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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동윤 Feb 24. 2023

당신이 먹는 '즐거움'은 무엇인가요

음식이 주는 의미를 곱씹어 보며


 

 바야흐로 ‘맛’의 전성시대이다. 소위 ‘핫플레이스’들의 중심엔 ‘맛집’들이 있다. 이제 데이트 코스에서 ‘맛집’은 필수가 되었고, 오마카세에서 즐기는 식사는 성공과 행복의 대명사가 되었다. ‘먹방’은 어엿한 주류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최근 몇 년간의 트렌드를 보면, 정말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이 농담 같지가 않다.


 어느덧 대학교에선 시조새를 넘어 원시 고미생물의 나이가 된 나지만 그래도 범위를 넓게 잡는다면 나는 여전히 어린 축이다. 그래서 이런 트렌드를 한가운데에서 부쩍 실감하고 있다. 특히 ‘여사친’을 만나러 가거나 소개팅 자리에 나가면 맛집을 알아보는 것은 의례 행사가 되었다. 때로는 내가 찾은 카페나 식당이 나의 센스를 측정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날도 ‘여사친’과 만나기 위해 성수의 한 카페에 들렀다. 은은한 아이보리 바탕의 편안한 분위기를 가진 카페였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으니, 5분 후에 그녀가 도착했고 우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는 곧장 메뉴를 주문했다. 늘 그랬듯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녀는 지금도 ‘초코 머시기’였던 걸로만 기억나는, 아랍권 축구선수들만큼이나 긴 이름을 가진 음료를 시켰다. 평범한 머그잔에 나온 내 아메리카노와는 달리, 그 ‘초코 머시기’는 족히 텀블러 정도는 되어 보이는 높이의 잔에다 하얀색 거품 위에 데코를 한껏 올린 채 나왔다. 그녀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는지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셔터를 눌러댔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모양새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뿐히 입술을 얹더니, 곧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거기에 더해 성격만큼이나 발랄한 추임새로 그녀는 ‘즐거움’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내게도 한 입을 권했다. 단 음식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 나로서는 결과가 어떨지 뻔히 예상됐지만, 호의를 거절한 순 없었기에 권유를 받아들였다. 맛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간지러웠다.’ 입에 빨아들이는 순간 달짝지근한 크림이 혀 주위로 스며들며 혀를 간지럽혔다. 이내 간지럽혀진 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초콜릿이 끈덕지게 혀를 녹였다. 뭐랄까, 혀가 가진 말초신경을 있는 대로 자극하기 위해 훈련된 저격수 같았다. 


 오늘날 인기를 끄는 음식들은 바로 이 ‘저격수’들인 것 같다. SNS만 봐도 눈이 어지러울 만큼 형형색색의 색으로 치장한 ‘저격수’들의 사진이 식욕을 자극하고 있다. 그들의 맛 또한 색만큼이나 자극적이다. 시쳇말로 ‘단짠단짠’의 향연이다. 사람들은 그 ‘저격수’들이 제공하는 ‘단짠단짠’한 자극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 같다. 하지만 혀가 둔해서일까. 나는 좀처럼 맛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겠다. 물론 기분이야 좋다만, 그렇다고 맛보는 순간에 ‘즐거움’이라고 부를 만한 비일상적인 감정이 올라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먹고 난 뒤에도, 그 음식의 맛이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




 나는 외려 ‘맛’보다는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딱히 특별하다고 할 것 없는 토란대는, 내게는 먹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특별한 음식이다. 내가 처음 토란대를 먹어 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의 추석 때였다. 그해 우리 가족은 추석을 맞아 외할아버지의 고향인 교동도로 다. 당시 교동도는 지금과 달리, 육로로 이어져 있지 않고 강화도에서 15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만 했다. 그런 시골 중의 깡시골은 처음이었던 나는 교동의 모든 것이 그저 신기했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연상되는 논의 풍경과 황금빛 저녁놀, 그리고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대룡리 시장까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큰할아버지 부부는 생전 처음 보는 우리를 따듯하게 맞아 주셨다. 특히, ‘황길녀’라는 아주 예스러운 이름을 가지셨던 큰할머니는 나를 친손자처럼 대해 주셨다. 이미 여든이 넘었었던 노파는 그로부터 10여 년 전 당한 교통사고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음식도 거진 맏며느리가 도맡아 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도 큰할머니는, 내게 연신 언제 또 시골 음식을 먹어보겠냐며 그 불편한 몸을 꾸역꾸역 이끌고 와 내 밥 위에 손수 반찬을 올려 주셨다. 주로 시골 나물들이었는데, 그중 가장 자주 올려 주셨던 음식이 바로 토란대였다.


 그로부터 5년 후, 큰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몇 년 전, 교동에 들를 일이 있어 큰할머니의 무덤을 찾았다. 볼품없는 비석에 ‘황길녀의 묘’라는 짧은 문구만 몇 마디 쓰여 있었다. 그녀와의 인연도 그 문구만큼이나 짧았지만, 그때의 기억과 큰할머니는 토란대를 먹을 때마다 내 안에서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 기억은, 가슴 한가운데가 무겁게 침전하면서도 그 온도는 따듯해지는, ‘즐거움’이라고 부를 만한 비일상적인 감정을 선사한다.


 어떨 땐 ‘즐거움’보다는 ‘쓰라림’에 가까운 감정이 올라올 때도 있다. 주로 허름한 동네 분식집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한창 손님맞이로 바쁜 저녁 시간 즈음 분식집을 들르면, 아주머니들은 김밥을 써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서 이따금 손질이 잘못된 김밥을 먹을 때가 있다. 다 썰리지 못한 채 엉겨 붙은 김밥을 먹을 때, 나는 괜히 기분이 쓰라리다. 삶의 속도에 쫓겨야만 하는 사람들의 팍팍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없이 이어지는 칼질은 생존에 대한 그들의 절박함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쓰라림’도 내겐 ‘즐거움’이다. 내 자신이 사람답다는 느낌을 받게 해 주기 때문이다. 쓰라림의 감정은 나를 낯 모르는 이의 고통에 공감하게 하고, 공감하다 보면 어느새 쓰라림은 연민으로 승화되어 있다. 그리고 연민의 감정을 느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좀 ‘사람’답다는 느낌을 받는다. 유별난 것일지 모르지만, 나는 사람답다는 느낌을 받을 때 ‘즐겁다.’ 무수하고 섬뜩한 우연을 뚫고 사람으로 태어난 값을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또, 사람으로 태어나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도 하다.


 물론, 사람마다 느끼는 ‘즐거움’의 종류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순간의 말초적 자극이 먹는 ‘즐거움’의 전부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자극’에만 집중하면 음식이 담은 의미를 알아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의미가 주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음식을 먹을 때, 때론 일부러 눈과 혀를 잠재운다. 그러면 가슴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가슴으로 여러 가지 ‘즐거움’을 음미한다. 때로는 따뜻함을, 때로는 감사함을, 또 때로는 쓰라림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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