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인생의 동그라미 쉼표, 도넛이다
“도넛은 왜 가운데가 비어 있나요?”
어느 날, 도넛가게에서 한 아이가 물었다.
잠시 멈칫한 주인은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히 말했다. “빵이 골고루 익으려면… 가운데, 쉼표 하나쯤은 꼭 있어야 하거든.”
아이는 주저 없이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멍하니 도넛의 동그라미를 들여다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인생도 도넛처럼 쉼 구멍 하나쯤은 있어야 행복한 것일까?
꽉 채운 삶만이 성공된 삶이라고 믿었던 내 생각은 잠시 흔들렸다. 오히려 덜 타고 덜 눌어붙은 건, 여유 그리고 비움이었다. 그 비어 있던 동그라미 구멍 덕분이었다.
김삿갓, 턱 내려놓고 쉼표 하나의 시를 짓다
조선 최고의 방랑 문객 김삿갓 김병헌.
관직도 재산도 다 없었지만, 그가 읊은 시는 권력자들의 심장도 꿰뚫는 여유로운 광빔이다.
그의 방랑은 의미 없는 방황이 아니었다. 도넛 가운데처럼 일부러 비워둔 여유와 여백이었다.
그 덕분에, 좀 더 큰 세상을 담을 수 있었다.
황진이와 서경덕, 침묵으로 일관된 삶과 시
최고의 종합 예술인, 기녀이자 문객 시인.
그녀의 절제된 문장 하나, 송도삼절로 불릴 만큼 뛰어났지만, 서경덕을 향한 연정은 끝내 외면당했다.
“풍광도 좋고 뜻도 고상하나, 이미 중생 구제에 뜻을 두었기에…”
도인의 선문답은 그의 단 한 줄의 여백이었다.
그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지키기 위한 동그란 숨구멍이었다.
그녀는 그 침묵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았고,
더 깊은 시를 남겼다.
신사임당, 붓끝에서 피어난 절제의 여백미
우리는 그녀를 ‘현모양처’로 기억하지만,
타고난 천부적 재능을 지닌 문예의 예술가였다.
자연을 벗 삼아 그림을 그리고, 고요한 틈에서 글을 쓰며 삶의 여백을 창조의 숨결로 절제된 변화를 이끌었다.
그녀의 그림 ‘초충도’에는 군더더기 하나 없다.
햇살 든 그림자 같은 시구에는 바쁜 삶 속 한 모금의 여유가 스며들고 있다.
그녀는 말없이 보여줬다. 스스로 비워낸 자리에 무의의 아름다움이 스며든다는 것을.
허난설헌, 인간 본연의 절제된 통증을 여유와 예술로 승화
열 살에 시를 짓고, 열여섯에 한양 문사들과 필담을 나눈 천재 소녀. 허균의 여동생, 허난설헌. 그러나 결혼 이후의 삶은 고통으로 얼룩졌다. 그녀는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단, 절제된 문장 속에 고요한 통증을 그대로 숨겼다.
그 절제되고 숨겨진 여백 덕분에, 그녀의 고통을 더 생생히 느낀다. 그녀의 침묵은, 숨겨 놓은 통증을 통해 생생하게 글로 재탄생하였다.
글도 인생도, 때때로 '글멍'이 필요하다
요즘 사람들은 ‘불멍’, ‘물멍’, ‘달멍’을 즐긴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단순한 멍이 아니다.
삶을 다시 익히는 고요한 예열이다.
길을 가다 문득 하늘을 보게 되는 날,
그 까만 하늘 위로 노란 달 하나가 나를 내려다보며 잠시 속삭인다.
“지금은 잠시 쉬어도 괜찮아. 그래야 더 멀리 갈 수 있어.”
글도 그렇다. 문장을 빽빽이 채우면 숨 쉴 틈이 없다. 문단 하나의 여백, 줄 바꿈 하나의 쉼표가
독자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불러내는 ‘글멍’의 시간이 된다. 그 잠깐 멈춤이,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세이노는 조용한 전략으로 말했다.
“쉴 줄 아는 자만이, 어디 든 끝까지 간다.”
성공과 번아웃의 미세한 차이는 능력이 아니라 쉼의 방식이다. 그 쉼을 '무기'처럼 활용했다.
때가 되면 조용히 물러날 줄 아는 사람,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끝까지 간다고 그는 믿었다.
인생은 도넛이다 - 그리고, 다시 나를 고쳐 쓴다
인생은 도넛이라고 이제 말한다.
가득 채우려 애쓰지 말자. 그 비워둔 구멍 안에,
김삿갓의 시 한 수가 스며들고,
황진이의 사색이 흐르고,
서경덕의 침묵이 머물고,
신사임당의 붓끝이 춤추고,
허난설헌의 조용한 통증이 번지고,
세이노의 단단한 통찰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 쉼 구멍의 여백 한가운데,
신영복 선생의 조용한 실천이 따라온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분노보다 성찰을 택했고, 고통 속에서도 글로 자신을 다시 써 내려갔다. 그의 삶은 쉼 없이 고쳐 쓰는 문장이었다.
지우고, 비우고, 다시 써내는 겸손한 붓질.
잠시 달을 올려다본다. 인류가 처음 착륙한 그곳을,
‘고요의 바다(Sea of Tranquility)’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 마침내 안착한 고요의 쉼.
멈춤이 있어야, 그다음 문장이 보인다.
삶도 그렇다. 비워야, 안착할 수 있다.
나를 다시 고쳐 쓰는 길도 결국,
도넛처럼 비워낸 쉼표 하나에서 시작된다.
그 쉼표 위에 조금 느리게, 그러나 더 단단하게
나의 다음 삶을 써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