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을유년

유실

by 김동의

고관대작의 집무실에서 볼법한 기나긴 책상 위에 놓인 내 PC는 좀처럼 꺼질 줄을 몰랐다.


형법부터 행정학까지 하루치 강의 영상을 시청하다 보면 여덟 시간이 훌쩍 흐른다. 저작권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던 시절, 강의 영상이 흐르는 동안 소리바다나 Pruna를 통해 다운로드 중인 영화는 하필 그 파일만 전송 속도가 지나치게 느려 다음날 오전은 되어야 완료될 듯하다.


새벽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태에서 모니터 앞으로 다가간다. 2개로 나뉜 파일인데 하나만 완료되고 다른 하나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 수신실패다. 다시 수신재개 버튼을 누르고 공시생과는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집에서 일상을 시작해 본다.


동생 녀석도 전역을 해서 남는 방 한 칸을 차지했다. 2년제 전문대를 의대처럼 다니느라 아직 졸업도 못했다. 그의 학교는 듣도 보도 못한 화성시의 한적한 동네에 위치했는데 15년 후에야 신축 아파트에 입주하고 배우자와 산책 겸 동네 탐방을 하다가 우연히 녀석의 학교를 마주하게 됐다. 부천시에서 이곳까지 통학하는 것만으로도 고된 여정이었겠단 생각을 비로소 해봤다.


여느 날처럼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다 보면 인기척이 느껴진다. 뒤를 돌아보면 홱 숨어버리지만 동생 놈이란 것쯤은 알 수 있다. 그의 방에 없는 PC를 만져보고 싶어서 기웃대는 것이다. 허락을 해주면 신나게 달려와 그만의 플레이 리스트를 CD로 굽거나 게임을 한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녀석은 웬만한 게임은 다 좋아하는데 잘하는 게임은 더럽게 없다. 흰색 난닝구만 입고 모니터에 집중하는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명절도 휴일도 아닌데 청주에서 한참 건물을 올리고 있다던 5촌 당숙이 우리 집에 와 있었다. 당숙은 내게도 미안하게 됐다는 말을 했고 곁에 서 있던 아빠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그땐 전혀 몰랐는데 그 당숙의 실수로 인해 우리 집의 전 재산을 잃게 됐다는 비보가 전해지던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모조리 켜 두었던 거실 전등은 유독 반짝이며 눈이 부셨다.


둘째 큰아버지의 집요한 요구로 아빠의 골프 메이트로부터 집을 담보로 한 큰돈을 마련하여 빌려드렸는데 그 당숙의 트롤링에 가까운 오판으로 인해 모든 게 사라졌다. 이복형제 사이라도 그 흔한 차용증이나 각서와 같은 문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수첩의 여백이나 빈 모눈종이에 집 평면도를 그리곤 했다. 마누라와 자식 때문에 항상 공동주택에 머물렀지만 마음은 늘 전원주택에 있었나 보다. 아빠만의 평면도가 꽤 축적됐을 때 즈음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집 짓기에 적당한 토지도 얻게 됐다. 그곳에 그토록 원했던 그림 같은 집을 지어 5도 2촌의 삶을 꿈꿨으나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다.


언젠간 동생에게 증여하겠다는 생각으로 마련해 둔 구로구 고척동 123 전자타운 상가 자리도 역시 신기루처럼 사라져야 했다. 아빠의 가느다란 에쎄 담배꽁초가 점점 늘어갈 무렵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44평의 아파트도 헐값에 처분해야만 했고 동생 녀석은 자기만의 방을 얻어 좋아할 겨를도 없이 짐을 빼내 이삿짐을 꾸렸다.


아빠는 주거비가 적게 드는 시골이나 위성 도시의 변두리로 이사할 집을 알아봤는데 엄마는 정기적인 갑상선암의 추적 검사와 본인의 건강관리를 이유로 들어 반드시 부천 상동에 남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렇게 그리 멀지 않은 동네에 위치하고 비싼 월세를 부담해야 하는 리파인빌 주상복합건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됐다. 이삿짐 아저씨들이 짐을 옮겨 싣는 동안 엄마는 소수 정든 이웃들 옆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부쩍 면적이 줄어든 집에 기존의 살림살이를 테트리스하듯 배치해 봤지만 역부족이다. 나와 동생의 대형 사진, 양주들, 당장 사용하지 않을 귀한 그릇들, 스키 장비와 같은 부피가 큰 물건들은 둘째 큰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청주 건물의 유치권 행사 목적으로 빈 공간에 두었다. 어느 날 물건들을 살피러 보관 중인 장소로 가봤더니 양주를 비롯해 값나가는 물건들은 전부 사라졌고 쓰나미라도 훑고 간 집처럼 그릇들은 깨져 나뒹굴었으며 가족사진은 누군가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둘째 큰아버지의 술도 못 하는 집이 그깟 술 없어진 것쯤이야 했던 반응이 비수처럼 날아드는 듯했다.


전자회사 출신답게 아빠의 자부심이자 트로피처럼 들여놨던 천만 원 상당의 커다란 스피커는 그 웅장한 목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하고 중고거래를 해야만 했다. 구매자의 입이 귀에 걸렸다던데 당근 앱이 그 시절 있었다면 찬사 가득한 후기로 후끈 달궈졌을지도 모른다.


아비의 그런 속도 모르고 난 1인분을 하지 못했다. 스톱워치로 순수 학습 11시간을 찍으며 나름 성실히 임했던 공시생의 일상은 이 시기를 전후로 유지되지 못했다. 새로 바뀐 집 터를 문제 삼아보려다가 다른 적절한 핑곗거리를 찾아보려 해도 본질적인 원인은 나약하고 게으르며 공감 능력이 현저히 결여된 나에게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프도록 낯선 이사 후에 동갑내기 사촌(위에 등장한 둘째 큰아버지 쪽)에게 부쩍 연락이 왔다. 어릴 적부터 늘 친하게 지내왔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오랜만에 얼굴을 볼 겸 조우했다. 만남의 장소는 홍대 앞으로 기억하는데 가수 김장훈과 같이 독특했던 그의 패션은 너무나 수수해졌고 이상하리만치 모든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웠다. 무심결에 툭 튀어나오는 나의 비속어나 은어를 발견할 때마다 그는 흠칫 놀라며 하늘에서 조상님들이 다 듣고 계시니 언행을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줬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음은 역시 조상님의 은덕의 결과이며 후손 입장에서 그들에게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함을 역설했다. 그렇게 간단히 놀고먹다 헤어질 줄 알았는데 그는 자못 진지한 눈빛으로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다며 당장 이동하자고 했다. 숱하게 밟아본 서울 땅 중에서 단 한 번도 발을 디딘 적 없는 7호선 중곡역까지 제법 긴 시간을 들여 이동했다.


어둑해질 무렵이어서 그런지 처음 밟는 동네가 칙칙하게 느껴졌다. 우린 중곡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상가 건물로 올랐고 목적지의 현관문을 열자 그는 전에 보이지 않던 단호한 눈빛으로 이곳에서는 매우 정숙해야 하고 차례 지내듯 손을 앞으로 모은 채로 발소리를 죽여 이동해야 한다며 당부했다. 절도 아니고 점집도 아닌 전통 방식의 미닫이문이 많았던 그곳에서 마주쳤던 몇몇 어른들은 하나같이 낯빛이 어둡고 칙칙한 게 부유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사촌은 그들을 만날 때마다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내게 우리의 조상님들께 치성을 들여야 하고 의식을 치르기 위해선 환복이 필요하다며 빈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방에는 새하얗고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한복 한 벌이 준비되었고 환복 후 또 다른 방으로 이동을 했을 땐 매우 어두운 곳에서 한 쌍의 남성과 여성이 역시 한복을 입은 채 나를 맞았다. 촛불에 의지해 간신히 사물과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 방에는 큰집에서나 볼법한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다. 조금 겁이 났지만 조상님들을 위해 제를 올린다고 하니 순순히 그들이 하라는 대로 절을 올렸다. 절을 하는 동작도 내가 그간 알던 평범한 방법이 아니라 엄격하게 정해진 그들만의 예법에 따른 듣도 보도 못한 방식이었다. 두 팔을 위로 뻗어 하늘의 기운을 모으는 동작 2회 정도... 그리고 수그려 땅의 기운을 모으는 동작도 2회 취한 후 절을 올렸고, 이런 절은 한 곳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어서 다른 스팟으로 이동할 때에는 꽃게처럼 옆으로 보폭을 짧게 하여 여러 차례 스텝을 밟아야만 했다.


그렇게 수차례 절을 하니 내 몸은 하얀 한복 속에 갇힌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한 시간가량 지나 의식은 끝이 났고 식을 진행하던 남자가 제사상에 있던 스테인리스 그릇을 내게 내밀더니 마시라고 했다. 그릇에 담긴 것은 원래 수돗물인데 내가 치성을 다 해 절을 올렸다면 물 맛은 분명 다르게 변해있을 것이라고 설명하며 후기를 듣고 싶어 하는 눈치다. 나는 “그냥 수돗물 맛인데요?” 했더니 그 남녀는 적잖이 실망한 듯 수고했다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사촌은 이 의식을 준비하는 데에도 많은 준비가 필요했고 내게 성의를 표해야 한다며 내가 얼마를 내놓아야 할지 머뭇거리는 동안 가급적 가진 모든 것을 내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내 지갑에는 오천 원뿐이라고 했더니 그거라도 달라며 받아갔다.


그렇게 빠져나온 바깥은 의식을 치르던 방과 다름없는 어두운 밤이 되어있었고 중곡역에서 송내역까지 먼 길을 넋이 나간 채로 이동했다. 사촌은 내 동생에게도 집요하게 연락을 해왔고 동생은 내가 갔던 중곡동이 아닌 경기도 여주시의 본진까지 다녀왔다는 후문을 전했다. 아... 내가 알던 이들이 항상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지 않는 것 같아 서글프다. 이 시기를 전후로 아주 가까웠던 사촌들과 연락을 끊다시피 했다.




인천에 거주할 적에 같은 동네에 살며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 같은 대학을 다니는 친구 K 네 집도 우리 집이 부천 상동으로 이사 올 시기에 인근 신축 아파트로 이주했다. 공시생의 삶에 균열이 갔던 시점부터 부쩍 K와 만남이 잦아졌다. K는 군대 대신 병역특례업체로 군 복무를 대신했고 그 덕에 좀 더 자유로운 사회에 남아 차곡차곡 IT 분야의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K는 나를 포함한 친구들이 모두 군대에 징집됐을 때 홀로 사회에 남아 퇴근 후엔 인천 관교동에 있는 다이아나 나이트클럽(현재 폐업) 보조 웨이터 일을 했다. 그는 직장 생활에 필요하다며 집으로부터 삼성자동차 SM5를 요구해 큰 어려움 없이 얻어냈다. 그렇게 날개 달린 호랑이처럼 나이트클럽부터 인천 일대를 종횡무진 누리며 방탕하게 살았다. 그의 절제되지 못한 삶은 음주 운전으로도 이어져 차량이 반파되는 큰 사고를 겪고 잦아들 줄 알았으나 타락의 길로 다시 발을 들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밤이 깊었는데 문득 동네 PC방에서 잠시 볼 수 있겠냐는 K의 전화가 걸려왔다. PC방에 먼저 앉아 있는 그의 자리엔 커다란 여행 가방이 두 개나 놓였다. 그는 집에서 쫓겨났다며 이 가방을 우리 집에 보관해 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해왔다. 음주 운전으로 인한 폐차 사건이 원인이었다. 가방은 응원용 야광봉으로 가득했는데,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백화점 종업원에게 카드대금을 빌렸다가 채무 독촉에 시달리던 그는 콘서트장 앞에서 이것들을 판매하여 얻은 수익으로 그녀에게 매달 송금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고 했다.


이틀이 멀다 하고 K를 만났다. 버스를 탈 때에도 돈이 없다며 기사님께 '나중에 드릴게요~' 하는 그의 터무니없는 시도가 먹혀 놀라웠다. 송내역에서 내가 승차권을 넣고 통과하려던 찰나 내 뒤에 합체라도 하듯 찰싹 붙어 2인 1조로 개찰구를 한 번에 지나는 묘기도 선보인다. 한동안 궁상스럽게 지내던 K는 노래방 도우미 사업을 기회로 개인 채무와 카드빚을 전부 청산하곤 다시 병역특례업체 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K를 보곤 아빠가 말씀하셨다.


"쟨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겠다."


경제적으로 숨통이 트인 K와 가난한 공시생 신분의 나는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는 나가사와와 와타나베처럼 밤의 세상을 탐닉하며 공허한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밤은 화려했지만 빛나는 순간은 없었다. 이성을 접하며 자연스레 시험 준비엔 소홀해졌다. 부쩍 노쇠해진 어깨에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가족들을 건사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고군분투 중이던 아빠 가슴에 어느 순간 대못질을 하는 후레자식이 돼있었다.




한때 넉넉한 사모님으로 지내던 엄마의 씀씀이는 좀처럼 줄어들기가 어렵나 보다. 300m도 안 되는 사우나나 헬스장 출입을 위해 매일 그랜저 XG의 엔진을 돌렸고 헬스장과 연결된 백화점에서 모든 것을 구입했다. 대체 어디에 어떻게 바르는지 알 수 없는 쉬크하게 각진 샤넬 화장품들은 크고 작은 빌딩 숲을 이뤘고 딱히 요구하지는 않았는데 백화점 버커루 매장에서 내 옷 몇 벌을 구입해오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4년간 그랜저 XG 윈드실드에는 현대백화점 쟈스민 회원 스티커가 공고하게 부착되어 있었다.


집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빠와 엄마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아빠는 경력을 살려 하이얼 국내 지사에 고문 역할로 근무하면서도 본인을 위한 씀씀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가끔 옷이나 신발이 필요할 때면 동네 세이브존 매대에서 1~2만 원에 판매 중인 개체를 구입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 집의 카드 빚은 줄지 않고 눈덩이처럼 불어나 8천만 원에 육박했으니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다.


첫째 큰아버지는 소유하던 전답을 처분하고 이복형제인 삼촌들도 십시일반 현금을 보태 그 빚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눈물 나게 고마운 도움이었지만 그 소비의 상당 부분이 엄마에 의한 엄마를 위한 지출이었음을 아는 분은 없을 것이다. 아빠와 돈으로 인한 다툼이 있을 때면 엄마는 항상 나를 이유로 들곤 했다. 내 교육비와 통신비를 꼭 언급하며 아빠를 세상 물정은 눈곱만큼도 모르는 사람으로 몰아세우곤 했다.


어느 날에는 자신의 씀씀이를 전과 다르게 줄였다며 억울해하기도 하고 그러게 청주 건물에는 왜 돈은 빌려줘서 이 고생이냐며 아빠의 속을 긁고는 오히려 본인이 괴성을 지르며 엉엉 울어댄다. 누가 보면 비정한 가장에 의해 구박받는 기구한 여인의 절규로 비칠 듯하다.


도에 지나치게 느슨한 공시생의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가 이 짓을 더 지속했다간 더욱 피폐해질 것만 같았다. 1년만 더 해볼까 하는 엄두도 못 내고, 합격선 근처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내 실력을 뻔히 알면서도 집에 빌붙을 명분을 세우기 위해 책상머리에 붙어 앉는 모습을 연말까지 유지했다.


다른 친구들 같았으면 시험 합격을 위해 박차를 가하거나 생계에 즉각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새로운 루트를 확보했을 텐데 나이만 성인이었던 애송이는 2005년의 끝에 서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2005년 타본 전동 바이크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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