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역 3년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기나긴 겨울방학을 날 무렵 동생의 요청으로 함께 합기도 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신체 활동이 극히 드물었던 나에게 꽤 과격한 움직임이 요구되는 분야인데 겁도 없이 발을 들였다. 당시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은 자주 봤지만 합기도는 생소했다. 둘 다 우리나라의 무술이고 기본적인 발차기 동작은 유사하지만 합기도는 도복 색부터 검은색이고 유술을 포함한 호신술이 주를 이루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벽을 여섯 번 밟고 나서 놀라운 발차기를 선보이던 권세성 관장님은 평소엔 부드러우면서도 훈련이 시작되면 엄한 스타일로 교육을 하는데, 꾀를 부리면 여지없이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호통을 쳐 신체능력을 120% 발휘하게끔 만드셨다. 운동신경이 꽤 좋은 동생은 곧 잘 따라가는데 그에 비해 둔한 나는 손발이 어지럽기만 하다. 매일 유격훈련 못잖은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한 겨울임에도 두피와 등짝은 땀으로 흠뻑 젖어 도장의 타포린 바닥은 그 흔적으로 얼룩져있다. 저질 체력과 운동신경이 비약적으로 좋아진 계기가 되었는데 이마저 하지 않았다면 지금껏 사람 구실이나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요즘의 태권도나 합기도 학원은 고유의 무술을 배우는 장이 아닌 단순 육아의 외주처에 불과한 것 같아 여섯 살의 아들에게 선뜻 추천하지 못하고 있다.
조금은 정든 작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계산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명은 소속된 동에서 땄는데 단순히 작전동 그리고 계산동에 위치해서 저렇게 네이밍 했다. 동네 이름만 봐선 참 약삭빠르고 영악한 아이들이 많이 거주할 것 같은 곳이다. 3cm 이하의 짧은 헤어를 하고 탁한 회색과 네이비가 키칼라인 체크 패턴 교복을 입으니 우스개 소리가 아닌 리얼 죄수의 모습이다. 음각으로 판 파란 플라스틱 명찰을 패용하고 딱히 죄를 짓진 않았지만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교문을 통과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미혼의 젊은 이미영 선생님은 나의 1학년 6반 담임이었고 키 순서대로 주어진 내 번호는 3번이었다. 중1 때 3번, 중2는 4번, 중3은 5번이었으니 나의 수감번호는 잊기가 더 어렵다.
선생님이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교실은 약육강식이 판치며 희로애락이 뒤섞인 갖가지 울음소리로 뒤덮인 정글로 돌변한다. 수학 선생님인 담임선생님은 초반부터 정색하며 기강을 잡는다. 젊은 여선생님이라고 국민학교처럼 만만히 봤다간 남녀 불문하고 허벅지나 종아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서 데굴데굴 뒹구는 수가 있다. 중학교 과정은 교과목마다 담당 선생님이 있고 각자의 무기(?)가 존재하여 더욱 정신을 차리고 나쁜 모습으로 눈에 띄지 않아야만 무사히 귀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당구 큐의 앞부분을 개조한 60cm 내외의 지시봉 내지는 회초리가 흔했고, 30cm 방안자로 귀와 뺨을 동시 공략하는 기술 선생님, 조선시대 곤장과 같은 널따란 방망이를 소지한 음악 선생님이 계셨지만 가장 무서운 선생님은 맨 손으로 다니는 체육 선생님이다. 속알머리가 약간 휑해서 반 아이들 사이에선 ‘마쵸맨’이라고 불리던 선생님인데 먹잇감으로 지목되면 전광석화와 같이 뺨을 후리고 발길질을 당할 수 있어 산만하고 껄렁껄렁한 아이도 이 시간만큼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교복에 넥타이는 없었지만 목을 조여 오는 느낌에 하염없이 교실에 걸린 시계만 바라보며 집을 그리워했다.
어느 주말에 또 봉천동 막내 고모댁에 첫째 큰어머니 칠순잔치로 친척들이 모였다. 평일 수용소에 갇혀 지내다가 친한 사촌들까지 만나 웃고 떠드니 그간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으로 가득하다. 신생 sbs를 살린 인기 만화 《피구왕 통키》의 영향으로 고모댁 3층 거실에서는 새벽까지 사촌들과 피구를 하다 지쳐 잠들었다.
다음날 일어나니 몸이 평소와 다르다. 특히 왼쪽 얼굴 위에 석고팩이 단단히 굳은 듯 움직임이 둔하다. 물을 마시면 아기같이 줄줄 흘리고 먹을 것은 오른쪽으로만 씹어 삼킬 수 있었다. 두 해 전쯤 아빠도 이런 증상이 생겨 많은 한의원을 방문하고 벌침까지 맞아봤으나 호전되지 않은 채 활동하셔서 나도 그렇게 되는 것인가 싶었다. 칠순잔치를 위한 출장 뷔페 음식을 앞에 두고 “닮을 걸 닮아야지…” 하며 속상해하시던 아빠의 모습이 생생하다. 좋아하는 미트볼을 집어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먹으니 동갑인 사촌이 엄청 웃는다. 하... 인생 망했다 싶었다. 집안 대대로 이어진 피는 전혀 건강하지 않았다.
월요일이 되자 엄마는 학교까지 동행하여 담임선생님께 상황을 설명하며 잘 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체벌이 일상화된 중학 생활에 잠시나마 특혜가 주어진 시기였다. 선생님들은 단체 체벌 시에도 나는 의도적으로 약하게 톡 치고 갈 정도였으니 배려에 감사하면서도 약자의 위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아 근심이 깊어갔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어쩌다 웃음을 보이면 드래곤볼의 베지터처럼 한쪽 입꼬리만 위로 솟으며 씰룩이는 얼굴을 담임 선생님이 신기한 듯 지켜봤다.
하교하자마자 동네 동림부부한의원을 찾아갔다. 얼굴과 두피에 한가득 침을 꽂으니 비디오 대여점 유리에 부착된 《헬레이저》 포스터와 흡사해졌다. 원시 부족이 쏜 블로우파이프 샷을 맞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모공을 가르고 박힌 얇은 침은 통증이 없는 듯싶다가도 피부 속 깊숙한 곳부터 아려온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부위에는 침을 꽂고 나사 돌리듯 돌돌 회전시키기도 하는데 그 통증으로 미루어보아 침 끝이 뼈를 긁고 있음이 분명하다. 곳곳에 쑥 뜸을 지지고 나서야 치료는 마쳤고 한약까지 한가득 주어졌다. 이러한 치료를 이틀이 멀다 하고 한의원을 방문해 한 시간가량 치료받곤 했다. 이 병명은 ‘구안와사’라고 불리는데 피로와 면역력 저하가 의심됐지만 한의사 선생님 말씀으론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며, 어린 나이에 이런 병에 걸리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몸을 혹사시키면 안 된다기에 다니던 합기도를 멈추고 한약 복용을 위해 밀가루, 우유, 육류와 기름진 음식을 피하라고 했다. 머리도 짧겠다 사실상 승려의 삶을 받아들이곤 좋아하던 과자와 후라이드 취킨을 끊는 고행의 길을 걸었다.
매일같이 치토스를 먹고 밥을 걸러 내가 이렇게 된 것만 같아 안타까웠는지 엄마는 이모를 통해 미국산 로열젤리를 몇 병 구입해 오셨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공복에 한 티스푼 복용해야 하는데 꾸덕한 재질에 쌉쌀하면서도 독특한 화학 약품을 삼키는 것 같아 아주 고역이었다. 플라스틱을 녹여 바로 먹으면 이런 맛이 날 것 같다. 이 덕분인지 몇 달 후에는 안면 근육이 90% 정도 회복되어 한약과 침술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 이후로 더욱 웃지 않는 우울한 얼굴이 됐고 아직도 윙크를 하려면 오만상을 찡그려야만 가능하다.
이런 시련에 《나는 멈추지 않는다》인기곡 제목처럼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다시 파란 띠를 허리에 동여매어 합기도에 복귀했고 교과목 예습까지 성실한 자세로 임했다. 반 배치고사를 엉망으로 치렀는지 반석차 15등으로 시작된 내 성적은 조금씩 회복하여 5등 내외가 되었고 2학기 기말고사에는 운 좋게 1등의 영광을 누렸다. 모범수가 되면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선생님들이 좋게 넘어가는 경우도 있어 비공식 특혜를 누리기 위해 더욱 의욕적으로 살았던 때다.
그래도 주말이 낀 시험기간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TV 프로그램의 유혹은 짙고 마냥 놀자니 마음이 불편한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던 때 부모님까지 친구들 혹은 친척들 모임에 동행해야 한다며 힘을 빼놓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또래와 어울려 놀면서도 한 손에는 음악책을 들어 계이름과 가사는 물론 크레센도와 디미누엔도 위치를 외우거나 체육책을 들어 쿠베르탱과 스포츠 심장을 되뇌며 불안감을 잠재워보려 했다.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에 시험이 없는 삶을 상상해 본다.
호르몬의 변화가 일기 시작하는 남학생들은 야성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호전적인 녀석들끼리는 망설임 없이 주먹이 오가기 십상이고 거친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것쯤은 애교스럽고 평준화된 마계 인천의 전형적인 중학교 교실이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야생에서 난 토끼와 같은 초식동물의 처지에 있었으나 포식자의 시야에서는 작고 안경잽이에 공부나 하는 결이 다른 부류로 인식돼 딱히 나에게 적의를 갖고 대하는 녀석들은 거의 없이 무사히 연명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대전으로 소풍을 가는 날이다. ’ 93 엑스포가 열리는 곳으로 향하는데 엄마는 사촌 누나가 그곳에 도우미(노래방 도우미와는 다름...)로 일을 한다며 꼭 만나고 오라며 당부했다. 한빛탑과 꿈돌이로 가득한 축제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지만 국가별로 전시된 장소 몇 곳만 둘러보곤 왜 그랬는지 착용하지도 않을 도금 목걸이를 굳즈샵에서 비싸게 샀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안내데스크에 이름을 말했더니 머지않아 도우미 복장에 진한 화장을 한 사촌 누나가 나타났다. 화려했던 누나의 낯 선 모습 앞에 까까머리 죄수복 차림의 내 모습에 더욱 주눅 들어 몇 마디 나누지 못하고 누나가 사 준 이름 모를 햄버거만 꾸역꾸역 먹고 헤어졌다. 이렇게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박람회는 지극히 사소한 기억들로만 머릿속에 채워졌다.
91년생인 배우자와 대전여행을 할 때다. 자신은 꿈돌이도 모른다며 나에게 뭔가를 들으려는 듯 엑스포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자신 있게 “엑스포 가봤지~” 하며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위와 같이 워낙 자잘하고 파편적인 기억뿐인 관계로 이내 화재를 돌리고 말았다.
어느 날 서해에서 카페리호가 침몰됐다는 뉴스가 한창이다. 그렇게 큰 배가 침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희생자도 많아 소식을 접할 때마다 괴로웠으며 배에 탑승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로 여겨졌다. 공교롭게도 사고가 있던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박을 이용한 가족여행이 두 건이나 있었다.
작은 어선을 타고 서해의 우도에 들어가 민박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갑자기 배가 멈추며 일렁이는 파도 따라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독 선미에 탑승해 있던 엄마가 매우 불안해했다. 짜증이 극에 달한 말투로 지나가는 다른 어선에 노출돼야 한다며 내가 입고 있던 빨간 티셔츠를 벗어 흔들라고 재촉했다. 팔이 아파 잠시 티셔츠를 내려놓았더니 다시 흔들라며 등을 수차례 내려친다. 다시 배는 시동이 걸렸고 육지에 무사히 도착했는데, 알고 보니 선박 엔진의 오버히트(overheat) 때문에 잠시 냉각을 거친 것이었다. 어쩐지 선수에 계시던 아빠나 다른 남자 어른들은 매우 평온해 보였다. 여자들 사이에서 웃통을 벗고 티셔츠를 흔들어댄 나 자신이 몹시 수치스러워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사라지고 싶었고, 이후 2002년 월드컵 시기에도 빨간 티셔츠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은 육로로 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카페리호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석모도에도 가족끼리 놀러 간 적이 있다. 얼마 전 충격적인 뉴스에 잔뜩 겁을 먹고 구명용 튜브에 바짝 붙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던 동생의 모습이 인상 깊다. 섬에 내려 보문사에 들렀는데 사찰 위에 있던 석상을 보러 수많은 계단을 올랐던 기억이 있다. 2016년에 다시 그곳을 방문했더니 석상에 오르는 길을 손본 것인지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인지 그때와 같이 허벅지 터질 각오로 올랐던 많은 계단은 사라진듯하다.
1993년은 머리맡에 알람시계를 두기 시작한 해다. 새벽 네 시 때론 세 시에 맞춰 기상 후 윤선생 영어교실이나 학교 공부를 했는데 돌아보니 한참 성장호르몬이 분비됐을 시간에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다. 아들에게는 수면시간을 줄여 뭔가를 하는 일은 없도록 할 것이다. 어떤 목표를 위해 꼭 무리를 하려거든 눈 떴을 때 할 것을 아이에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