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무자년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by 김동의

드디어 기계공학부로 졸업을 했다. 의대도 아닌데 햇수로 10년은 이 학교에 적을 두었다가 가까스로 종지부를 찍었다. 졸업장은 손에 넣었지만 문제는 일자리다. 작년 말부터 여러 기업의 문을 두드렸으나 누구도 내 서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구직난은 숱하게 들어왔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작년 대선에선 747 공약을 비롯해 대규모 일자리 창출을 공약으로 내건 이명박 후보에 한 표 행사했다. 무척이나 단순하고 원초적인 동기에 의한 투표였다.


다음 카페 취업뽀개기, 사람인과 인크루트를 하루에도 화장실보다 몇 배는 더 자주 드나들었다. 카페 게시판에서는 승자의 흔적만 엿볼 수 있어 더욱 조바심만 앞섰다. 대기업 채용 공고는 물론 회사명이 낯선 사업장의 채용 소식에도 가능한 곳은 모조리 지원했다. 답답함에 들러본 남산의 밤하늘에선 이런 내 상황을 비추듯 도무지 별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탁했다. 별들이 고스란히 땅으로 내려와 박힌 듯 영롱한 도심의 야경을 보며 저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집들이 있는데 내가 살 수 있는 집은 없음에 서글픔이 밀려왔다. 웹사이트에서도 그에 못잖게 많은 사업장이 대한민국에 존재하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어 우울감은 두 배가 되는 듯했다.


너무 단출한 이력서를 커버해 보고자 정성 들여 작성한 자기소개서가 수 백장 쌓일 무렵 얼굴이나 보자는 기업도 극소수지만 있었다. 서류 합격 소식만으로 뛸 듯이 기쁘고 온갖 희망 회로를 돌려보게 됐다. 월급 이백만 원 이상만 준다면 개나 말의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되뇌었다. 좋았던 마음도 잠시 어렵게 참석한 면접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내가 노동자가 될 상이 아니란 말인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능력은 출중하나 제한된 TO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는 꽤 정중한 메시지가 도착해서야 미련을 버렸다.


모집 대상에 ‘대졸’ 글자만 보이면 닥치는 대로 두드렸다. 내셔널지오그래픽과 법무법인, 워커힐 커지노까지 내 전공과 아주 거리가 먼 곳일지라도 도전했다. 불안함에 이대의 그녀와 사주카페도 종종 방문했는데 크게 나쁜 것도 그렇다고 아주 흥할 것이라는 길한 해석도 없었지만 일복은 많다는 말에 작은 위로가 되었다. 이대에서 신촌으로 이어진 먹자골목을 걷다가 구둣방처럼 부스 형태로 운영 중인 사주 집도 가봤다. 아주 연로하지 않음에도 수염을 길게 기른 아저씨가 노트북을 펴고 앉아있었고 내 사주를 읊으니 바로바로 타이핑을 했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내게 힘이 되는 숫자가 있고 그 숫자로 비밀번호 설정을 해두면 좋다는 점, 기운을 북돋는 속옷 색깔과 불리는 이름이라도 바꾸는 게 유리하다는 점 정도다.


6월이 되어서야 한 기업에서 최종 면접 기회를 얻어 단숨에 창원시까지 내려가 면접관들을 알현하고 식사까지 함께 했다. 또 다른 기업에서는 삼성의 SSAT와 같은 필기시험인 H○○T를 처음으로 도입했고 기회를 얻은 나는 서강대에서 수능시험 느낌이 나면서도 IQ 테스트 같은 난해한 그 시험에 응시하게 됐다. SSAT보다는 좀 더 어렵고 두산에서 치르는 시험과 난이도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운 좋게 통과했다. 이 기업의 본진인 서울에서 최종 면접을 진행할 때에는 개인별로 준비한 100초 자기소개 스피치 외에 면접관들이 내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아 발언할 기회가 없었다. 한 면접관의 ‘최근 개봉한 인디애나 존스 4를 봤느냐’란 질문에 아니라는 답을 했을 뿐이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두 기업의 합격 소식이 전해졌고 마치 카리나냐 카즈하냐 양자택일하듯 한 곳을 선택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내 인생에 이런 날이 또 있었던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선생님께 받아 든 교사용 표준전과와 집에 구비해 둔 동아전과를 동시에 품에 안았을 때와는 비교가 안될 벅참으로 가득했다.


많은 고민 끝에 화성시에 근무지를 둔 기업을 선택하게 됐다. 신입사원 교육을 앞두고 엄마는 중동 현대백화점에서 검은색과 은갈치 정장 두 벌을 구입해 주었고 우리가 거주하던 주상복합주택 1층에 입점된 쌤쏘나이트 매장에선 어매리칸 투어리스터라는 보급형 브랜드의 캐리어 비용도 치러줬다. 눈물 나도록 고마운 도움이었지만 정장 두 벌은 엄마의 백화점 쟈스민 회원 자격을 유지하는데 괜찮은 실적으로 기여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빳빳한 정장을 입고 문자 안내에 따라 서울역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해 파주 인재개발센터에 도착했다. 나처럼 정장을 몹시도 어색해하며 캐리어를 끌던 약 108명의 동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들은 네 개 팀으로 나뉘었고 지정된 교육장으로 흩어져서 팀장을 선출하기도 했다. 인사담당자의 환영사에 이어 그의 설명에 따라 좁디좁은 강당 팔걸이 책상 위에서 수많은 계약서를 살펴보고 서명을 하느라 분주했다.


지급받은 CI 도금 배지가 새 정장 깃에 구멍을 뚫고 고정되어도 전혀 아깝지 않았고 마냥 싱글벙글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시간표 대로 진행되는 강의는 대개 애사심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이 다분해 그렇지 않아도 충과 성을 다할 나에게 더욱 허리를 꼿꼿이 세워 수강하도록 만들었다. 뭐랄까 국뽕도 아닌 사뽕에 취해 그땐 그러려니 했는데 돌아보면 우스우면서도 무리수를 두는 강의도 있었다.


‘혁신’을 주제로 진행됐던 한 강의에서는 모두에게 혁신 동작을 따라 하도록 했는데,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로 크고 씩씩하게 “고·객·을·위·한”을 읊고는 지체 없이 허리를 -10도 뒤로 꺾다시피 일어나 “혁씬!”이라고 외쳐야 했다. 큰 종이에 뭔가를 쓰고 하염없이 포스트잇을 붙여대는 강의도 많았는데 아낌없이 지급되는 사무 용품을 보고 회사 재정이 참 넉넉하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 갈수록 든든했다.


신입 교육 중


밤늦게까지 반별로 맡은 연극 준비를 했고 무더위에 야구장을 찾아 그룹사에 소속된 야구팀을 영혼 없이 응원했다. 2박 3일간 해병대 캠프에 입소해 땡볕 아래에서 유사 유격 행위를 따르고 머리 위로 보트를 이며 “무적 OO, 최강 OO!” 와 같은 회사 이름을 끼워 넣은 구호를 우렁차고 절도 있는 목소리로 수없이 복창하기도 했다. 전국 각지에 위치한 계열사 사업장이나 공장 투어를 거치느라 허리가 결리도록 버스를 탔고, 지리산 다물 교육 땐 괜히 군용 워커를 신고 가는 바람에 죽을 고생을 하며 산을 오르기도 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나는 이 회사 덕분에 돈을 버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


공식적인 교육 과정을 마치고 '연수'라는 명목으로 제주도에 있는 계열사 리조트에 머무를 때가 있었는데 비교적 신축 건물인 그곳은 내 눈에 모든 것이 웅장하면서도 세련되고 모던하게 느껴졌다. 내 지나온 삶에 이런 건물과 엮일 일이 있었나 싶다. 그곳에서 김제동이 MC를 맡고 <One More Time>으로 인기몰이를 하던 쥬얼리와 윤도현 밴드까지 초청된 야간 행사까지 진행이 되니 스스로가 무척이나 귀한 대접을 받는 듯하여 이 모든 것을 준비한 회사에 황송할 지경이었다.


제주도 연수 중


나는 연구소 소속이었기에 연구소만의 신입 교육 과정도 이어서 진행됐다. 원래 울산에 있는 생산공장에서 조립 실습이 예정되었는데 노사 간 임금교섭이 중단되고 파업이 진행 중인 관계로 부득이 연구소 자체 진행하는 실습에 참여해야만 했다.


연구소에 위치한 센터 중 하나에 소속되게 됐고 나를 포함해 단 두 명만이 그 센터의 장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나오는 길이었다. 나이가 지긋하고 주체할 수 없이 빼곡한 머리숱을 가진 분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 누군지 아냐?”

“잘 모르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머리를 후려치고 가버렸다. 우리를 인솔하던 선임연구원이 저분은 우리 센터의 C 실장님이니 다음부터는 인사 잘하라고 하셨다.


그런 와중에 팀 배치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날씨에 나 홀로 시꺼먼 정장에 넥타이까지 꽉 매고 들어선 사무실은 이상하게 한산했다. 먼저 인사를 올릴 팀장은 회의실에서 연구원 대상으로 히틀러 못잖게 호소력 짙은 연설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연구원 직급은 수습을 벗어남과 동시에 labor union 조합원 자격을 얻는데, 최근 노사 대표 간 이뤄낸 ‘임금교섭 잠정합의안’의 조합원 찬·반 투표를 앞두고 팀장은 팀 내 연구원 전원을 모아 회사의 위기 또는 세계의 불확실성에 대해 열변을 토해내고 있던 것이었다.


내가 회의실에 쭈뼛쭈뼛 입장하자 머리가 희끗한 팀장은 부당노동행위를 마무리 짓고 나더러 온 김에 이곳에 앉은 선배 연구원들에게 자기소개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나는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디에 사는 김 아무개올시다.' 하는 중에 팀장이 말을 끊고 너무 진부하니 좀 색다르게 하라는 추가 요구를 해왔다. 신기하게 이 팀에는 나의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 동창인 친구 N(2004년 휴학을 하러 가는 길에 버스에서 마주친 N에게 이따위 학교 너나 열심히 다니라고 했던 그 N이다)이 1년 먼저 입사를 한 상황이기에,


“저는 N 연구원 하고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고요. 잘 부탁드리는데, 우리끼리 보증은 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소개를 마치자마자 짧게 흘렀던 정적을 깨고 팀장이 “저 말은 분명 아픔이 있는 말일 게다.”하며 이 난감한 분위기를 수습했다. 머지않아 임금교섭이 타결되었고 우리 동기들은 막 입사한 관계로 보상에 대한 기대는 거의 없었으나 아주 이례적으로 모든 성과금을 지급받게 되었다.


이게 웬 목돈이란 말인가! 엄마에 대한 감정은 썩 좋지 않았지만 그간 빌붙은 것도 있고 입사 전에 정장 두 벌과 캐리어는 마련해 줬으니 일부 송금해 주고, 추석 명절 땐 아빠에게 현금이 담긴 봉투를 내밀기도 했다. 카풀로 큰 집에 향하던 스타렉스 승합차에서 다른 친척들 몰래 그 봉투를 드렸는데 아빠는 그게 그렇게 좋았는지 만면에 미소를 띠며 평소와는 달리 자랑을 늘어놨다. 모처럼 보는 아빠의 밝은 모습에 스스로가 참 기특했다. 주 2회 이상 꼬박 나의 PC방 이용료를 계산해 주고 배곯지 않도록 힘써준 그녀도 신촌 현대백화점에 데려가 그간 못해준 선물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런 뿌듯함도 잠시 엄마는 무분별하게 사용한 신용카드와 백화점 카드로 채무에 허덕이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사채에도 손을 댔다. 엄마는 이 모든 게 나를 포함한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 소비하다 보니 빚어진 일이고, 내게 대출을 알아보라고 했다. 연구소 신입 교육과정을 마치자마자 우리은행으로 향했고 실적은 없었지만 재직증명서 하나로 어렵게 신용대출 4천만 원을 받아 집안에 번진 급한 불을 껐다. 이자는 아빠의 급여에서 내준다고는 했으나 원금에 대해서는,


"언젠간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라며 내가 걱정 내지는 불만을 표할 적마다 엄마는 말했다.


첫 성과급 몇 백만 원이 그토록 크게 느껴졌는데 -4천만 원이라니 언제 다 갚고 언제 돈을 모아 언제 롯데캐슬을 사라는 것인지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한국장학재단에서 받은 학자금 대출도 오롯이 내가 짊어질 짐이어서 내가 원했던 30대 이전의 결혼은 어렵게 됐음을 직감했다. 동기 중 누군가는 공격적으로 레버리지를 일으켜 부쩍 하락한 주식을 줍줍하고 있으니 이때부터 그들과의 자산 격차는 점증적으로 벌어졌으리라 여긴다.


리먼이란 형제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지만 걔네들 때문에 세계가 휘청인다고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청운의 꿈을 품고 막 입사한 우리 회사에서도 희망퇴직 노란 봉투를 돌리고 있고 할당된 실적을 채우지 못한 보직자 입장까지 어려워질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취업 성공으로 잠시 기쁘다가 미지의 두려움이 나를 잠식했다.


그랬던 회사 안팎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팀에서는 배치를 받고 난 이후 거의 매일같이 회식이 있었다. 배치 첫날에도 어김없이 회식이 있었는데, 이를 위해 고깃집에서 퇴근 시간에 맞춰 연구소 후문에 보내온 낡은 프레지오 승합차 4열 구석에 아직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팀원들에 밀려 구겨지다시피 탑승했더니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회식 장소는 삼겹살집이었고 무척이나 눈치를 보던 나는 숯불이 들어오자마자 집게를 집어 들었는데 앞에 계시던 분이 신입은 그러는 거 아니라며 내 손에 있던 집게를 가져갔다. 나 홀로 정장 차림으로 앉아 뭐라도 해야 이 뻘쭘함이 가시겠는데 다행히 앞에서 옆에서 그리고 대각선에서 사람들이 말을 걸어온다.


몇 살이고 어디 사냐?

N 연구원 하고는 언제부터 동창이냐?

그 귀걸이는 진짜냐? 금이냐?


고기와 술이 들어오자 한 연구원이 벌떡 일어나 행사를 진행하듯 회식의 취지를 언급하고 오늘은 거의 정시 퇴근이 보장되는 ‘가정의 날’ 수요일이지만 즐겁게 참여하자며 몇 명을 지명하여 회식 분위기를 고취시킬 한마디와 건배 제의 따위를 시키는데 난 이런 공기가 몹시 낯설고 불편하기만 했다.


한 머리가 휑한 선임연구원 한 분이 내 앞으로 와 불쑥 소주잔을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근처에 있던 소주병을 집어 들어 따라줬는데 매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회사의 회식 분위기를 잘 몰라 벌어진 해프닝이었는데, 그렇게 술잔을 내밀면 내가 받아 들고 내민 상대가 술을 따라주면 원 샷으로 비우는 즉시 그 잔을 상대에게 돌려줘 술을 따라주는 것이 이곳의 암묵적 룰이었다.


배정된 그룹에서도 연이어 회식을 진행했고 회식 차량에 승차하기에 앞서 내게 ‘여명 808’ 캔을 내미는 연구원도 있었다. 꼭 마셔두라는 말과 함께. 홍콩차우라는 중식집에서 그룹 회식이 진행됐는데 그룹장은 시작부터,


“여러분! 이 회사에서 술을 못하면 성공할 생각 마십쇼!”


하는 드립을 치며 맥주잔에 소주를 섞어 돌려댔다. 음... 난 이미 성공하긴 글렀구나 싶었다.


팀 회식에 그룹 회식에 또 팀 회식이 잡혔다. 이번엔 현장 기술직까지 대거 참여하는 협의의 의미의 팀 회식이다. 횟집에서 진행되는 회식의 타이틀은 처음에도 어제도 오늘도 ‘신입사원 환영회식’이었고 주인공은 내가 되어 그룹장과 대각선 방향으로 앉게 됐다. 사회자가 아직 팀장이 오는 길이라며 먼저 주린 배를 채워도 된다는 멘트를 치자마자 앞에 그리고 옆에 앉은 그룹장들이 경쟁하듯 소맥을 말아 잔을 내밀었다.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이어서 이름 모를 현장 직원도, 다른 선임연구원도 같은 잔을 내밀어 섭섭지 않도록 똑같이 비워줬다. 이미 얼굴은 붉게 물든 노을 바라보듯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곧 팀장이 횟집에 도착했고 조금 전까지도 사무실에서 한참을 팀장과 같이 일했던 팀원들은 마치 오늘 처음 팀장을 마주하는 것처럼 젓가락질을 모두 멈추고 일동 기립했다. 팀장이 내 앞에 앉자 비로소 일어섰던 이들이 착석했다. 이런 조폭 비스름한 행태 못잖게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 회식 속 행사는 팀장부터 시작된 거룩한 말씀들이 이어졌고 금방 종료될 것 같다가도 별안간 듣도 보도 못한 '충성주' 신고식을 하겠다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와 친구라는 이유로 또 N 연구원이 불려 나와 신고식의 시범을 보였고, 그 방법은 7부 정도 담은 맥주잔 위에 젓가락 한 짝을 소주잔 하부 지름에 살짝 못 미치도록 받쳐두고 또 그 젓가락 위로 가득 담은 소주잔을 올린 후 이마로 테이블을 내려쳐 소주와 맥주가 섞이도록 하는 재미도 감동도 없는 악습이었다. 속은 울렁거리고 얼굴은 화끈거려 죽겠는데 순간 부아가 치밀어서 이왕 테이블에 헤딩할 거 화끈하게 하려고 횟집 복도와 좌식 마루의 경계를 나누고 있는 목재 난간에 올라섰더니 사람들이 그건 아니라며 황급히 나를 끌어내렸다.


신고식 술까지 비우니 도저히 앉아있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위태로웠다. 잠시 빈 방에 가서 쉬라는 선배 연구원의 말을 듣고 눕자마자 정갈했던 노란 장판 위로 연거푸 구토를 했다. 술과 함께 삼켰던 각종 생선회 조각들이 장판 위에서 치어처럼 파닥이는 듯했다. 고맙게도 선배 연구원들이 투입돼 난장판을 수습했다.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은 나를 독신자 기숙사로 데려다주겠다는 명분으로 평소보다 일찍 회식자리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 N 연구원은 택시 안에서도 다시 한바탕 쏟아낸 나의 토사물을 두 손으로 받아내느라 오히려 고초를 겪게 됐다.


충성. 누구에게 충성하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난 이 회사에 충성하고자 했건만 팀장이나 파트장이 회사인 양 팀원들의 충성을 바라고 있다. 짐이 곧 국가라고 떠들어댔던 루이 14세와 같은 이들이 이곳에 너무 많아 보였다.


회사일은 아직 배우지도 못했는데 이 조직은 회식만 한다.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사전에 예고된 회식도 있었지만 즉흥적인 회식도 많았다. 사무실이 위치한 화성시에서 벗어나 갑자기 평택시까지 가서 꿩고기 회를 안주 삼는 회식도 있었고 아무런 숙박 도구 없이 금요일 오후에 나를 차에 태워 목포 선상 갈치낚시 행위에 동참시키기도 했다. 2008년 하반기에 실시된 회식만으로 초기에 품었던 청운의 꿈 따위는 꽃게나 줘 버렸고 술을 못한다는 호소에도 무시하며 ‘자꾸 하면 늘어~^^’하며 집요하게 내게 잔을 들이미는 이곳 분위기에 반감만 쌓여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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