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임오년

Gangsta's Paradise

by 김동의

2002년 1월 4일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짐을 싸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은 교통수단과 옷차림만 다를 뿐 과거 인력사무소의 낡은 승합차에서 어느 공사 현장에 뿌려질지 알 수 없어 초조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천광역시에 쓰일 의무전투경찰순경(이하 ‘의경’이라 칭한다.)들은 인천경찰청사 앞에 모여 각 관할별로 인솔하러 온 직원들에게 호명되길 기다렸다. 나는 인천중부경찰서 방법순찰대로 배치를 받았고 인천경찰청과 바로 맞닿은 경찰서 건물로 이동했다.*

*당시 인천경찰청은 인천 중구 항동에서 구월동으로 청사 이동 준비를 하고 있었고 바로 옆에 신축된 인천중부경찰서가 위치했다.


무거운 더플백을 지고 함께 중부경찰서 측면 계단을 오르던 나의 동기는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었다. 한겨울에도 온몸이 땀에 절여진 채 건물 최상층인 5층까지 올라 마주한 방범순찰대는 의경 내무반 8개소와 행정반으로 구성돼 있었다. 편한 옷차림의 그곳 의경들은 복도의 청회색 철재 선반에 정렬해 둔 경찰 단화를 구둣솔로 털며 신기하면서도 착잡한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보기도 했다.


인솔하던 이는 행정병 내무실로 우릴 밀어 넣다시피 하고 사라졌다. 새 페인트 냄새로 가득한 그 방에서 공간 대부분을 차지한 철재 이층 침대, 작은 브라운관 TV, 관물함 앞에 걸린 누군가의 옷가지들을 보며 땀을 식히고 있었다. 이윽고 행정반 의경이 들어와 우리에게 속옷까지 탈의할 것을 명령했고 중고차를 매입하러 나온 직원처럼 몸 구석구석 살피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깨를 비롯하여 팔까지 퍼진 압박성 홍반 내지는 피하출혈 자국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겼는데 조금 전 무거운 더플백을 어깨에 짊어지느라 발생한 현상이었다. 행정반 의경은 A4용지 다섯 장을 주더니 대뜸 진술서를 쓰라고 지시했다. 몸에 나타난 자국들은 누군가로부터 구타·가혹행위 당하지 않았음을 증빙하기 위함이었고 문서 말미에는 서명과 함께 빨간색 인주에 엄지를 꾸욱 담가 찍기까지 했다.


땀에 젖은 네이비 기동복 상하의를 다시 주워 입고 2층에 있는 의경 식당으로 이동했다. 신축 건물답게 이곳도 매우 깨끗했고 새하얀 텍스타일 천장에서 비추는 형광등은 눈이 부셔 감히 올려다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행정반 의경은 맨 앞 창가에 놓인 8인용 식탁에 우리를 앉히고 이곳은 어디인지 뭘 하는 곳인지에 대한 설명이 시작됐다. 설명 다운 설명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고 바로 이어서 험한 욕설로 우리의 기강을 잡아갔다. 의자에 등을 떼고 허리를 곧추세워 앉은 상태로 벽과 텍스타일 천장 마감재 사이의 싸구려 몰딩 부분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 기본자세라고 한다. 우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본자세에서 엉덩이를 의자로부터 5cm 떼고 동시에 양 주먹은 허벅지 상단과 허리춤쯤에 위치시키며 팔은 굽어지지 않게 일자로 유지한 채 고개는 천장을 마주하도록 다그쳤다. 의자에 앉는 자세에서 파생된 동작으로 사람을 못살게 구는 방법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상아색 내의를 뚫고 삐져나온 땀이 기동복을 다시 흥건하게 적셨다. 식탁에서 고초를 겪는 동안 취사반의 저녁 식사 준비가 완료됐고 황송하게도 가장 가까이에서 욕을 먹고 있었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밥을 뜰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됐다. 다섯 명의 동기는 잔뜩 긴장하며 식판을 들었는데 뭘 잘못했는지 내 앞에 있던 아이의 머리를 행정반 의경이 식판을 세워 내리쳤다. 스테인리스 식판 엣지는 헤밍 처리가 되지 않은 개체로 의경 모자를 쓰고 있지 않았더라면 녀석의 두개골에 식판이 박히거나 절상을 입을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맞은 아이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가해자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경찰서로 배치받기 전 충주 중앙경찰학교에서는 의경 내 구타행위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그 경찰학교 경감 놈... 구라였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나의 의경 생활은 시작됐고 홀로 몸부림치고 깽판을 놓는다 한들 민형사상 책임은 제외하더라도 국방부 시계의 카운트는 00시 00분 00초에서 다시 시작될 뿐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올라간 행정반 내무실에서는 본격적인 구타·가혹행위가 시작됐다. 행정반 의경은 행동이 느리다느니 목소리가 작고 발음이 불분명하다느니 온갖 꼬투리를 잡았고 매일 일지도 작성해야 하는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먹으로 우리의 두개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주먹이 지나간 자리는 여지없이 몹쓸 벌에 물린 듯 불룩한 혹이 생겨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저녁 점호 전 또 다른 행정반 의경이 우리를 이끌고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실 앞에는 통돌이 세탁기가 놓여있었고 그 앞의 작은 공간에서 탈의할 것을 지시했는데 신속하게 옷을 벗지 않는다며 “입어!”, “벗어!” 명령을 청기백기 게임처럼 수차례 반복했다. 그 바람에 방한 내의와 포돌이 체육복은 바닥의 흥건했던 물기를 머금고 몸에 들러붙어 도저히 빨리 벗을래야 벗을 수가 없었다. 조롱당하듯 한바탕 바보 같은 소란을 겪고 나서야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았다. 훈련소에서 지급받은 All in one 오이 비누로 거품도 제대로 못보고 서둘러 샤워를 마쳤는데 행정반 의경의 닦달에 도로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임시 수면 공간으로 2소대 내무반에 있는 이층 침대 중 일층 자리를 빌렸다. 바닥은 다다미를 초록색 타포린으로 감싼 매트로 구성되었고 그 위로 삼단 매트리스를 펼쳐 경찰 마크가 새겨진 포단을 깔면 잘 준비는 끝이 났다. 이게 진짜일리 없다고 느껴진 하루도 그렇게 마무리가 되나 보다 했다.


신병(그곳에서는 신삥 또는 쌔뱅이라고 불렀다.) 때에는 잠을 잘 때에도 자세를 편히 할 수 없었다. 정자세로 하늘만 보고 반듯하게 누워 자라고 지시받았는데 무심결에 옆으로 눕거나 코를 골면 욕을 먹었다. 코를 심하게 골았던 동기는 계속된 지적에도 고쳐지지 않자 2층에 있던 선임이 내려와 베개로 자고 있던 그의 얼굴을 수차례 절구질하듯 짓이겼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모르는 사람에게 안면을 가격 당한 그가 소리를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약 2주간의 신병 생활은 소대 배치를 받지 아니하고 행정반에 소속돼 잡부로 일하느라 고달팠다. 행정반과 내무실은 물론 신축 청사 곳곳을 청소하고 수시로 무겁고 부피가 큰 집기를 들고 나르는데 동원되었다. 경찰서에서는 예산이 없는지 5층이나 되는 청사로 새로이 이사를 하면서 흔히 마주칠법한 청소용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하 총기류 보관함까지 살림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소대 배치를 받았고 아까 식판에 찍힌 아이와 함께 2소대에 배정됐다.


누가 만들어 낸 룰인지는 모르나 신병이 할 수 있는 말은 세 가지로 제한됐다. “네. 알겠습니다.”, “아닙니다.”, “잊었습니다.” 외에 다른 말을 뱉어냈다간 구타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다소 억울하더라도 말대꾸하지 말고 물 흐르듯 흘려보내라거나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잊었다는 말 한마디로 지우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소대에서의 삶은 산 넘어 산이었다. 선임들의 현란한 주먹질과 발길질은 매일같이 이어졌고 식기 세척이나 경찰 버스를 닦는 노동을 할 적에 머리통을 후려치는 정도는 일상다반사였다. 그들의 구타행위는 매우 감정적인 동기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고 전혀 죄의식이 동반되지 않았다. 그들도 신병일 땐 더 심한 구타와 가혹행위가 있었고 너희가 당하는 것은 그때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며 스스로도 폭력을 행하기 싫은데 상황상 어쩔 수가 없다거나 자신의 위치에서 더한 고통을 줄 수도 있지만 선심 쓰듯 절제하고 있음을 정형화된 문구처럼 구타 후 마무리 발언에 사용했다.


왜 이토록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냐며 폭력 앞에서 웅크리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후임들을 탓했다.


방범순찰대의 평시 근무는 형태가 다양했다. 관할 파출소에 예닐곱 명씩 조를 이뤄 순찰 지원을 나가거나 항만이나 초소 같은 건물들에 대한 경비 근무를 서기도 했다. 야간에는 파출소 지원은 물론 숭의동이나 학익동에 밀집된 윤락업소들의 호객행위 단속 업무도 우리의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곳에서 전우애나 동업자 마인드 따위는 형성되기 힘들었고 선임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후임들의 근무는 늘 거저 놀다 온 시간으로 취급받았다. 추위에 간신히 버텨가며 근무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군기가 빠졌다며 후임을 향한 크고 작은 구타행위는 쉴 시간에도 쉼 없이 일어났다.


이토록 다양한 근무조 편성을 맡은 중간 선임의 고충도 존재했다. 말년에 가까운 최고 선임들일수록 근무에서 열외 시키거나 아주 편하게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근무지에 배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새벽 근무자를 연이어 낮 근무시간에 배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석 달에 한 번꼴로 외박이 주어지는 의경 특성상 부재자들은 늘 존재했기에 최고 선임들의 열외 행위는 지속 가능하지 못했다. 그렇게 심기가 불편해진 최고 선임들은 근무조 편성을 맡은 중간 선임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그렇게 당한 선임은 그다음 후임에게 그에 준하는 대미지를 준다. 피해자가 시간이 지나 가해자가 되고 그 가해자에 의해 피해자가 된 이는 또 다른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이 그칠 줄을 몰랐다.




인천광역시 부평구에는 대우자동차 공장이 있었고 IMF 이후 계속된 구조조정과 노동자 해고로 집회·시위는 그칠 날이 없었다. 때문에 내가 속한 방범순찰대는 평시와 같은 근무 형태를 유지할 수 없었고 대우자동차 앞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불려 나가 로보캅과 같은 진압 헬멧과 진압복을 입은 채 방패와 봉을 들어 분노에 찬 노동자들 앞에 서야 했다.


그들은 시종일관 격앙되어 있었고 툭하면 우리와 격렬한 몸싸움이 일어나기 십상이었으며 일부 과격분자들은 방패를 들고 공장 진입을 막고 있는 우리를 태워버리겠다며 휘발유를 끼얹으려는 시도를 했다. 때론 노동자들의 배우자와 아이들까지 참석하는 집회도 있었다. ‘일자리를 잃었으면 다른데 취직하지 저게 무슨 추태인가?’ 하며 경찰봉을 힘겹게 들고 있던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평시 근무였다면 잠시나마 존재만으로 괴로운 선임들을 피해 순찰을 핑계 삼아 월미도나 자유 공원, 신포시장 같은 곳을 배회하며 콧바람을 쐴 수 있었는데 이날과 같은 비상 집회 상황에서는 앞으론 성난 군중들이 뒤로는 시위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밀리면 죽여버리겠다며 발로 걷어차대는 선임들로 일분일초가 죽을 맛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휘발유나 인분 같은 것을 뒤집어썼다면 그 부대의 분위기는 불 보듯 뻔하다.


상황이 종료돼도 편히 쉴 틈이 없었다. 닦아도 별 티도 나지 않는 경찰 버스(그 닭장차 맞다.) 내외부를 정성스레 청소했다. 차체와 유리는 신문지로, 바퀴는 소량의 구두약과 구둣솔로 문지르고 휠에 떨어진 구두약 잔해는 짓이겨지지 않도록 살살 걸레로 닦아냈다. 외부 청소는 견딜만했으나 차량 실내를 청소하는 것이 매우 고역이었다. 좌우로 두 석씩 위치해 가뜩이나 좁은 복도를 손이 보이지 않게 기계 돌리듯 걸레질이나 솔질을 해야만 점호 후에 있을 잡도리에 거론되지 않을 수 있다. 관리·감독이라는 명목하에 감시·구타를 맡은 중간 선임은 버스 천장에 설치된 바(bar)를 양손으로 잡고 다니며 손이 느린 자에게는 가차 없이 맹금류가 먹이를 낚아채는 속도로 공중 폭격을 가했다. 그렇게 피·땀·눈물 어린 버스는 일을 마쳐도 안에서는 한약 몇 봉다리는 족히 쏟은 듯한 냄새가 배어있었고 걸레에 남아있는 페리오 치약향까지 뒤섞여 퍼져 나올 뿐이다.

버스를 닦고 나서. 배우자도 몰라볼 정도로 표정이 썩고 얼굴이 상했다.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인근에서의 집회는 끊지 않았다. 때문에 평시 근무보다는 집회·시위 현장 동원 명령이 매일같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심야나 새벽에 이뤄지는 집창촌 단속 업무를 빼주는 것도 아니다. 햇빛 하나 가릴 것 없는 넓은 공장부지에서 잘 쉬어 봐야 시동 꺼진 닭장차 안에 앉아있는 것이 전부인 선임들은 독이 잔뜩 올랐다.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 훈계를 하거나 깨스(gas)를 걸었다. **

**깨스(gas) 명령은 시위 진압 시 CS gas 즉, 최루탄 투하 명령으로 동시에 진압 상황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때를 의미하지만, 최고 선임들이 그때와 같은 긴장감을 지닌 채 내무 생활을 하라는 뜻으로 변질되어 사용되었다. 중대마다 다르지만 이 상황에서는 누구든 일상적인 대화, 흡연, 화장실 이용 등에 제약이 따르고 눈치를 보며 알아서 기어야 했다.


그런 삼엄한 상황에서 거의 막내였던 나는 아침 점호 전 가장 먼저 일어나 선임들을 역순으로 일으켜야 했다. 언제나처럼 순차적으로 모두를 깨웠는데 최고 선임 옆자리에 붙어 생활하는 중간 선임 한 명이 내가 자고 있는 최고 선임의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며 괜히 시비를 건다. 100% 모함이다. 사실이 아닌 일에 그가 하도 성질을 내니 그 밑의 선임들이 나를 비롯해 가까운 기수 대여섯 명을 구타 대상으로 찍어 경찰 버스로 소환했다.


구타 대상들은 버스에 먼저 들어가 앞서 언급한 식당에서의 가혹행위와 똑같이 의자에서 5cm쯤 엉덩이를 들고 팔은 일자로 편 채로 버스 앞 유리에 달린 시곗바늘만 바라보며 대기해야 했다. 어차피 때리려고 불러 모은 거 어서 칠 것이지 집행자들은 길게 훈계를 한 후 이러이러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너희들을 패겠노라 선전포고한 뒤 한 명씩 주먹으로 안면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구타 대상자는 맞을 때마다 필히 관등성명을 외쳐야 했다.


내 차례가 되어 두어 대쯤 주먹질이 이어질 때쯤 타격 음이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순간 앞이 보이지 않게 됐다. 수십 초 뒤 어렵게 뜬 눈은 충혈되었고 눈 두덩이에서는 피(血)가 주륵 흘렀다. 놀란 구타 집행자들은 내 상처를 휴지로 누르고 “아~ 거 좀 잘 때렸어야지!” 하며 서로를 탓하기도 했다. 부은 눈과 흉터를 가릴 길은 없었다. 바로 오전 점호가 끝나자마자 소대장을 맡은 경사가 나를 불러 조사했다. 조사 내내 일관되게 버스 청소를 하다가 실수로 백미러에 부딪혔다며 거짓을 고했다. 하루이틀 경찰생활 한 사람들이 아닌데 이런 허위 진술에 고분고분 속아줄 사람들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에는 소대 부관(부 소대장)인 경장이 같은 조사를 이어갔다. 이들의 수사는 저녁시간에도 점호 청소 시에도 집요하게 이어졌고 쉴 새 없이 나를 소환했다. 나의 몫까지 청소를 해야 했던 비교적 가까운 기수의 선임들은 나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한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주변인들은 나를 죄인처럼 대한다. 항만 경비 근무를 나갔다가 고민 끝에 김포 경찰서 경비과장으로 재직 중인 둘째 큰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문제없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대뜸 “요즘 폭력이 합법화된 곳이 어디 있냐!” 소리를 치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다. 근무를 마치고 경찰서로 복귀하니 4층에서 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소대장이 한숨을 쉬며 날 불러 세웠다. 다 들어서 알고 있으니 이실직고하라며 가해자 성명과 상황을 설명하라 했다. 훗날 들은 것인데 그날 큰아버지는 날 더욱 강하게 만들고자 했는지 단순히 분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경찰대 출신의 젊은 중대장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거칠게 항의했다고 한다.


이후 우리 중대는 보호 중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급 기관으로부터 관리 감독이 강화되었고 부대 전원에 대한 외박과 외출이 제한됐다. 중대장을 비롯한 소속 직원들의 인사평가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내 눈에 상처를 입힌 아이는 충주 중앙경찰학교 기율교육대로 끌려가 2 주간 혹독한 교육을 받게 됐다. 그날부터 나는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나마 친하게 소통하던 이들도 나를 피하거나 차갑게 대했고 누군가는 근무 소집 직전에 내 바지를 지퍼가 잠기지 않을 정도의 작은 사이즈로 바꿔놓는 유치한 짓도 일삼았다. 흡연 시간에 비흡연자로 대열 끝에 서서 매캐한 연기를 참고 있던 나에게 들으라는 듯 누구 덕에 보호중대가 됐다며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주는 때도 많았다.


“고맙다 ㅅ발 부대 분위기 ㅈ같이 만들어 줘서.”

“몰랐네? ㅋ 경찰에 그 좋은 빽 있으면서 왜 여기서 고생해?”


대화를 거의 나눠보지 않은 타소대 선임들까지 저렇게 비아냥대며 내 곁을 지났다.


한국과 일본에서 최초로 공동 개최되는 월드컵을 목전에 두고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숙박을 하며 경비를 섰고 영종도 곳곳에 보내져 폭탄 수색을 하기도 했다. 사람은 고사하고 야생동물들의 발길조차 닿지 않았을 법한 돌산을 꼬챙이 하나만 쥐고 혹시 모를 폭탄이 매장돼 있거나 저격자가 숨어들만 한 곳을 콕콕 쑤셔댔다. ‘저격자를 내가 찾아내서 조기 전역을 하겠다.’는 심산으로 열심히 탐색했지만 꼬챙이가 1mm도 박히지 않는 광활한 바위산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는 몹시 어려워 보였다.


각 국가대표팀의 인천공항을 통한 입국이 예정된 시점에 소속된 방범순찰대는 한시적으로 경찰서 5층에서 영종도의 외진 곳에 위치한 전경(작전전투경찰순경) 중대 옆 샌드위치 패널 가건물로 거처를 옮겼다. 월드컵 기간 초반까지 우리 중대는 인천국제공항 1층과 3층 각 게이트 경비 임무를 맡게 됐다.


사용하지도 않을 금속 스캐너를 손에 들고 허리춤에 채워진 무겁고 두꺼운 가죽 벨트엔 단봉이 매달려있었으며 견장에는 치장용 흰색 로프가 걸려있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허리에 가해지는 압박이 상당했다. 매일 9시간을 3층 입국장 게이트에 서 있는데 한 번 기침이라도 하면 척추 전체로 통증이 전달될 지경에 이렀다. 월드컵 분위기가 더해져 저마다 기대에 찬 밝은 표정으로 출국장에 들어서는 이들을 보며 나도 저들처럼 껏 부푼 마음으로 하늘을 날아보고 싶었다.

공항 경비 업무 준비 중


군가는 BoA의 <No.1>을 들으며 출국 수속을 밟고 면세점을 이용하는데 나는 그 박자에 맞춰 구타를 당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낸 국가적 경사에 모두가 들떠있는 상황에도 인천중부경찰서 방범순찰대의 의경들은 '나'라는 만고의 역적을 잊지 않았다. 보다 더 높은 잣대를 들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그 이유를 명분 삼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폭력을 행사했다. 마음만 먹으면 죄는 쉽게 만들어졌다. 경찰 무전 음어부터 버스 등 경찰 관용차 차량 번호, 인원별 기수 따위를 물을 때 즉답하지 못하면 손쉽게 구타유발자가 됐다.


어느 곳이든 내가 서있는 곳이 곧 가시방석이 돼 순식간에 불편한 기운으로 채워진다. 시간은 더욱 더디게 흐른다. 전역까지 보이지도 않는데 오늘도 9시간 동안 출국장 게이트 앞에 서 있어야 한다. 무슨 생각을 하며 서 있을지 벌써부터 고민이다. 가끔 외국인이 말을 걸어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러나 9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항 유리 커튼 월을 통해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모습을 보거나 옆 게이트의 선임에게 잠시 양해를 구해 공항 화장실 손 세정제로 손을 씻곤 몇 초간 지속되는 인위적인 향기를 맡으며 잠시 머리를 식힐 뿐이다.


지루한 근무가 이어지던 중 한 환전소 직원이 나를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손가락으로 앞에 걷고 있는 아저씨를 가리키며 위조지폐를 사용했으니 잡아달란다. 나는 옷만 경찰일 뿐인데... 싸움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나에게 이분은 한가득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내가 “아저씨!” 하고 부르니 앞서 걷던 그가 힐끔 돌아보곤 갑자기 도주하기 시작했다. 뜀박질만큼은 자신 있었기에 용의자와 나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지만 보이지 않은 곳에 숨겨뒀을지도 모르는 흉기에 대한 공포가 나를 주저하게 했다. ‘이 자에게 찔려 죽으나 가시방석에서 스트레스받으며 타들어가듯 죽거나’ 하는 생각에 이판사판 몸을 날려 용의자의 어깨와 허리를 잡았다. 의외로 저항은 없었고 그렇게 용의자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를 일으켜 세워 양팔을 붙잡은 뒤, 마침 현장을 지나던 전경에게 무전을 통해 상황실에 보고하게 한 후 공항경찰 측에 신병을 인계했다


용의자는 위조지폐를 사용한 것이 확인됐고 환전소 직원과 체포 현장을 목격했던 여직원이 내가 용의자를 업어치기 해서 체포했다는 조금 과장된 증언을 남겨 공항경찰대장의 표창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3박 4일간의 특별 휴가도 포상으로 주어졌지만 소속 중대 안에서 선뜻 매국노가 순조롭게 휴가 절차를 밟도록 놔두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the 표창장


집요하고 치졸한 보복이 지속되는 가운데 아관파천 하듯 잠시 하인천파출소(現 하인천지구대)에 파견되어 그곳 옥탑방에서 홀로 지낼 때였다. 과학수사반 최 경장이라고 밝히던 분에게 전화가 걸려 왔는데 자신과 일해보지 않겠냐며 내게 제안을 해왔다.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 화에 2002년 남은 기간과 2003년 이야기를 함께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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