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통령, 문민 대통령
국민학교의 최고 학년이 되었다. 교실도 맨 위, 운동장 정글짐의 맨 윗자리도 눈치 보지 않고 오르내릴 수 있다. 그런 영광을 누릴 새 없이 짝사랑의 쓴 맛을 본 나는 공부를 다시 하겠노라 마음먹는다. 아빠보다는 살짝 연배가 있는 6학년 4반 공병숙 선생님과 조우했다. 열심히 사는 학생에겐 사탕을 그렇지 못한 자에겐 채찍을 드는 뚜렷한 분이다.
채벌방법은 단조로웠다. 적발된 학생은 고개를 숙여 책상을 마주 보게(약 2cm 띄워서) 하고 프리스타일 농구하듯 학생의 머리를 그곳에 수차례 부딪히게 하는 방식이다. 체벌을 당하는 자는 적당히 아프면서 수치스럽고, 지켜보는 자에겐 웃음을 그리고 체벌을 가하는 선생님은 극히 짧은 시간 내 통쾌한 정의구현을 할 수 있는 신박한 방법이다.
여전히 맨 앞에 앉은 나는 5학년때와는 달리 수업에 집중해 봤다. 가끔은 예습도 해서 의욕적으로 손을 들고 발표도 해본다. 대중 앞에 서서 발언하는 일을 극도로 꺼리는 내 성격상 참 드문 현상이었다. 작년과 같이 무분별하게 친구 무리에 휩쓸려 다니기보단 집에선 아파트 단지 내 친구들과, 교실에선 일부 뜻 맞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도시락을 먹곤 했다. 조금은 절제된 생활에 성적도 회복돼 간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소파에 누워 TV 보기를 참 즐겼던 때다. 임백천 아저씨가 진행하는 MBC ‘특종 TV 연예’를 보는데 웬 청년 셋이 나와 알아듣지 못할 가사와 함께 현란한 춤을 선보인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이름부터 괴상하단 생각이 들었던 그들은 심사단의 혹평과 함께 다른 팀보다 훨씬 낮은 점수를 받고는 퇴장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그들은 대한민국의 음악은 물론 패션과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 나가는 반전을 보였다. 집집마다 그들의 카세트 테잎이 있었고, 우리 집에도 동생의 요청으로 구입한 정품 1집이 전축 옆에 놓여있었다. 들을수록 선병맛 후중독의 매력에 빠져 가족들과 차에 탈 때면 이 앨범을 질리도록 들었다.
뉴스를 보는데 미국의 로스애인절레스란 도시가 터미네이터라도 다녀간 듯 곳곳에 화염에 휩싸여 난장판이 되었다. 엄마는 미국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한국인이 도둑질을 하던 흑인 소녀를 총으로 쏴서 저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인 아저씨들은 평상복 차림으로 군인처럼 기민하게 움직이고 몸을 움츠리며 누군가를 심하게 경계했다. 미키마우스와 도널드 덕, 베트맨과 슈퍼맨 그리고 나 홀로 집에를 만든 그 나라가 정말 맞는지 당혹스러웠다. 이후 가끔 LA갈비를 먹을때면 이 일을 떠올리며 뼈를 뱉어내곤 했다.
사실상 집돌이가 된 나는 동생과는 다르게 부모님과 함께 드라마를 챙겨봤다. 주말 8시가 되면 모든 일을 멈추고 11번 MBC로 채널 고정된 TV 앞에 누웠다.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네 집을 보고 있노라면 숨통이 막혀왔고 《아들과 딸》의 귀남이는 다소 혐오스러웠다. 이때까지 내 주변에도 남아선호사상이 만연해 있었는데 남녀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변화의 요구를 담아낸 작품들로 읽혔다.
상대적으로 더 지쳤던 월요일과 화요일은 월화드라마로 힐링했다. 최수종, 최진실 배우가 열연하던 《질투》를 보며 남녀 간에 미묘하게 오가는 설렘이란 감정을 알게 됐다. 10시가 되기 전까지 소등하고 거실 TV 앞에 이불을 폈다. 소름 돋는 알미늄 섀시 마찰음을 꾹 참고 커다란 발코니 창을 열고나서 최첨단 선풍기는 ‘자연풍’에 맞춘 후 누웠다. 《질투》주제곡이 나올 때마다 방충망 넘어 넓게 펼쳐진 논으로부터 여러 양서류들의 울음소리까지 전해지는데 그런대로 조화롭다.
이렇게 방이 아닌 거실에서의 취침은 이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기간 동안 지속됐는데 에어컨이 없었어도 참 쾌적하고 기분 좋게 잠들었다. 아무런 번민이 없을 때여서 그런지 그 아파트 하면 이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파트 옆이 논이어서 좋다가도 논이어서 슬플 때도 있었다. 같은 반 김준태라는 친구와 공중목욕탕에서 노는 럭셔리한 취미가 있어 남탕을 향해 논두렁을 지나고 있는데 이 모습을 짧은 머리를 한 중학생 둘이 담벼락 위에 앉아 우릴 응시하고 있었다. 그중 키가 컸던 사람이 우리를 오라며 부른다.
“야! 돈 있냐?”
“없는데?”
하고 내가 반말로 답하자 그들은 바로 때려죽일 기세로 담벼락에서 내려온다. 더 험한 꼴을 보기 전에 친구가 먼저 소지한 현금을 내밀었다. 그들은 꽤 흡족해하며 내 주머니 속도 궁금해한다.
“야! 너는?”
“돈 없어.”
또 반말로 답하자 그들 중 하나가 안색이 바뀌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제야 ‘아... 이들의 발작버튼은 반말이구나.’ 깨달은 나는 잽싸게 가지고 있던 이천 원을 꺼내 바치니 그들은 받아 들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목표했던 습식사우나에서의 추억 쌓기는 물거품이 됐고 울렁울렁 두근두근 쿵쿵대던 판막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급우들은 이 사건을 ‘노상 까였다’라고 표현했다.
강도죄의 상흔이 흐릿해질 무렵 우리 집에도 퍼스널 콤퓨타가 생겼다. 무려 삼보컴퓨터에서 구입한 16비트 AT 사양으로 학원의 그것과는 다르게 하드디스크에 DOS가 설치되어 있어 부팅 버튼만 누르면 작동이 된다. 최첨단 기기를 PC게임 가동에 오랜 시간 할애했지만 ‘보석글’을 활용해 방학 동안 일기를 쓰기도 했다.
방학기간에는 탐구생활이라는 족쇄가 채워지고 일기 숙제가 주어졌다. 탐구생활을 열심히 하거나 일기를 잘 쓴다고 특별 점수가 부여되거나 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와 엄마의 욕심이 더해져 보석글로 작성한 일기를 전량 출력하여 제출하기도 했다. 집에 프린터기가 없어서 워드 파일을 디스켓에 담아 가장 가까운 삼보컴퓨터 영업점까지 찾아가 출력을 의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방학 후 그 결과물은 짧게나마 복도에 전시됐다. 필요한 곳에는 전력을 다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불필요한 힘을 쏟는 버릇은 이 당시부터 시작됐나 보다.
엄마는 날 글로벌 인재로 육성하고자 ‘윤선생 영어교실’을 구독했다. 뽜닉스 단계부터 수많은 교재와 테잎으로 성실히 진도를 나갔는데, 담당 선생님의 확인을 받기 위한 새벽 전화통화가 참 힘들었다. 가끔은 그 선생님께서 집으로 방문하여 테스트를 거치기도 했는데, 부담감에 동생 입을 틀어막고 옷장에 숨어 인기척을 지우던 날도 몇 번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영어는 필수 과목이었던 대학 영어까지 십 년을 넘게 갈고닦았건만 난 막상 외국인을 만나면 말 한마디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사교육, 과연 꼭 필요한 것일까?
의도한 건 아니지만 반에서 우등생이라고 불릴 아이들끼리 친분을 유지했다. 1학기와 2학기 반장은 모두 엄마처럼 키가 큰 여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의 생일엔 나도 초대를 받았다. 남학생끼리만 어울려 다니다가 이런 기회로 밟아본 반장의 집은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 1학기 반장의 방 안은 공기마저 사뭇 달랐는데 내 방처럼 유치한 장난감 따윈 하나 없고 서태지와 아이들 화보나 연예 잡지가 즐비했다.
2학기 반장의 집에 초대받았을 땐 반장의 어머님이 임금님의 수라상 못잖게 많은 먹거리를 해주시곤 외출을 하셨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반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영화를 보자고 한다. 모르는 감독 모르는 외국배우가 등장하는 29금 성인 영화였다. 남녀가 모여 앉아 뭐라 표현도 못하며 조용히 시청했던 기억이 있다. 별 일이 없어 참 다행이다. 그녀에게도 내가(정확힌 내 동생이) 1988년에 발견한 안방 옷장 속 의문의 테잎과 같은 것이 있었나 보다.
이 무리에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있었지만 친한 친구에게 그 사실을 알리거나 5학년 때와 같은 너무 아픈 짝사랑은 시작하지 않았다. 이후 고등학교까지 모두 남녀공학에 다니면서도, 나와 상대의 마음이 같지 않음에서 오는 충격이 염려돼 그저 생각에 머문 채 모쏠의 삶을 이어갔다.
연말이 되자 보통사람인 대통령 임기가 종료되어가므로 차기를 선출해야 할 시기다. 여전히 난 투표권이 없었지만 기호 3번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를 지지했다. 대기업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 경제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했고, 일부지만 세부 공약이 참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랬던 나에게 외할머니는 그 후보가 고령으로 선거 유세 중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는 루머를 전하며 초를 친다. 현대를 일군 도전정신으로 그가 야심차게 이 판에 나섰지만 견제세력도 많고 막상 자사 직원들에게도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해 낙선했다고 친구(이 친구의 아버지는 범 현대家쪽에서 근무하셨다.)가 말한다. 개인적으로 복층 고속도로 위를 꼭 달려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대신 문민 대통령이 창조해 가겠다던 신한국의 모습을 기대하며 내년을 바라봤다.
그리고 졸업과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교칙에 맞게 헤어컷을 해야 했다. 남학생은 3cm 이하의 스포츠형 머리, 여학생은 귀 밑 3cm의 단발머리 바야흐로 3센치의 시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더 이상 엄마와 미용실을 가지 않고 홀로 이발소를 찾았다. 전동 클리퍼의 떨림이 두피 전체에 전달될 만큼 이마 위가 휑해지고 커트보 어깨 부분에 수북이 쌓여가는 머리털을 보며, 내 머릿속에선 평소에는 즐겨 듣지 않던 김민우 가수의 《입영열차 안에서》가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이때와 군 훈련소 입소 전, 딱 두 차례 억지로 짧은 머리를 해 봤는데 이렇게 잘려 나간 건 머리카락만은 아닌듯하다. 3cm의 머리는 그곳의 질서를 절대 흐트러뜨리지 않겠다는 서약과 같이 느껴졌다. 눈 밖에 나지 않는 구성원으로 성장하게끔 더 높은 수준의 통제가 펼쳐지는 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만큼 착잡함과 두려움 그리고 설렘까지 뒤섞인 채 기나긴 겨울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