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나를 고쳐 쓴다(6)

제6화, 공부도 놀이처럼 줄기면 행복하다

by 오엔디

‘공부’란 어린 시절이나 어른이 되어서도 늘 무겁게 무언가를 짓 눌러왔다.


아득한 초등시절, 여름 방학이면 늘 괴롭혔던 숙제, 곤충채집 탐구생활 그리고 새벽 밭일과 오후 논일 등 고된 하루가 짧았다. 그 무렵 딱 10살(초등 4학년) 때, 공주교대를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부임한 예쁜 담임 선생님은 말 그대로 '공부의 신'이었다.


이쁜 선생님은 늘 꼴찌만 했던 4-5반 악동 친구들 10명(남자 7명, 여자 3명)을 잘 지도하면 꼴찌는 면할 수 있다고 판단하셨다. 그리고 하루 교육 과정이 끝나는 오후 3~4쯤부터 악동들은 데리고 부족한 국어와 산수공부를 같이 하면서 공부에 대한 이해와 필요를 돕고 있었다. 그 당시 혁명적인 자기 주도학습을 하게 된 것이다. 국어책을 잘 못 읽는 더듬이, 구구단을 못 외우는 산수포(산수랑 담 싸서 결국 포기한 아이들) 등과 함께 매일 2~3시간씩 한 달을 그렇게 보냈다.


그때의 나는 논과 밭에서 하는 고된 일보다 그나마 공부가 조금 더 쉬워서 그냥 좋았다. 놀고 싶은데 일(노동)을 해야 하니, 오히려 공부가 더 편하고 나름 행복했다.


그런데 한 달 후 자기 주도학습의 결과는 참담했다. 10명 중 나 하나만 남게 되었다. 크게 실망한 초짜 선생님은 나를 선생님 하숙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자기 주도학습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셨다. 처음엔 별다른 공부도 안 시키고 그냥 책장에 있는 아무 책이나 읽어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라면 등 간식도 챙겨 주셨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 집에서 노는 게 너무 신나고 즐거웠다. 그리고 또 한 달쯤 지나면서 공부의 신, 공부 방법을 그대로 흡수하며 조금씩 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청출어람으로 보답했다.


5학년이 되면서 공부가 가장 많이 항상 된 모범 학생으로 선정돼 교내 학교 신문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 후로 진짜 공부가 제일 쉬운 게 되었다. 아마도 그 시절 공부는 놀이처럼 즐겁고 재미가 있었던 거 같다. 시험, 경쟁, 결과 등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책 보고 숙제하고 공부하는 데 오랫동안 좋았다. 공부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제 50세 중반이 돼 지금 다시 ‘공부’를 마주하고 있다. 더 이상 성적표도, 보고서도, 누군가의 평가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공부를 원하고 있다. 다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한다.

예전의 놀이처럼 공부를 즐기기로 한 것이다.


천지인(天地人), 공부는 조선의 선비들에게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신영복 선생은 ‘공부’라는 단어를 이렇게 풀어낸다.

“공부(工夫)의 ‘공(工)’자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모양이고, ‘부(夫)’는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 곧 인간이다.”

하늘, 땅, 사람. 천지인(天地人)의 조화가 결국 우리가 평생 해야 하는 배움, 공부를 만든다.


그러니 공부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삶의 근원적인 태도, 방향’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부’ 또한 매우 비슷하다. 불법(佛法)을 닦는 것, 그것이 공부이다.

경전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하고 깨달음을 얻는 수행의 길이다.

공부는 단순히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전체로 ‘닦아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공부도 놀이처럼 패턴을 완전히 바꿔보자


왜 우리는 ‘배움’을 평생 동안 부담스러워하며, 자주 멈추고 또다시 후회하게 될까.

그건 아마도 우리가 공부를 노동처럼, 어떤 ‘성과나 결과’만을 생각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롯이 매진하기 때문일까? 그런데도 막상 결과는 늘 처참하다.


그래서 이제 새롭게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공부를 ‘노동’이 아니라 ‘놀이’로 즐겨보자.


네덜란드 철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인류를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인간’이라 불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놀이는 단지 여가의 수단이나 게임이 아니다. 놀이는 인간 문명의 시작이며, 예술과 종교, 언어와 문화의 깊은 뿌리는 놀이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놀이의 본모습은 '자유'다. 놀이는 억지나 강요가 필요치 않다. 그 결과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언제나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고, 그 순간마다 순수한 몰입감도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마냥 노는 것을 순수하게 바라보라. 어떤 목표나 특별한 결과 등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재미있기 때문에 열심히 논다. 공부도 그렇게 할 수는 없을까?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기쁘고 유쾌한 탐구의 여정이다.


살아가면서 공부는 ‘놀 수 있는 힘’이자 ‘즐길 수 있는 순수 용기’라고 굳게 믿어보자.


호모 루덴스의 놀이 공부, 그리고 호모 파베르의 한계를 극복하자


학자란 어떤 존재인가. 늘 책을 읽고, 연구를 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전형적 인물이다.


하지만 학자도 도구를 다루는 인간,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성향도 지닌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무언가 결과를 요구받는다.

논문, 실적, 평가, 업적 등등

이 모든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을 스스로 포기한다. 공부를 놀이가 아닌 ‘과업’으로 만들고 매일 스스로를 옥쥐고 힘들게 만든다.


그렇기에 결국 많은 이들이 공부를 멀리한다.

하지만 호모 루덴스는 다르다. 놀이의 본질인 창의성과 자유를 계속 유지하며 스스로 즐긴다.

기존의 규칙을 뒤집고, 틀을 깨며, 그 한계를 넘어선다.


공부가 다시 놀이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멀리 함께 갈 수 있다.

더 기쁘게, 더 깊게. 그리고 더 순수하게.


공부는 또 다른 삶을 고쳐 쓰는 연습이다


공부든 일이든, 놀이처럼 즐기기 위해선 늘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휴식, 그것은 어디든 언제나 필요하다. 쉼이 없는 삶은 결코 지속될 수 없다.


가끔은 멈추고, 걸음도 잠시 늦추고,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

쉼 없이 달리는 놀이 공부도 결국 번아웃을 부른다. 놀이가 단지 노동을 위한 보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놀이 자체가 삶이어야 즐기며 행복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배우는 기쁨, 살아가는 기쁨, 존재하는 기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를 다시 고쳐 쓴다


이제 나는 ‘호모 파베르 텃밭 농부’이며, ‘호모 루덴스 유희자’로 살아간다.

읽고, 쓰고, 걷고, 듣고, 심고, 생각하고, 늘 무언가를 사랑한다.

그 모든 순간이 나에겐 공부요, 놀이요, 삶이다.


며칠 전, 작은 손녀가 아장거리며 집에 놀러 왔다. 나는 함께 텃밭에 나가 방울토마토를 따며 이야기했다.

“하부지? 이게 하부지 공부야?” 맑은 눈을 초롱초롱, 아이가 물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응, 할아버지는 늘 이런 걸 배우는 중이야. 저 나무, 꽃, 풀들한테서.”


아이의 눈빛이 더욱 반짝였고,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작은 행복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깊은 공부라는 것을.

그리고, 공부는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멋진 놀이이자 유산이라는 것을.


어릴 적 한 친구는 퇴직 후,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서툴고 쑥스러웠지만, 점점 색을 다루는 법을 익히며

지금은 매달 지역 갤러리에 사재를 털어서 '졸작 출품 전시회'를 연다.

“이제야 진짜 나를 그리는 느낌이야.”

그의 말에서 나는 또 배운다.

공부는 우리 안에 숨겨진 ‘진짜 나’를 꺼내는 일이라는 것을.

성공을 향한 층층사다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내려가는 길이라는 것을.


공부는 인생의 결과를 바꾸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공부가 나 자신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계속된 노력과 탐색, 질문과 놀이 등등.

그 모든 과정이, 나를 다시 고쳐 쓰는 놀이 연습이 된다.


나는 늘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조용히 답한다. “공부하듯, 놀이하듯.

다시, 나를 고쳐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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