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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천 파출소 옥탑방을 내 원룸 삼아 소속 경찰관과 일근-당직-비번 순으로 이뤄진 3교대 근무는 몸은 고됐지만 마음만큼은 방범순찰대 소대 생활과 비할 바 없을 정도로 편했다. 밤이 깊어지면 연일 술에 취한 이들이 파출소를 찾아와 소란을 피우거나 제복을 입은 경찰에게 시비를 걸었다. 좋게 말로 진정을 시켜보지만 이들은 좀비와도 같아 사람 말을 듣지 아니하고 더욱 흥분하여 생떼를 부린다. 한동안 행패를 부리던 주취자들은 술이 깨거나 기력이 다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대부분 얌전해져서 그들만의 스팟으로 사라지지만 때로는 선을 넘는 이들이 등장한다.
족히 삼십 분은 중복됨 없이 현란한 욕설을 시전 하다가 스스로 분에 못 이겨 파출소의 집기를 부수고 던지거나 경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그 예다. 이런 부류들은 형사계에 인계해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순찰차에 태워 경찰서 1층 형사계까지 모셔드려야 상황이 종료된다.
순찰차 동승석에 탑승하면 MDT(Mobile Data Terminal)로, 도보 순찰 시에는 HDT로 눈에 보이는 차량을 쉬지 않고 조회했다. 그렇게 무면허 운전자나 지명 수배자를 찾아내기도 했고 음주 운전을 하다가 차를 버리고 도주하는 자를 쫓아가 잡아옴으로써 소소하게나마 실적을 물어주니 어느덧 파출소 직원들은 ‘잘했어! 라이코스!’ 하듯 나를 반겼다.
근무가 종료되면 30년은 족히 돼 보이는 파출소 건물 곳곳을 청소했다. 이때만 해도 실내 흡연이 흔할 때라 파란색 플라스틱 휴지통엔 담배꽁초와 먹다 버린 믹스커피, 박카스가 뒤섞여 녹황색을 띤 액체가 항상 고여 있다. 내용물을 비우려면 그 역한 혼합물을 매일 마주해야 했지만 선임들이 있는 경찰서보다 혼자인 이곳이 더 좋았다.
정신없이 청소를 하다 보면 반갑지 않은 FAX가 도착한다. ‘등서 명령’으로 시작되는 문서는 보나 마나 집회·시위가 있으니 정해진 일시까지 경찰서에 집합해 닭장차에 오르라는 지시다. 그럴 리가 없지만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명령이 취소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때론 마주하게 될 따가운 시선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설치던 밤이 부지기수다.
어느 날 내가 일하는 파출소로 경찰서 과학수사반 최 경장이란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최 경장은 과학수사반 관리하에 경찰서 종합조회처리실(이하 ‘전산실’)을 운영 중인데 마침 그곳에 TO가 생겨 방범순찰대원 서류를 뒤지던 중 나를 발견했다며 내 의사를 물었다. 지난날의 방범순찰대와 닭장차를 순간 떠올리다가 지체 없이 그쪽 근무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하루하루가 다이내믹한 파출소 업무는 지겨울 틈이 없었지만 언제 또 경찰서 방범순찰대로 소환될지 모르는 불안을 떠안은 채 마음 편히 살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도피를 일삼던 삼한시대 죄인이 소도를 찾아 냅다 달리는 심경으로 경찰서 형사계 과학수사반을 찾았다.
과학수사반 산하에 있는 전산실은 나까지 총 네 명의 의경이 교대로 근무하는 곳이다. 교통과, 수사과, 형사과, 보안과, 외사과 등 여러 수사 조직에서 의뢰한 이들의 범죄 경력부터 차량, 수배 여부 조회는 물론 미아나 행방 불명자, 도난 차량, 범죄 통계 원표 등의 전산 입력까지 임무가 주어졌다. 완전한 내근 사무직이다.
이제는 닭장차를 닦고 차에 올라타서 맞고 내려서 또 맞고 두꺼운 진압복과 헬멧에 치이고 더울 땐 땀 흘리고 추울 땐 덜덜 떨어야만 하는 고통과는 안녕이다. 무엇보다 공공의 적으로 나를 대하던 사람과는 더는 마주할 일이 없어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탈옥하듯 외근 중 몰래 공중전화 부스로 뛰어 들어가 1541 콜렉트콜을 이용한 그리운 이들과의 짧고 애틋한 통화도 이젠 그만이다. 언제든 여유 있게 전산실 전화기나 경찰서 1층 로비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사용하면 될 일이다.
내무실은 경찰서장을 비롯한 고관대작들의 운전 인력, 교통 의경과 함께 사용하는 곳인데 이쪽으로 차출되는 경력(警力)은 모두 전에 소속된 방범순찰대에서 선발된 인원들이다. 때문에 좋지 않은 내 평판은 고스란히 이들에게 전해졌고 한동안 고문관을 들인 것처럼 나를 경계했으나 주어진 일만 묵묵히 하다 보니 어느새 이들은 소문에 의한 편견을 거두어들이고 동료로 받아주는 듯했다.
전산실은 두 평 남짓한 사무실에서만 근무해야 하는 관계로 간혹 답답함을 호소하는 선임도 있었으나 내 성격과 적성을 고려했을 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직이었다. 이전 방범순찰대에서 추억 삼을만한 것은 2002년 월드컵 당시 잠깐이었지만 대한민국과 프랑스 국가대표가 묵는 파라다이스 호텔(이후 Olympos Hotel로 운영되다 현재는 중단) 경비를 했던 일 정도다. 아주 근거리에서 유상철 선수나 홍명보 선수를 목격하기도 했고 불란서 선수단이 호텔 근처를 산책할 적엔 지단과 비에이라 선수 옆에서 함께 걸었다. 체감상 키가 2m쯤 되는 단단한 거인으로 느껴졌는데 그에 비해 훌리건에게 한 대 맞으면 픽 쓰러질 것만 같은 작고 약해 뵈는 의경들을 보니 누가 누굴 경호하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좋다. 자다가 누군가 귀를 비틀어 깨워 자기가 깎아 놓은 발톱 잔해를 치우라고 요구하는 이도 없고 걸레질을 빨리하지 않는다고 갑자기 옆구리나 꼬리뼈를 걷어차는 이도 없으며 밥 먹듯 두개골을 타격하는 이도 이곳에는 없다. 매일 근무시간이 변경되는 4 교대의 삶이 육체를 지치게 해도 사람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아서 좋다. 하대하는 이도 종종 있었지만 우리에게 일거리를 의뢰하는 수사관들은 우리를 동료로 봐주는 것 같아 좋다.
나름 형사과 소속이라고 형사계나 강력계 형사들이 야식도 많이 줬다. 전산실 막내로 야식을 수령해 가라는 연락을 받고 경찰서 지하에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강력계 사무실 문을 조심스레 열었는데 아직 이름과 얼굴을 모르는 상태라 누가 형사이고 누가 피의자인지 쉽사리 구분이 되지 않는다. 책상의 모니터 방향으로 간신히 피아 구분을 하곤 비닐 랩도 뜯지 않은 탕수육 접시를 받아 들어 두 개 층을 단숨에 뛰어올랐다. 어느 날은 피자가, 또 다른 날은 치킨이, 운이 좋으면 광어회도 맛볼 수 있었다.
물론 바쁜 날도 많았다. 본격적으로 피의자나 참고인 조사가 시작되는 오전 9시부터 수화기 두 대를 턱으로 붙잡은 채 키보드를 조작하는 일은 예사이고 음주단속 피크타임인 새벽 서너 시까지 수사 카드(피의자의 인적 사항과 전과 출력을 의뢰하는 용지)가 쉼 없이 전산실 개구멍으로 몰려들었다. 정보과나 보안과에서는 비 정기적으로 수백 명의 명단을 신원조회 해달라며 뭉텅이 서류를 던지고 가거나 김대중 대통령 방문이 예정된 장소에 참석할 수천 명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니 타이핑 속도가 늘고 우측 숫자키 패드를 다루는데 꽤 능숙해졌다.
최소 연 1회 이상 중부경찰서 관할 지역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사건으로 수사본부가 차려지기라도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일감을 몰아주는 형사들 때문에 범인이 제발 잡히기를 기도한 적도 있다. 가끔 막내 조사관이나 형사들은 보안 구역인 전산실 문을 열어달라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우리 사무실에 잠시나마 머물며 막내의 설움을 털어내듯 우리에게 이런저런 인생 조언이나 훈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그들이 함께 들고 온 서류 뭉치를 무심코 보면 끔찍한 형상으로 쓰러진 피해자의 주검과 선혈이 낭자한 현장 사진으로 가득했다. 어느 50대 여성을 범인이 망치와 같은 둔기로 두개골을 함몰시켜 살해했는데 시신이 부패하고 부풀어 서류를 보지 않으면 도저히 성별조차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또 다른 사건의 피해자는 복부에 자상을 입었는데 마치 침대 매트리스의 폴리우레탄 쿠션층이 삐져나오듯 열상 부위에서 두텁고 노오란 지방층이 눈에 띄었고 복압에 의해 대장으로 추정되는 장기가 상처를 통해 한 움큼 튀어나와 찐득하게 굳어가는 암적색 피와 함께 노출돼 있다. 바이크를 타다가 하루아침에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젊은이의 현장 사진도 안타깝게 본 기억도 있다. 참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무서운 세상에서 우린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아등바등 하드코어 한 삶을 살고 있고 곱게 잘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손에 의해 조회된 인원들이 많아질수록 선임들은 하나 둘 전역하여 사라지고 후임은 채워지며 내 호봉도 서서히 올랐다. 매우 더디지만 국방부의 초침은 멈춤 없이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14박 15일의 상경(육군에선 상병) 휴가를 비롯해서 석 달에 한 번꼴로 주어진 3박 4일의 외박을 복귀할 때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괴롭고 우울한 얼굴로 경찰서 정문에 들어서곤 했다. 지금은 차이나타운으로 잘 꾸며져 있고 제법 찾는 이도 많아졌지만 당시의 인천역은 몹시 낙후된 느낌이 짙었고 붉은 패루문만이 이곳이 화교들이 많은 장소임을 알릴 뿐이었다. 인천항으로부터 불어드는 황사에 부두 근처에 위치한 제분공장에서 비산 된 먼지가 더해져 구현해 낸 뿌연 하늘빛은 마치 내 삶을 비추는 거울 같아 속히 벗어나고픈 열망으로 가득했다.
어느덧 전역 3개월을 앞두고 내무실 최고 선임이 되었다. 여유시간에는 TV로 온게임넷이나 MBC GAME에서 송출하는 모든 스타리그를 감상하곤 했다. 경찰서 안에서의 삶은 딱히 금전적인 지출이 필요 없어 군 생활 동안 나라에서 내게 지급된 급여는 고스란히 통장에 쌓여있다. 계산해 본 결과 전역을 하게 되면 이백만 원이 조금 넘는 거금을 거머쥘 수 있다. 경찰서에서 벗어나면 난 무얼 해야 할지 슬슬 고민이 됐다. 확실한 것은 학교로 돌아가긴 싫고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싶었다.
가끔 마주치는 형사들은 나가면 뭐 할 거냐 묻고는 그냥 경찰이나 같이 하자며 농담 섞어 권했다. 어떤 직원은 상여금이 포함돼 세전 육백만 원이 넘게 찍혀있는 급여명세서까지 보여줘 가며 어디 가서 이만큼 버는 직장 잘 없다고 했다. 의경 출신이라고 해서 채용 시험에 가산점이 부여되는 것도 아니고 자주 마주치는 직원들이 큰 팁을 줄 것도 아니지만 괜히 경찰을 해보면 괜찮겠다는 헛바람이 불어 들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2년 2개월의 군 복무 기간을 무려 2주나 단축해 줬지만 2001년부터 세 번의 크리스마스를 군대에서 보내게 됐다. 외부에서 자유인 신분으로 이 들뜬 시기를 맞는다 한들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지만 성탄절 분위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삭막한 전산실 안에 놓인 작고 낡은 회색 LG 브라운관 티브이로 《나 홀로 집에》를 시청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처량하게 여겨졌다.
어느덧 대망의 말년 휴가일이 도래했고 포돌이 그림이 있는 네이비 더플백에 서둘러 짐을 넣은 후 도망치듯 경찰서를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제복을 입지 않았다면 현행범처럼 전력질주하는 나를 붙잡으려 정문 경비근무를 서던 전경이 쫓아왔을지도 모른다.
1호선 기점인 인천역에서 대기 중인 파란색 전철은 고요했다. 아무도 없는 칸에 들어서서 길고 파란 벤치에 더플백을 툭 던져 놓고 풀썩 앉았다. 직물 시트 커버링이 머금었던 먼지가 솟아올라 아지랑이 춤추듯 퍼지는 모습을 열차 창을 통해 들이친 햇살이 부각했다. 이것은 자유의 먼지다. 햇살은 다시 내 어깨와 오른쪽 뺨을 따스하게 달궈줬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모건 프리먼이 출소하여 탑승한 버스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듯 나도 열차의 속도에 따라 점점 빠르게 사라지는 송월동의 낡은 연립주택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훗날 맏 후임으로부터 얼마나 경찰서가 싫었으면 한마디 인사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느냐는 과학수사반 직원들의 아쉬움도 전해 들었다. 내게 스카웃 제의를 한 최 경장님과 전산실을 총괄 관리했던 김 경사님께 심심한 사과를 전하고 싶다. 나는 당신들이 꼴 보기 싫어서가 아닌 자유를 향한 갈망이 너무나 컸기에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음을 뒤늦게 변명해 본다.
군대에서 국방의 의무라는 거룩한 포장을 걷어내고 2년 2개월간 유익한 측면을 눈을 씻고 찾자면 복무 기간 동안은 누구나 가장 말단에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는 체험이 가능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그 어떤 사회생활도 이러한 경험은 한 번 겪기도 힘들 테니 말이다. 동갑내기 친구들은 육해공군을 비롯해 카투사, 해병대, 공익근무요원까지 다양한 형태로 군역을 수행했지만 새 천년에 들어서도 매일 구타로 얼룩졌던 곳은 경찰로 대체 복무하는 이곳이 독보적인 것 같다. 내가 가장 힘들게 군 생활을 했노라며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작은 조직이 왜 이렇게 폭력에 무방비한 상태로 방치되었는지가 궁금하고 독특하게 여겨져 떠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경찰이란 조직은 통상 채용 후 교육을 받고 나서 순환보직 과정을 거친다. 옆에서 느낀 바에 의하면 이곳 직원들은 심야, 철야, 외근 없이 9 to 6 안정적인 사무 업무를 볼 수 있는 부문을 선호하는 눈치다. 인사 시즌만 되면 할아버지의 9촌 동생의 손자까지 뒤져서라도 인사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맥을 찾아 원하는 보직을 지켜내거나 얻어내는 이도 있다. 의경이 아닌 직원으로 방법순찰대 보직을 맡게 된 이들에게도 내가 받은 인상은 그저 있는 동안 큰 사고 없이 있다가 여길 발판 삼아 더 좋은 자리로 가기만을 바라는 듯했다.
똑같은 호봉을 지급받으며 담당한 의경들을 깊이 살피는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대게는 의경들을 거느리며 왕처럼 군림하다가 자기 계발을 하거나 진급 시험공부에 진심인 편이다. 그렇다 보니 의경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하고 경력을 시의적절하게 부리기 위해서 본인을 갈아 넣는 방법보다는 소수 의경 선임들에게 관리를 일임하는 쪽을 택하기 쉽다. 성가신 문제라도 생기면 수임자의 목만 쥐고 흔들면 가볍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런 행태로 미루어보아 그들은 닭장 버스에서, 내무실에서, 식당에서 의경 아이들 간 벌어지는 구타·가혹행위는 눈 질끈 감고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의경 선임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후임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한다. 화려하게 돌려차기를 선보이는 이부터 누군가를 호명하는 대신 뒤통수를 후려치는 자까지 공히 폭력은 정당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들도 같거나 더 심하게 당했고 상황상 날아간 그들의 주먹은 항상 어쩔 수 없었으므로 더욱 정당하다. 힘 있는 자에게 무척이나 굽신대는 모습을 보이거나 약자일 때와 강자일 때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 온갖 군상의 면면을 이곳에서 똑똑히 보았다.
나는 약 25개월 2주 동안 그 누구에게도 욕이나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남달리 고결하고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토악질 나오도록 환멸을 느낀 의경 조직에 세트로 묶이거나 절로 미간에 주름이 생기도록 행동했던 인간들과 다름없는 행동을 해서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 죽도록 싫었기 때문이다. 고대하던 민간인 신분이 되어서 마주한 세상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방범순찰대라는 작은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 이 또한 심히 유감스러운 바이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2002년의 악몽이 재현되거나 전쟁이 종식되지 않은 비운의 국가에 적을 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재동원령이 떨어져 다시 훈련소로 징집되는 몹쓸 꿈을 꾼다. 내 아들은 부디 가장 꽃다운 나이에 징집되는 그 기분을 모르고 성장했으면 한다. 꿈에도 소원은 통일까지는 아니겠지만 많은 싸우쓰 코리언들이 남북 종전이라도 이루어지도록 힘을 모아주길 나는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