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 나올 여자
드디어 나도 연애다운 연애를 하게 되었다. 긴가민가 견디기 힘든 애매모호함에 맘 졸이는 썸도 짝사랑도 아닌 쌍방 간의 명확한 의사표시에 의해 시작된 그런 만남을 한국 나이 스물여덟이 되어서야 갖게 됐다. 나보다 여섯 살 어린 그녀는 이대 국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2호선 신촌역과 이대역 사이를 숱하게 활보했고 이대역 5번 출구 쪽으로 쭈욱 나가면 맞게 되는 대흥동 3-59 뷰 21 오피스텔(現 마포프레스티지 자이) 인근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봉인됐던 연애 세포가 활성화되며 어두 칙칙하게만 바라봤던 세상도 밝게 보이고 축 늘어졌던 삶에 모처럼 신선한 바람이 불어드는 것 같다. 4년 된 PANTECH&CURITEL 휴대폰도 최신형 삼성 울트라 에디션으로 바꿔보고 그 휴대기기로 창천동과 대현동에 즐비했던 카페에 가서 GATSBY 왁스로 볼륨을 준 내 모습이 함께 담기도록 셀카도 찍어봤다. 재미가 있든 없든 아트레온(現 CGV)과 경의선 신촌역 쪽 밀리오레 건물의 메가박스를 번갈아 다니며 개봉된 영화는 더 이상 볼 것이 없어질 때까지 관람했고 깜찍 발랄한 일본어 폰트로 뒤덮인 기기 안에서 스티커 사진도 꾸며보며 썰렁했던 싸이월드 사진첩을 하나하나 채워갔다.
어느 날 아빠가 우리 형제를 불러 세우더니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받으라며 거금 이백만 원씩 쥐여주셨다. 주식이든 펀드든 재주껏 불려보라는 절실함으로 담뿍 절여진 종잣돈인 셈이다. 나는 그 깊고 간절한 뜻을 미처 간파하지 못하고 동양종금 CMA 계좌를 개설해 통장 안에만 묵혀뒀고 그저 시골 강아지처럼 무구한 웃음만 짓던 동생은 그 돈을 몽땅 엄마에게 맡겼다. 공격적인 투자활동을 미처 해보지도 못하고 내 지갑은 연이은 연애 행위에 의해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다.
처음인 만큼 서투르고 의욕만 앞섰던 만남엔 최소 두 끼의 외식과 두 번의 커피 전문점 방문이 필수적이었고 서로의 사이가 익숙해질 무렵엔 온갖 야식까지 동반되었다. 그녀는 술을 즐기는 편이었는데 재정상황이 허락할 때마다 염리동 뒷골목에 있던 '황소곱창' 식당을 찾았다. 사장님이 어디 가서 이런 거 쉽게 먹지 못할 거라며 자랑스러워했던 곱이 꽉 들어찬 그 집 곱창은 탱탱하게 가득한 곱만큼 고가여서 내 CMA 잔고를 빠르게 고갈시키고 말았다.
그녀에게 내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들키기 싫어 4학년 개강에 맞춰 학교 핑계를 댈 때도 있었다. 졸업 요건을 충족시키려면 부지런히 재수강도 하고 필수 과목도 이수해야 하는데 이런 시기의 연애는 학업에 몹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도 나도 좋지 않은 성적을 받아 들면서도 마치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유희를 좇으며 살았다.
막연한 취업 걱정에 뭐라도 해 볼 심산으로 한 역학 교수님이 개설한 방과 후 CAD 활동에 용기를 내어 참여해 봤다. CATIA와 Pro-E의 툴을 학습해 보며 나름 재미도 붙였는데 심화 과정까지는 동행하지 않았다. CAD 활동 학생끼리 친목을 다져보자며 마련한 회식 자리에 불참한 후로 내 특유의 아웃사이더 기질이 그 과정으로 향하는 걸음을 주저하게 했다. 지금 돌아보니 대학원생을 모집하려는 성격이 더 짙은 모임 같아 적절한 시점에 잘 퇴장한 것 같다.
언제나 풍파 없이 순항할 줄 알았던 나의 연애활동에도 크고 작은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만나자마자 이대역 CONVERSE 매장 앞에서 대판 언쟁을 벌인 뒤 홧김에 삼화고속 1300번을 타고 집으로 향하던 중 그녀가 보내온 화해의 문자메시지에 합정역 정거장에서 도로 내려 지하철을 이용해 돌아간 일도 몇 번 있었다. 상황이 극으로 치달을 때마다 목청껏 내지르는 그녀의 고성을 듣게 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교전 상황마다 터져 나오는 낯선 부산 말씨는 왠지 더 모질게 내 가슴을 헤집어놓는 것만 같다.
성숙하지 못한 나 자신도 금방 바닥을 드러냈고 바닥인 줄로 알았던 상태에서 더욱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해 비열함, 찌질함, 비굴함, 졸렬함 온갖 추태를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미운 정 고운 정을 쌓아가며 아슬아슬하게 유지된 연애를 이어가기에도 버겁던 나는 도리어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친구 몇은 이때부터 하나 둘 결혼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상황이 그런 생각을 더욱 부추겼을 수도 있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공방을 벌이는 부모의 언쟁이 차마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혔고 어떻게든 독립을 하게 되면 이 고성과 괴성이 오가는 집구석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혼만 하면 재정적으로 미흡하더라도 어떻게든 둘이 헤쳐나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고도 무책임한 나의 제안에 그녀는 늘 같은 반응을 보였다.
“나랑 결혼하려면 최소 롯데캐슬은 있어야 해. 그리고 난 대학원에도 꼭 가야 하거든.”
대기업에 취업에 성공하게 된다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캐슬 한 칸쯤이야 어찌어찌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롯데 계열사에 채용이 된다면 직원 DC가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든 졸업부터 하기로 마음먹고 취업 걱정은 언제나 내일모레로 미뤘다. 다시 토익 공부에 시간을 들여 간신히 700점대를 넘긴 확인서를 훗날 채용 서류에 첨부하기 위해 고이 모셔두었다.
이 시기 즈음하여 나를 밤의 세계로 이끈 마성의 친구 K가 학교에 나타났다. 그는 병역특례업체를 마치고 IT 쪽 인턴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삼성 맴버쉽에 참여 중이었는데 그도 졸업장이 필요하다며 복학을 했다. 하필 재수강을 했던 화학 실험 과목에도 K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뜻하지 않게 점심 식사나 통학을 K와 자주 함께하게 됐다. 다시 <노르웨이의 숲>의 나가사와와 와타나베 꼴이 될 수는 없어서 항상 경계하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는데 급기야 K는 이대 앞까지 출몰하기 시작했다.
K의 삼성 맴버쉽 장소가 하필 이대역 5번 출구 쪽 삼성서비스센터 건물에 위치했고, 근처에서 묵을 곳을 찾다가 나와 교제 중이던 그녀와 같은 오피스텔 건물에 입주하게 됐다. 사악한 그의 기운이 나와 그녀의 사이에 해악을 끼칠 것만 같아 일부러 그녀에겐 K를 소개해 주지 않았다. 참... K도 털어내려 해도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 도깨비풀 같은 질긴 인연이다.
그녀는 진작 내가 재정적으로 개털임을 알아차렸지만 나를 내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가 부산에서 힘겹게 보내온 그녀의 월세와 생계 자금에 나까지 수저를 곁들여 무척이나 궁핍한 연애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던지 그녀는 과외를 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면목동에 사는 초등학생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2호선 이대역에서 열차에 올라 건대입구역에 내렸다. 다시 한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야만 7호선 환승 열차에 오를 수 있고 그렇게 몇 분간 더 달리면 비로소 과외 장소가 있는 사가정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소득창출 행위에 불편함이 없도록 길다면 긴 지하철 여정에 보디가드로서 동행해야 했다. 사람이 붐볐던 열차 안에서 쓸데없이 무거운 그녀의 짝퉁 프라다 가방을 들어줌으로써 그녀의 심기를 보살필 뿐만 아니라 나의 헛소리에 가까운 농담들도 정색하지 않고 받아줄 정도의 안정된 심신 상태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사가정역에 도착해 또 10분은 걸어가야 나타나는 과외 학생의 아파트 앞에서 그녀와 잠시 헤어져 근처 PC방으로 향했다. 과외를 마치면 그녀가 다시 그 PC방으로 들어와 2시간치 이용료를 계산해 줬다. 가끔은 PC방 입장 전에 내게 현금 이천 원을 쥐여줬는데, 그렇게 내가 직접 요금을 지불할 때면 어느새 내 얼굴을 외운 사장님이 “계산해 주는 아가씨 오늘은 안 와요?” 하고 묻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내 시간표가 한가한 날이면 이대 안 학생식당에서 다른 여학생들의 시선을 무릅쓰고 김밥을 먹으며 그녀를 기다리거나, 실수로 빠뜨린 노트 혹은 과제물들을 재빨리 가져가 전해주는 일을 하며 금남의 성역으로만 여겨졌던 이대 곳곳을 누볐다. 그 덕에 ECC가 들어서기 전 이대의 교내 지형지물에 꽤 익숙하게 됐다.
만나는 동안 우리는 대개 먹는 쪽에 편중된 소비를 했다. 그렇다 보니 기능적으로 그리 좋지 못한 신발을 신고 닳도록 서울 곳곳을 걸어 다닌 기억이 강렬하다. 동대문에서 청계천을 따라 명동까지 하루 종일 거닐던 때도 있고 그녀가 과외를 마치고 운동할 겸 사가정역에서 이대역까지 걸어가 보자고 했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버스에 오른 적도 있다.
여행답게 멀리 떠나본 적도 거의 없다. 태안 유조선 침몰사고로 온몸에 검은 기름을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이름 모를 바닷새가 너무 딱해 그곳을 함께 찾아가 자갈을 닦았던 때가 서울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경험이었을 것이다.
티격태격하면서도 별 볼일 없는 나와 그녀의 관계를 유지시켜 준 끈은 무엇이었을까 새삼 궁금해진다. 돌아보면 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하지 못 한 모습을 너무 보여 그때 조금이라도 결혼에 대한 여지를 주지 않았던 그녀의 태도가 다행스러우면서도 고맙기도 하고 여러모로 미안함도 많이 남기도 한다.
그래도 영화 개봉 소식을 들으면 떠올릴 누군가가, 버스에서 열차에서 뻘쭘히 서 있을 때에 연락할 누군가가, 시답잖고 저질스러운 내 잡담을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를 만나며 인연을 소중히 해야 함을 진심으로 느껴본 것 같다. 덕분에 늦게나마 많이 배웠고 깨달은 바가 적지 않다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