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발질
일찌감치 원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하곤 사람이 이렇게까지 게으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기나긴 겨울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속절없이 흘려보냈다. 중간중간 반 편성을 위한 배치 고사 응시를 위해, 신체 사이즈 측정을 위해 학교 앞 교복점을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두문불출하다시피 했다. 일부 학생들은 그간 독점적 지위에 있던 학교 앞 맞춤 교복보다는 기성복을 찍어내는 ‘스마트 학생복’을 백화점에서 구입하기도 했는데 교복의 색상이 한 톤 더 밝아 굳이 교복 안쪽 태그를 보지 않아도 교복 구입처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위아래로 다크 그레이 셋업 교복은 중학 시절과 같은 버버리 유사제품에나 존재할법한 패턴이 없어 보다 더 의젓하고 고급 진 느낌이 있다. 쟈켙 속에 입는 흰색 셔츠는 질이 별로라며 엄마가 갖다 버린 후 백화점 남성복 코너에서 와이셔츠를 두 벌 구입하곤 매번 빳빳하게 다림질해 주셨다. 잘 보이는 곳에 버건디색 타이와 교복을 포개어 걸어두고 고등학교를 다니는 나의 모습을 그려보며 3월이 오길 기다렸다.
사립 서인천 고등학교는 당시 매우 외졌던 서구 검암동에 위치한 관계로 인천시로 막 편입된 검단 지역을 제외하곤 인천의 각 동마다 주요 거점을 통과하는 여러 대의 유료 셔틀버스를 운영했다.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까지 그 거점에 도착하지 못하면 비싼 택시를 타거나 배차시간이 한 시간쯤 되는 검단행 만원 시내버스 1번을 비집고 탑승해야만 했다.
방학 내내 늘어졌던 신체 기관들이 매우 이른 시간부터 강제 활성화된 관계로 여러 불편을 겪었다. 특히 다섯 시에 일어나 꾸역꾸역 쑤셔 넣었던 아침식사부터 소화기관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수업 시간은 물론 야간 자율학습 시간까지 내내 속이 거북하고 잠시 책상에 엎드려 눈이라도 붙이려면 독일제 발포비타민처럼 기포가 지속적으로 발생해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검은색 NIX 메신저 백에 점심과 저녁 식사 용도로 박격포 미사일 만한 스테인리스 보온 도시락통을 두 개나 눌러 담으니 구독 중인 학습지 디딤돌 봄봄만 넣어도 부담스럽게 뚱뚱해진다. 주 6일 이런 패턴으로 생활하니 감기만 걸려도 좀처럼 낫질 않는다. 학기 초 시작된 그칠 줄 모르는 기침과 수시로 훌쩍거리는 콧물과의 지난한 동거는 약 2개월여간 지속됐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김진우 선생님이 1학년 3반의 담임이었고 가나다순으로 부여된 나의 번호는 36번이었다. 연합고사 시험 성적순으로 선별된 아이들로 구성된 이곳은 무질서하고 약육강식이 판치는 중학 생태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적의를 갖고 다가오는 친구들은 없었고 같은 농담을 하더라도 위트가 있었다. 선생님들도 매 타작이 일상화됐던 지난날과는 다르게 무기를 소지한 분은 눈에 띄지 않아 교실은 한결 따뜻하게 느껴졌다. 일제강점기 무력 통치를 받다가 문화 통치로 바뀐 시점의 학생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3cm 이하의 짧은 두발 규정도 이 학교엔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진 헤어스타일은 인천지역에서 우리 학교가 유일했다. 주린 배 움켜쥐고 공부해서 입학한 보람이 있었다.
학기 초 자율 학습으로 불리는 야간 타율 학습 시간엔 서로가 숨죽여 교실을 정숙한 독서실 분위기로 만들어 갔다. 내 옆에 앉은 아이는 갑자기 검은 썬글래스 착용후 이어폰을 끼우곤 명상 모드에 돌입한다. 썬글래스 상단엔 빨간색 불빛이 네온사인처럼 방정맞게 움직여댔다. 명문대 합격생들의 인터뷰로 가득 인쇄된 광고용 책받침으로만 접했던 엠씨스퀘어의 실물을 이렇게 보게 된다. 잠깐 빌려 착용을 해봤는데 이어폰을 통해 전해진 단조로운 패턴의 신호음은 집중력 보단 깊은 수면에 도움이 되는 듯하여 나와는 상성이 맞지 않는 물건이라 여겼다.
난 귀에 뭘 꽂은 채 공부를 해 본 경험이 없는데 이곳의 거의 모든 친구들은 약속이나 한 듯 그런 모습으로 자습을 이어갔다. 대놓고 자랑하거나 차별했던 것은 아니지만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도 알게 모르게 급이 나뉘었다. 1 티어는 SONY의 Walkman 또는 AIWA 제품이고 그 외는 삼성의 mymy가 보급형 모델쯤의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드물게 대우전자의 YoYo나 LG의 Aha를 보유한 아이도 있었다. 개중엔 건전지를 아껴보겠다고 테이프에 볼펜을 꽂아 손을 흔들어 발생한 원심력을 이용해 되감기 하는 아이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기도 했다. 나는 전자회사에 다니는 아빠 덕에 Panasonic 제품이 몇 개 있었고 귀한 포터블 CD 플레이어도 보유해 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유복한 환경에 놓였지만 재생할 CD음반이 없는 데다 그리 음악을 즐겨 듣는 타입이 아니어서 학교엔 거의 들고나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200점에서 400점 만점으로 변화된 수능에 맞게 총 네 영역의 모의고사를 실시했다. 첫 시험인 만큼 열심히 문제를 읽었으나 언어 영역 지문부터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난이도는 왜 이리도 높은지 주어진 시간 내 OMR 카드에 마킹하기도 벅찼다. 결과는 280점대 후반. 충격이었다. 연합고사 고득점으로 최소 연고대는 가겠구나 했는데...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는 창피한 수치이다. 350점 대 이상이면 반에서 상위권, 300점을 넘기면 약 20등 안쪽, 나처럼 200 따리는 하위권을 장식했다. 내 점수를 어떻게 알고 뒤에 뒷자리에 앉은 또 다른 200점대 친구가 누가 들을까 경계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넌 그 점수받고도 걱정이 안 돼?”
처음 마주한 저조한 결과에 거대한 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봐야 할지 막막했다. 수능형 모의고사는 학년과 시험 범위를 넘나드는 데다가 괴랄한 난이도로 단기간 공부해서 좋은 성과로 이어지기가 어려웠다. 이례적으로 상위권 동급생들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그래도 ‘언젠간 잘 풀리겠지’ 하는 이럴 때만 쓸데없이 낙관적이고 안일한 태도로 일관했던 것 같다.
내신 성적도 입시에 일정 비율 포함시키는 대학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모의고사 보다 더 신중한 태도로 대비했어야 하나 사실상 학업을 반쯤 내려놨던 나는 오히려 중학 시절보다 학업에 시간을 덜 들였다. 내신은 버리고 수능 한 방을 노리겠다는 무모한 생각으로 학교 시험을 외면했다. 때문에 매월 두 차례 세대별 우편함으로 송부되는 디딤돌 봄봄 학습지는 비닐만 뜯긴 채로 빳빳하게 책장에 꽂혀 쌓이기 시작했다.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모인 곳이어서 내신 성적에 불리할 것이 예상된다는 우려는 진작부터 들었으나 이게 진짜 내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학교에서 치른 첫 수학 시험은 만점을 받았다. 반에 이런 아이가 많았다. 수학 시험 평균이 지나치게 높다 보니 다른 학교로부터 민원이라도 있었는지 수학 과목만 더욱 어렵게 출제하여 재시험을 실시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언어 영역이 특히 취약했는데 이는 전무하다시피 한 독서량과 그에 따른 형편없는 문해력, 태생적으로 결여된 상황 파악 능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국어 시간에는 심지어 염상섭의 《삼대》나 최인훈의 《광장》을 읽어오는 것을 숙제로 받았다. 좀처럼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데 관련 내용에 대해 수업시간에 질문이라도 들어오면 멋쩍어하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수밖에 없었다. 국어와 문학류의 과목이 너무 싫어졌다.
15시간 넘게 학교에 있는 동안 속은 정체불명의 기체들로 메스껍고 기침은 끊이지 않으며 만성 축농증으로 접어든듯한 코맹맹이 목소리 그리고 하위권의 성적까지 나로 하여금 정신적 탈주를 부추기는데 일조했다. 다시 첫 페이지부터 차근차근 기초를 다졌어야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다 지난 시점에서 내려본 부질없는 진단일 뿐이다. 출근하는 아빠 보라고 자신 있게 차 키 옆에 두던 내 성적표는 어느덧 숨기기에 급급했고 이런 근심과 압박감으로 가득한 상황을 회피하고자 내내 콘솔 게임기나 개미 오락실에 많이 의존을 했다.
타인에게 살갑게 말을 붙이는 타입도 아니었고 속을 터놓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를 형성해 낸 것도 아니었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자 급우들과 두루두루 편히 대화할 수 있었다. 다방면에 박식한 친구들도 많았고 계산중처럼 주먹을 들이밀며 시비를 털거나 금품을 훔쳐 가는 식의 불미스러운 일도 없었다. 알면 알수록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량했고 조금 엇나가봤자 타율학습 시간에 몰래 이탈해 음주를 하고 오는 정도였다. “계양산 바라보며 검바위가 말한다~♪”로 시작하는 교가의 실제 그 검바위는 아니지만 외부 수돗가 옆 큰 바위를 학생들은 검바위로 통칭하곤 했는데, 그곳에서 흡연을 하다가 인기척에 놀라 급히 불을 끄는 아이들도 간혹 보였을 뿐이다.
아이들과 제법 가까워졌을 무렵 학교에서는 거의 모든 수업을 중단하고 1학년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집합시켰다. 김건모의 《스피드》와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 곡에 맞춰 율동을 해야 했고 두꺼운 4절지를 손에 쥔 채 신호에 맞춰 올렸다 내리는 것을 반복하는 카드섹션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땡볕 아래에서 믿을 거라곤 학업 성적밖에 없는 아이들을 교실 밖으로 내몰아 북한군처럼 이런 훈련을 시키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는 선생님은 없었다. 지금도 유튭 뮤직을 재생하다가 저 두 곡이 나타나면 다음 곡으로 넘겨버리곤 한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할지 전혀 아는 바 없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연습할 적에 체육복이 아닌 청바지에 흰 티를 착용하라고 한다. 작년 말부터 서태지가 착용하여 부쩍 인기가 높아진 의류 브랜드인 STORM=292513과 함께 자매 브랜드인 NIX의 청바지도 급부상했는데, 자존심이 센 친구들은 유행에 뒤질세라 부모님을 졸라 10만 원을 훌쩍 넘는 모델을 급조한 티가 역력하다.
혹독한 훈련의 결과를 선보일 D-day 장소는 도원역 앞 숭의운동장(지금은 철거)이다. 반복된 훈련에 지칠 대로 지친 아이들은 이 시기에 한층 더 예민해 보였다. 함께 운동장으로 향하던 한 친구는 바로 발밑에 동래 파전 못잖게 두텁고 큰 토사물이 흥건하게 있었는데 멍하니 하늘만 보고 걷느라 그걸 밟곤 미끄러질 듯 뒤로 넘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의 뒤를 지나던 여학생 몇이 그 모습을 보고 킥킥댄다. 그 친구는 왜 자신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냐며 내게 괜한 역정을 낸다. 인천에 존재하는 인문계 고등학생은 이 운동장에 다 모인 듯하다. 원형 관중석을 둘러 학교별로 앉아 응원전을 펼쳤다. 이 짓을 벌이는 당일에도 딱히 응원을 할 대상이 있거나 하다못해 운동장 안에서 구기 종목이 펼쳐졌던 것도 아닌데 참 열심히들 한다. 응원전이 끝나자 1등을 차지한 학교는 부상으로 그랜드 피아노를 받았다. 아이들 피부를 까맣게 그을려가며 훈련시킨 명문 서인천 고등학교가 노렸던 것이 고작 그런 물건이었을까? 아니면 ‘이런 것도’ 잘한다고 인정받고 싶은 교장이나 이사장의 욕심이었을까?
방학 같지 않은 방학이 시작됐다. 야간타율학습만 없을 뿐, 보충수업이란 타이틀로 학교 수업은 여느 때와 같이 진행됐으며 학교를 가지 않는 순수한 의미의 방학은 며칠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중간에 학생들을 소집하곤 버스를 대절하여 수안보 사조마을(현재는 ‘이글벨리’라는 이름으로 방치된 상태다.)로 향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수학여행 정도로 알고 들떠서 갔지만 하차하자마자 챙 모자를 눌러쓴 아저씨들로부터 고압적인 명령을 들으며 소지품 검사를 당했다. 그래봐야 그리 나이차가 많이 나지 않는 대학생이었겠지만 그들은 반마다 색출해 낸 소주와 담배들을 압수했다. 8월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학생들은 수시로 열을 맞추느라 부단히 움직여야 했고 번번이 교관으로 불리는 그 아저씨들에게 고성으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돌아보니 이곳에서 벌어진 일련의 과정은 육군 훈련소의 간소화 내지는 순한 맛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일 차 제식 훈련, 2일 차 유격 훈련, 3일 차 간단한 레크리에이션으로 비밀리에 계획된 일정이 소화되는 동안 그 무엇도 소화시킬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불편을 느낀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수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교관들은 가만히 서 있어도 죽을 맛인데 학생들에게 뜬금없이 유지하기 어려운 자세를 시켜댄다. 동시에 그만하고 싶은 학생은 뒤로 열외 해도 좋다고 한다. 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뒤로 열외를 했다. 열외 집단을 쓱 둘러보니 그때 그 토사물을 밟은 친구도 이미 앉아있다.
교관이라는 자들은 뒤로 나가랄 땐 언제고 열외 한 학생들에게 “너흰 패배자야.”라며 모진 악담을 퍼붓는다. 모욕감을 못 이긴 아이는 다시 서 있던 자리로 복귀해 유사 유격 훈련을 이어갔고 우는 것인지 땀을 닦는 것인지 위태로워 보이는 학생 곁에 서서 그만하고 열외 하라는 교관들의 종용에도 끝까지 버텨내는 아이들도 있다. 참 독한 아이들이다. 저래서 공부를 잘하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련해 보이기도 했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밤이 되자 교관들은 낮과 사뭇 다른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을 입에 담아 한바탕 신파극을 연출한다. 남녀 할 것 없이 일부 아이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대며 엉엉 울었다. 이런 극기훈련이 요즘 고등학생 대상으로도 실시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후 진정한 의미의 방학 기간에도 마냥 쉴 수만은 없었다. 공공기관 등의 직인이 찍힌 봉사활동 증명을 제출해야 해서 토사물을 밟은 그 친구와 한 병원의 원무과를 찾아갔다. 체감상 일주일쯤 그곳에 붙잡혀서 다크서클이 유독 심한 원무과 아저씨에게 인부처럼 이것저것 물건 나르는 일 따위로 부림을 당하고 나서야 확인증을 거머쥘 수 있었다.
부쩍 바빠진 고교 생활에 친했던 TV와는 자연스레 거리 두기를 했다. 1년 동안 시청한 드라마는 하반기에 시작한 KBS2 《첫사랑》 뿐이다. 지우 히메를 이곳에서 처음 봤는데 적은 분량이었지만 그녀가 등장할 때면 눈이 참 즐거웠다.
소위 모범생만 모아놨지만 일찌감치 이성에 눈을 뜬 아이들은 공식적으로 혹은 비밀리에 연애를 시작했다. 비교적 친분이 있던 G도 자신과 키가 똑같은 여학생과 남 눈 따윈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팔짱을 끼고 엉덩이를 도에 지나치게 좌우로 씰룩거리며 교내 매점에 다녀오던 장면이 인상 깊다.
나도 이성에 관심이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지난 5학년 때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도 않고 꼴에 그렇게 강하게 끌리는 여학생도 없었던 데다가 한껏 쳐진 안경에 위 아랫니엔 철로가 놓인 너드남 그 자체였기에 G와 같은 이성 교제는 그저 남의 일로만 여겨졌다. 더욱이 국민학생 시절 찰랑거렸던 나의 머릿결은 이 학교에 입학해 다시 길러봤지만 푸석하고 붕 뜨는 반곱슬 재질로 돌변했다. 아침마다 수습하기도 어렵고 어떤 스타일로 해야 좋을지 난감하게 만드는 우울한 외모로 나날이 자신감은 0에 수렴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스텝이 꼬이고 참 풀리는 게 없는 시기였다. 사람은 모름지기 꿈이 있기에 희망을 갖고 내일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법인데 아무런 꿈이 없고 어찌할 바를 모르니 귀한 시간만 허투루 흘려보냈다. 꽃다운 젊음을 이토록 무미건조하게 낭비한 죗값은 훗날 어떤 형태로든 치르게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