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공시생
2004년 끝이 보이지 않던 군 복무도 종료되어 군과 관련된 흔적은 작은 전역증에만 남기고 모든 흔적을 지울 기세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집에 있는 샴푸와 바디워시로 벅벅 닦았다.
우리 집은 내가 의무 경찰로 열심히 일하는 동안 아무런 기별 없이 인천 작전 1차 현대 아파트에서 부천 상동 진달래 마을 2243동 302호로 이사했다. 44평형으로 공간도 역대급이었지만 사소한 마감재부터 기존의 집 보다 모든 면에서 고급 져 보였다. 방은 4개 있었는데 작은방 1개는 벽을 허무는 인테리어 시공까지 해두어 지나치게 광활한 거실엔 못 보던 밝은 베이지 톤의 천연 가죽 소파가 놓여 있다. 그 옆으로 술 한 방울 못하는 우리 가족과 어울리지 않게 진귀한 양주병들이 진열되었는데 이것들은 아빠의 평생직장 생활 동안 가진 해외출장 기회 때마다 기념품 수집하듯 한 병씩 구입해 온 것이다.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양주병들은 진열장 앞 COB 조명을 저마다의 각도로 반사시켜 그 공간을 더욱 눈부시도록 화려하게 만들었다.
아빠는 내 전역을 앞두고 김 이사로 재직하던 주식회사 아남전자에서 정년이 도래하지 않았음에도 퇴직했다. 운 좋게 IMF와 워크아웃의 풍파를 벗어났지만 오너가 변경되면서 이사 자리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며 퇴사 이유에 대한 짧은 설명을 나에게 해줬다. 부족했던 잠도 많이 자고 마냥 편할 줄 알았는데 막상 나와보니 그렇지가 않더라 하는 말씀도 남겼다. 그때는 전혀 이해되지 않다가 요즘 들어 그 뜻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초록빛 국민은행 통장에는 알토란같이 모은 26개월치 급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엄마는 그 돈으로 동생의 등록금에 보태야 한다며 인출하라고 했다. 나는 앞으로도 부모님께 보이지 않는 탯줄을 연결해 금품을 쪽쪽 빨아먹으며 생존해야 할 신세로 군말 없이 그렇게 했다.
엄마는 마치 전역 기념 선물을 하듯 집 앞 상가 1층에 있는 휴대폰 판매점에서 최신 PANTECH&CURITEL社 폴더폰(PG-K1200)을 구입해 줬다. 닳고 닳은 빨래 비누와 비슷하게 생긴 기존의 진주색 플립폰의 디스플레이는 매우 작고 모노톤이었지만 새 폴더폰은 좀 더 큰 칼라 화면에 무려 64화음이다. 카메라도 장착돼 마음만 먹으면 어떤 풍경이든 기기 안에 담아 둘 수 있었다.
다니던 학교에 3학년으로 복학해야 했지만 음침한 공대 건물에 또 드나들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인상이 써진다. 의경 생활을 하며 경찰서 직원들이 권했듯 경찰 공무원에 도전해 봐야겠다. 그러면 학교에 가지 않더라도 부모님은 이해해 주실 것이다. 그냥 순경 채용보다는 경찰간부후보생이 폼 나니까 그걸 도전해 봐야겠다.
노량진역은 전철을 타고 지나치기만 했지 이렇게 내려서 개찰구를 통과해 보기는 처음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역에 내려서 앞사람 등만 보며 남극 펭귄 무리와 같은 느린 걸음으로 육교를 건넜다. 육교를 내려오면 줄지어 들어선 노점의 주황빛 전구들이 오징어 잡이 배처럼 어둠을 밝혔고 토스트를 비롯한 여러 먹거리를 볼 수 있었다. 세상에 존재할법한 모든 학원은 이곳에 있나 보다. 무질서하듯 저마다의 간격을 유지하며 걷던 군중들은 하나 둘 구룡성채와 같이 칙칙한 건물 입구로 사라졌다. 나도 작은 타일로 마감된 후줄근한 건물에 들어서서 적잖은 학원비를 수납하고 교재를 받아 들어 안내받은 강의실로 들어섰다.
먼저 자리에 앉은 수강생들은 단 한 마디 말없이 시선을 자신의 책상에 고정해 둘 뿐이다. 늘 그랬듯 눈에 띄지 않을 법한 3 분단 후미쯤 자리를 잡고 교재마다 내 멋진 서명을 휘갈기고 있었다. 강의 시간이 임박하자 빈자리는 채워져 갔고 내 옆에도 뒤늦게 어떤 이가 앉아 패딩 점퍼를 바스락거렸다. 여성 수강생은 한두 명이고 나머진 남성 수강생들만 보였다. 장소만 다를 뿐 내가 다니던 대학교 공대 강의실 분위기와 흡사했다.
1교시가 끝나고 나답지 않게 옆자리 남자와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출생 연도를 비롯한 대략적인 개인정보 확인 절차를 거쳐 전화번호도 주고받았다. 점심 식사는 당시 전형적인 고시식당으로 식권을 끊고 들어가 대형 밥솥부터 시작해 매끼 틀린 그림 찾기처럼 미세하게 변화를 주는 반찬들까지 직접 퍼 담는 자율배식 시스템이다. 나보다 한 살 형인 옆자리 남자와는 이처럼 매일 강의를 듣고 식사를 함께 했다. 마치 고3 시절 못잖게 몇 개월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꽤 성실하게 수험생활을 이어갔다.
석 달쯤 지났을까, 언제나처럼 내 옆자리에 앉던 형이 학원을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경찰보다는 금융계로 노선을 변경해 취업 자리를 노려보겠다는 그는 그렇게 시절 인연이 되어 사라졌다. 소소하게나마 대화를 나누며 함께 학습했던 이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의외로 내 수험생활에 작은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종일 침묵으로 일관하며 학원을 오르내리기가 아프도록 고독했고 꾸역꾸역 씹어 삼키는 고시 식당 밥은 소화도 잘되지 않는 느낌이다.
서서히 냉기가 걷히며 내가 항상 서 있던 송내역 서울 방향 1-1 승강장 쪽 아침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사람들의 겉옷은 조금씩 얇아지고 피어나는 꽃처럼 색상도 화려해졌다. 이상하게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마주쳐 신도림역에서 내리는 이름 모를 여학생도 밝은 옷차림으로 바꿔 입으니 연예인 못잖게 예쁘다. 만원 지하철에서 그녀와 딱 붙어 5cm 정도의 공간만 남기고 치일 적에 혹시 내 숨결이 불쾌하게 하진 않을까 싶어 부자연스럽게 신도림역까지 고개를 옆으로 꺾다가 담이 오기도 했다.
그간 눈길이 가지 않던 열차 차창 너머로 암흑 속에 잠겨 있던 곳곳의 풍경들이 여명과 함께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지나치는 오래된 연립 주택부터 낮은 상가, 구일역을 통과하는 안양천까지 새삼 아름답게 느껴졌다. 콧속에 한가득 불어드는 꽃가루는 사람을 미치도록 설레게 한다. 본분을 망각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 봄 소풍이라도 가고 싶다.
학원을 마치면 부평행 직통열차의 좌석을 확보해 지친 육신을 기대고픈 욕망이 앞설 때가 있다. 일부러 서울 방향 열차에 올라 한강 철교를 건너 용산역에 멈춰 서면 플랫폼 맞은편에 부평행 직통열차가 대기 중이다. 호다닥 뛰어가 출입문 쪽 자리에 앉아 안도하며 크롬 도금된 봉에 몸을 기대 본다. 학원을 그만둬야겠다. 인터넷 강의도 있고 유명 강사의 수업 과정은 카세트 테잎으로도 출시되었으니 부족한 부분은 그렇게 메꾸어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친김에 신도림역에 내려 2호선을 갈아타 신림역으로 향했다. 당시에 친했던 친구 둘이 신림동 고시촌에서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 놈은 사법시험 준비로 작은 원룸에 있었고 또 다른 놈은 서울대 복학생으로 변기에 앉기도 힘든 기형적인 구조의 화장실을 갖춘 반지하 방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이곳의 PC방은 어딜 가든 고시생의 니즈가 한껏 반영된 최첨단 시설과 기종을 보유해서 친구들과 툭하면 들러 최신 게임인 카트라이더를 즐겼다. 모처럼 회포를 풀고 게임에 손을 대니 금방 중독이라도 된 것 같다. 인터넷 수강을 구실 삼아 용산 나진상가에서 구입한 고사양 PC에도 그 게임을 설치해 순식간에 무지개 장갑 레벨까지 진입해 버렸다. 집 근처 드림모아(現 세이브존)에 입점한 파파이스까지 홀로 찾아가 그 게임 이벤트 상품과 포인트가 주어지는 치킨 메뉴도 여러 번 구입했다.
다니던 학교에서 제적당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휴학 신청을 하러 버스-전철-버스의 힘겨운 여정을 거쳐 다시 캠퍼스를 찾았다. 신기하게도 이 학교는 인천에서도 한 시간 반, 부천에서도 한 시간 반이 소요된다. 주안역에서 학교로 향하던 1번 마을버스는 511번으로 변경되어 있었고 마침 버스 안에 앉아 있던 고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인 친구 N을 만났다. 친구 N은 나더러 복학은 언제 하냐며 물었고 난 어린 마음에,
“이딴 우울한 학교는 네가 내 몫까지 열심히 다녀줘.”
하곤 하차했다. 그렇게 영영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친구 N은 몇 년 후 같은 회사 같은 팀의 입사 선배로 마주하게 됐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내게 봄바람 헛바람이 불어들 때부터 나의 수험생활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신림동 고시촌에 사는 것처럼 툭하면 그곳을 활보했고 혼자 자기도 벅찬 공간에서 그들의 이불을 나눠 덮으며 신세를 졌다.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순간을 찍어둔 여러 장의 사진은 싸이월드에 담아뒀는데 지난 2009년 사귀던 연인과 단교하자마자 홧김에 계정 탈퇴를 해버린 관계로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내겐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 희귀하다.
볼 때마다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던 우리 집에 들어서면 전과 다르게 아빠와 자주 마주쳤다. 아빠는 역시 전에 보지 못했던 수심 가득한 얼굴로 내게 "공부는 잘돼 가냐?" 거나 "정말 모든 걸 걸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그때는 잘 들리지 않던 것들을 나보다 더 합격이 간절한 듯 담아 말씀하시곤 했다.
아빠와 이복형제인 둘째 큰 아버지와 5촌 당숙부는 청주시에 아주 큰 건물을 신축하기로 했고 그 지하에서는 대형 찜질방을 운영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있었다. 이들은 건축 자금이 부족하자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현금이 많지 않았던 아빠는 한사코 거절을 했는데, 아빠와 골프를 자주 치는 돈 많은 이들로부터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해서 현금을 몇 개월만 융통해 주면 이자까지 쳐서 되돌려주겠다며 두 번 세 번 부탁해 왔다.
아빠는 숱한 밤을 잠을 못 이뤘다. 끝내 엄마에게 인감도장의 위치를 물었고 놀란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장을 찍음으로써 골프 지인들로부터 큰돈을 빌려왔다. 그저 어른들 사이의 일로만 여겼다. 그 일렁이던 물결이 우리 가족의 삶과 나의 인생까지 집어삼킬 해일이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