절감을 맛보게 해 줄 줄은 몰랐다. 한참 지난 후에 알게 됐는데 이 고등학교에 합격한 동창들 상당수는 과학고의 문을 두드렸던 아이들도 많았고 입학 전에 이미 고교 3년 과정의 수학은 마스터했다고 전한다. 시험 점수 말고는 딱히 기대할 만한 특기도 없으면서 참 안일하게 시간을 보냈다.
연말에 반짝 영광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1995년 하면 나에게 혹은 타인에게 가해진 폭력으로 얼룩진 시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문득문득 그 시절이 재생되곤 한다. 단순히 아이들 간의 다툼이나 일탈로 치부하기엔 상흔이 너무나 오래간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며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인지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애는 왜 낳았을까 싶은 부모들이 자주 목격된다. 우리 아이 이야기는 아니지만 유치원에서 아이들 간 벌어진 주먹다짐에 가해 학생 부모에게 사과로 좋게 마무리 짓자며 중재하던 선생님에게 “제 아이도 맞은 적 있는데 그땐 그쪽 부모도 아무런 사과를 안 했는데요. 너무 불공평한 처우 아닌가요?” 하던 사례도 들었다.
낳고 기르다 보니 어느덧 나의 우주 그 자체가 된 아들이 저런 불미스러운 일을 당했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아이에겐 같이 주먹 쥐고 맞서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참고 맞으라고 해야 할까? 상상만으로 숨이 차오르지만 뚜렷한 방향이 잡히질 않는다.
현관문 손잡이 비틀고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여전히 빌어먹을 세상과의 전쟁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