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품은 꽃
우리 가족의 든든한 발이 되어줬던 대우 르망 자동차가 5년 차에 접어들었다. 내가 직접 운전하는 차량도 아닌데 버건디 레드 칼라가 왜 이렇게 지겨운지 모르겠다. 계약시점부터 탁송 시점을 손꼽아 기다리던 하얀색 쏘나타 II 1.8 DOHC GLSi가 어느덧 도착했다. 아쉽지만 르망과는 이별을 해야 했고 중고차 시세대비 저렴한 가격으로 큰 외삼촌께 인계됐다.
집에 들인 첫 중형차로 르망과 비교하여 폭과 길이 방향으로 불과 몇 cm 늘어났을 뿐인데 공간감이 확연히 다르다. 제발 모과만은 차 안에 두지 말라는 내 요청이 수용되어 크리넥스 외에는 딱히 올려둔 물건은 없었지만 각종 내장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름알데히드와 톨루엔이 뒤섞여 어지러움을 유발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자동변속기를 비롯하여 전동식 윈도우 승하강 등 업그레이드된 장치들은 안락하고 편리한 승차를 도왔다. 훗날 아빠차보다 더 좋은 차량을 타고 다니는 회사 후배가 눈치가 보였는지 우리 차 트렁크에 있던 GLSi 엠블럼을 떼고 최고 트림을 뜻하는 ‘GOLD’를 구입해 붙여두었다. 자동차 구입도 상급자 눈치를 봐야 했던 이상한 문화는 2000년대까지 지속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라떼이야기 정도로 남아 구전되는 듯하다.
피부만큼은 갓 반죽한 피자 도우 같이 부드럽고 모공하나 보이지 않아 걱정이 없었는데, 토핑이 미끄러진 피자를 보듯 우둘투둘 울긋불긋 이마부터 꽃피우기 시작한 여드름과의 악연이 시작됐다. 처음엔 그저 청소년기 성장의 징후쯤으로 여겨 그리 불쾌하지만은 않았지만 독을 품은 이 저주받은 씨앗이 향후 몇 년간 지속되고 세력을 확장하며 나를 괴롭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삐약대던 하이톤의 목소리는 어느덧 다큐 프로그램에 모자이크 처리된 아저씨들의 변조된 음성처럼 낮아지고 탁해졌다.
‘여드름엔 아젤리아!’ TV 광고를 맹신하여 매일 저녁 세안 후 이 연고를 도포했으나 여드름의 크기가 줄어들기만 하고 근본적으로 개선되지는 않았다. 지금 같았으면 염증을 줄이기 위해 식단을 바꿔보고 아침저녁으로 꼼꼼하게 피지와 땀을 씻어내며 피부 장벽 구축에 힘을 썼을 텐데... 참 무지했고 무심했다. 나의 주식은 치토스에서 다른 과자로 갈아탔을 뿐 여전히 가공식품의 비중이 높아 더욱 피부에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의심된다. 그나마 작년 말부터 식욕 증가로 밥상머리 위의 밥그릇 만큼은 깨끗하게 비우는 습관이 배어 연말에는 엄마와 키가 비슷해졌다.
중학교 2학년 7반 김연숙 선생님과 담임과 제자로 첫 만남을 가졌다. 키가 크고 인상도 강렬해 담당 과목인 사회 시간엔 아이들이 사뭇 바른 태도로 수업에 임했다. 일부 급우들이 담임 선생님의 별명을 큰 바위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렇게 칭했다. 선생님도 그 사실을 아셨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어가셨다. 미혼의 여선생님에게 큰 바위라니 짓궂다 생각이 들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반 석차 1,2 등을 고정적으로 하는 친구들의 성적은 넘사벽이었다. 난 3~4등 사이를 오갔는데 담임 선생님께서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결과가 나오는 날엔 나를 교탁으로 불러 정강이를 걷어찼다. “쬐금만 더 하지!” 라거나 “저 영감님(1등 하는 남자아이)처럼 좀 진득해봐!” 하며 안타까워하셨는데 그렇게 조인트를 까이면서도 애정이 느껴져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젠 2인자도 못되고 넘버3가 되었을 뿐이다.
중학시절 처음이자 마지막 수학여행에 참석했다. 구 서울역사(現 문화역 서울 284) 입구 쪽 시계 앞에서 집결해야 하는데 반 아이들 전원 낙오자 없이 통일호에 올라 경주로 향했다. 그저 TV를 보고 싶은 마음에 안방 장롱 안에 박스도 뜯지 않은 채로 보관된 휴대용 TV를 몰래 가지고 왔는데 2박 3일 내내 애물단지가 됐다. 휴대용이라고는 하지만 부피가 벽돌 두 개 붙인 것보다 크고 D형 건전지 10개는 족히 들어있어 꽤 무거웠다. 안테나를 길게 뽑아 이리저리 움직여 봤지만 방송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값이 나가는 물건이어서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했다간 집에서 최소 10년간은 후레자식 처우를 받을 것만 같았기에 불국사에도 석굴암에도 그것을 타조알 품듯 열심히 품고 다녔다. 때문에 당시에 촬영된 내 모습은 전전긍긍한 표정에 좀도둑질을 막 마친 아이처럼 외투 속이 불룩하다.
경주역에서 숙소까지 걸어서 이동했는데 밋밋하고 창백한 벽을 가진 ‘ㄷ’ 자 형 저층 건물이 우리가 묵을 곳이라고 한다. 건물 가까이 가면 1층 외에도 지하 1층은 물론 지하 2층 숙소까지 이어진 계단과 건물이 품고 있는 넓은 마당을 볼 수 있다. 숙박이라기 보단 수용에 가까운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칙칙한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밤송이머리 남학생들이 모여드니 더 그럴싸하다.
경주 안에서 버스 이동할 때에는 유행에 민감한 아이들이 리어카에서 구입해 온 인기가요 모음집이 무한재생 되었다. 특히 김현철의 《달의 몰락》과 김건모의 《핑계》가 기억에 남는데, 특히 《핑계》 이후 대한민국의 가요계는 한동안 자메이칸 뤠게풍의 음악들이 인기를 끌고 인기만큼 뜨겁게 달궈진 거리 곳곳에 울려 퍼졌다.
최근에도 1994년의 여름 더위가 역대급이었다며 회자되곤 하는데 막상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집 안의 냉방기기라곤 선풍기가 전부였고 한여름 땡볕에도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그해나 그 전이나 더운 건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참지 못하고 에어컨을 들이셨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와 기술제휴한 나쇼날(National) 제품인데 땀을 뻘뻘 흘린 채로 집에 들어오자마자 18℃로 세팅한 에어컨 송풍구에 얼굴을 들이밀곤 했다. 이 맛을 보니 선풍기 체제로 회귀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쾌적한 냉기를 즐기고 있는데 북한의 김일성 사망 소식이 들려온다. ‘무시무시한 빌런이 죽었으니 북한은 무너지는 건가?’ 했는데 오히려 엄마는 겁에 질린 듯 라면을 박스채 구입해 발코니에 뒀다. 문민정부의 수장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생업에 전념해 달라며 국민들을 안심시킨다. 덕분에 라면 박스는 금세 뜯기고 여름 내내 나와 동생의 간식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방학 중 하루 이틀은 간석동 외가댁에서 보내기도 했다. 우리 형제와 동생과 동갑인 외사촌 이렇게 셋이 노잼 천국인 간석동 외할먼네에서 모일 때면 매번 오락실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지겨워져 대중목욕탕에 가서 한참을 수영하며 놀곤 했다. 이번에도 셋이 무더위를 뚫고 자주 가던 목욕탕에 갔는데 영업을 하지 않았다. 또 한참을 걸어 다른 목욕탕으로 가 봤는데 그곳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인근 목욕탕을 다 수색하다가 옆 동네인 구월동까지 범위를 넒혔지만 문을 연 곳이 없다.
나는 어떻게든 냉탕에 몸을 담그자며 고집을 피웠는데, 땀에 흠뻑 젖은 동생들의 불만은 쌓여만 가고 곧 그 불똥이 내게 튈 것만 같다.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더 가보자는 심산으로 간판에 ‘♨’ 표시가 눈에 띄자마자 내가 앞서 달려갔다. 이상하게 조용했지만 유리문은 열려있었고 사장님이 보여서 반갑게 “목욕하러 왔는데요!” 하니, 그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힘없이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그냥 하던 일을 하러 가셨다. 알고 보니 그날은 동네 목욕탕 전체가 쉬는 날로 지정되어 있었고 마지막으로 내가 찾았던 곳은 목욕탕이 아닌 여인숙이었다. 형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개학을 하고 혼자 귀가하던 어느 날이었다. 백팩에 도시락, 실내화 가방 그리고 가정시간에 손수 제작한 체육복 가방까지 X자로 주렁주렁 매고 만화책을 보며 길을 걷는데 책 위로 흐릿하게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얼굴을 들고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주먹이 내 명치 아랫부분으로 훅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는 주저앉고 드래곤볼Z 만화책과 하얀 체육복 가방은 검은 아스팔트에 나뒹굴었다. 그는 떨어져 있는 만화책을 주워 잠시 보더니 다시 내던지고는 가진 돈을 모두 내놓으라고 한다. 백팩 겉 주머니에 많지 않은 돈이 있었는데 그걸 싹 긁어 가며 오른 손목에 있던 시계도 요구했다. 시계는 한 언론사의 로고가 새겨진 개체로 아빠가 주신 것인데 금액을 떠나 울분이 치밀었다. 빌어먹을 동네는 나한테 돈 맡겨놓은 놈들만 사는지 잊힐만하면 이렇게 나타나서 털어간다. 그날 우리 집에는 외할아버지가 와 계셨는데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서 나와 함께 동네 한 바퀴를 돌았으나 그런 류의 불량 청년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렇게 세상은 동화책이나 교과서처럼 밝고 아름다운 곳이 절대 아니다. 집 현관문 손잡이를 비틀고 한 발짝 내딛을 때부터 전쟁은 시작된다.
분노와 공포감이 수시로 교차하던 그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존파 사건으로 세간이 시끄러워졌다. 멀쩡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배신한 조직원의 사체를 훼손한 것도 모자라 식인까지 한 충격적인 집단이었다. 그들은 쏘나타까지는 봐주고 그렌져부터 범죄의 타겟으로 했다는 보도에 쏘나타 II를 보유하고 있던 우리 집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음에 내가 동네에서 만났던 강도들은 우주의 먼지처럼 작게 느껴졌다.
잔인한 집단 범죄 소식에 심난한데 연쇄 살인범 온보현의 체포 소식도 전해졌다. 이 무슨 유행이라도 되는 것인가? 택시 기사로 위장한 그의 엽기적인 소식에 택시조차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없는 각박한 세상이 된 것만 같다. 철없는 일부 반 아이들은 서로를 지존파, 온보현으로 놀려댄다. 온보현으로 놀림받던 아이는 택시의 수동 기어 레버를 작동하는 모션을 취한 후 쫓고 쫓기며 낄낄대곤 했다.
엄마는 아침잠이 많아 지각을 일삼는 동생을 위해 오전 7시부터 시작되는 《이숙영의 FM 대행진 》 뢔디오 방송을 크게 틀어 놓았다. 방송을 듣는데 긴급 속보라며 한 여성 리포터가 “...성수대교가 무너졌어요 흐흐흐...”하며 소식을 전했다. 진행하는 이숙영 아주머니는 그게 웃을 일은 아니라며 자초지종을 되물었다. 저녁 TV 뉴스로 다시 그 소식을 접했는데 상황은 아침에 들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출근을 하던 사람들, 등교를 하던 학생들까지 희생된 참사이자 인재였다.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무섭고 택시도 믿고 탑승하지 못하는 데다가 다리를 건너기 전 두드려봐야만 하는 불신 풍조가 만연해진 세상보다 사고 소식을 전하며 웃음을 터뜨린 그 리포터가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자라며 세상도 변질되는 것인지 원래 세상이 이랬는지 모르지만 온전한 정신으로는 살아가기 힘들어 보인다. 이런 현실을 도피하고자 TV 드라마에 한껏 심취했다. 특히 달동네의 한 전봇대에서 도심의 불빛들을 보며 “Boys! Be ambitious!”를 힘껏 외치는 홍식의 모습에 푹 빠져 《서울의 달》을 거의 빠짐없이 시청했다. 자태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행복해지는 《마지막 승부》의 다슬이, 같은 배우가 치명적인 악역으로 등장하는 《M》은 물론 샤방샤방한 영상이 주를 이룬 《사·랑·을·그·대·품·안·에》까지 잠에 드는 시간을 늦추게 했던 주역들이다.
TMI지만 《사·랑·을·그·대·품·안·에》 OST에 쓰인 허밍음 음원은 온라인은 물론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유사 음원만 있다.) 중고사이트에서 CD 음반을 간신히 구해 결혼식 전날 수령하여 우리 부부의 결혼식 행진곡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2018년의 일이다.
복잡했던 학교 밖의 세상과는 달리 학교 생활은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즐거웠으며 적당히 친구들과 어울리며 비교적 무난하게 보냈다. 단 하나 거슬렸던 인간관계를 짚어본다. 키 순서로 4번이었던 나는 9번 친구와 등하굣길 루트도 겹쳐 꽤 가깝게 지냈는데 이 친구는 사소하게라도 한 번 섭섭한 일이 생기면 며칠씩 입을 열지 않았다. 교우 간에 이런 불편한 공기를 참지 못하는 나는 몇 번이고 먼저 손을 내밀어 봤지만 그는 내가 위치한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가 참 약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다른 친구들과는 하하 호호 떠들다가도 내가 다가가면 변검이라도 하듯 정색하며 말을 멈춘다. 그렇게 최소 일주일은 지나야 분이 풀리는지 약간의 여지를 두기 시작했는데 이런 일이 수차례 되풀이되니 숨이 막혀 제명에 못 살 것만 같았다. 이 친구를 학교뿐만 아니라 방과 후 종합학원에서도 내내 같은 클래스에 앉아 계속해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여건에 놓인 관계로 쉴 틈 없이 타들어 가는 건 내 쪽이었다.
3학년으로 올라가며 그 9번 친구와는 반이 나뉘었기에 이런 불상사는 그치게 되었다. 이런 마음고생과 더불어 치아 교정으로 위아랫니에 레일이 설치된 입이 불만 가득한 듯 더욱 돌출되었고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듯 콧등 끄트머리에 걸쳐 쓴 안경까지 나를 더욱 nerdy 학생으로 보이게 했다. 요즘 말로 완벽한 ‘찐따’였다.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을 실감하게끔 학창 시절을 통틀어 가장 암울한 시기인 1995년이 우울한 얼굴을 한 학생을 기다리고 있는 걸 까맣게 모른 채 1994년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