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나를 고쳐 쓴다(7)

제7화, 불볕더위 가로수 그늘의 산들바람이다

by 오엔디

한여름 불볕더위, 사람의 체온을 넘나 든다. 어린 시절, 대서 무더위에 콩밭 매시던 어머니의 하얀 수건이 사라진다. 그리고 조금 후에 콩잎이 살랑거린다. 산들바람, 엄마바람이 이마의 식은땀을 잔잔하게 식혀준다.


그런 도심 속에 사이다 같은 바람이 솔솔 분다. 그 산들바람은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가? 그 비밀은 도심 그늘의 작은 행복, 우뚝 선 초록빛 가로수가 베푸는 자비심일까?


숨이 턱~하고 앞길을 가로막는다. 잠깐의 걸음 속에도 현기증 같은 희뿌연 열기가 한증막 오후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수직의 대나무 콘크리트 빌딩 사이, 가로수 한 그루가 우뚝하니 힘겹게 서 있었다.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존재하는 구원의 생명체가 회색빛 초록을 내뿜는다.


도시를 숨을 쉬게 하는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

글을 쓰는 일상의 일과 너무 닮아 있다.

햇살, 바람, 사람들의 시선, 때로는 무관심까지,

모든 변화를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 어디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알아야 굳건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다. 그래야 무언가를 다시 만드는 힘이 생긴다. 무더운 여름, 딱딱한 아스팔트 틈으로 힘겨운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데, 그거면 족하다.


작은 나무가 그런 역경을 이겨내 조금씩 힘을 키운다. 그렇게 자라서 하늘을 덮을 만큼 크고 넓은 그늘을 드리운다.


매일 써 가는 작은 문장 하나도 누군가의 마음에 숨 쉴 짬을 준다. 아무리 현실이 차갑고 공허해도 따뜻함이 그 틈으로 퍼져나간다.

좋은 문장은 가로수 잎을 타고 작은 행복과 소소한 산들바람을 소리 없이 부른다.

한여름 밤의 텁텁한 열기를 식혀 내리 듯, 조금씩 변화를 시도한다. 우리가 숨 쉬듯, 글도 잠깐의 짬숨이 필요하다.


애틋했던 문장 하나가 누군가의 애꿎은 감정의 먼지를 조금씩 걷어낼 때

도심의 한적한 도로 옆 골짜기, 한 줄기 산들바람은 독자의 마음을 살랑거린다.


《채근담》에 이런 말이 있다.

“나무는 뿌리가 단단해야 비바람을 잘 견딘다.”

겉만 그럴듯한 글은 곧지 못해서 휘청 거린다.

내용 없는 뻔한 문장은, 화려한 가지만 무성하다. 글도 나무처럼 피곤함에 지쳐간다.

뿌리가 얕은 글은 금방 피로하고, 쉽게 잊힌다.


나를 고쳐 쓰기란, 결국 새 뿌리를 가꾸는 일이다. 숨 쉬는 문장을 생각의 지하 깊숙이 내려 보내고, 거기서 다시 올라온 연 노란 새잎을 꼬물꼬물 새롭게 틔운다.


《도덕경》은 말한다.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단단한 것을 이긴다.” 가로수처럼 조용하고 우직한 문장이 오래간다. 설득하지 않고, 증명하지 않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스며들 듯 항상 존재한다.


그런데 이 고마운 존재가 어떤 이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될 뿐인가?


울산에서 은행나무가 민원으로 잘려나가고, 제주에서는 왕벚나무가 예고도 없이 베여 나갔으며, 서울은 누군가 가로수에 맹독을 뿌렸다.

그렇게 말 없는 고마운 존재가 가장 먼저 상처받고 슬퍼한다.


그래서 글 쓰듯, 고쳐 쓰는 기록이 필요하다.

지워진 자리에 새로운 이유를 남기는 것.

나무처럼 말은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침묵하지 않는 글. 그것이 바로 내면의 바른 성찰이며, 나에게 스스로 증언이 된다.


《손자병법》은 말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좋은 글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

편집은 자르기가 아니라 훌륭한 가지치기다.

늘 보살펴 주고 살리는 방향을 찾는 일이다.

무자비한 삭제는, 가로수를 무턱대고 베는 일과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글을 쓰기 전, 먼저 독자를 알아야 한다.


시대의 공기, 정서의 배수, 통행량까지,

가로수의 환경처럼, 글도 그때마다 다양한 조건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모르면 글쓰기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업무방해다.


좋은 글은 나무가 자랄 만큼 숨 쉬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단순 지식이 아닌, 작은 배려로 키운다.

한 문장, 한 가지, 한 줄기의 품격으로

숨조차 턱턱 막히는 도시를 다시 숨 쉬게 한다.


도시는 가로수로 말하고, 글은 도시의 감수성으로 되돌려 준다.

가로수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때로는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는 글.

온 세상을 흔들지 않더라도 가까운 마음은 살포시 흔들 줄 아는 한 문장.

그런 글이, 결국 세상을 변하게 한다.


가로수 아래, 나는 다시 나를 고쳐 쓴다


우리는 너무 자주 바깥일들은 잘 손질하며 안은 자주 잊으며 산다.

말끔한 프로필, 화려한 이력서, 보기 좋은 감정 표현. 하지만 삶의 품격은, 결국 내면의 뿌리에서 시작 돼 밖으로 나와서 결정된다.


가로수처럼 말없이 서서,

근본인 뿌리부터 나를 다시 써 내려가야 한다.


문득 지인 중 한 사람을 떠올려 본다.

서울 마포에 살았던, 번듯한 직장을 내려놓고

어렵게 작은 북카페를 연 청년이 있다.

그는 "사람을 말보다 책으로 이해하고 싶다"라고 했다. 그 카페엔 늘 조용한 문장이 흘렀고,

그 자리에 다녀간 사람들은 잠시 멈추어 다시 걷는 법을 배웠다.

그는 말했다. “나는 나를 다시 쓰고 있다. 매일, 조용한 침묵으로.”


항암 치료 중인 병실에서 조차,

딸에게 매일 짧은 편지를 남기며 순수했던 고마운 한 아버지의 사연.

'오늘은 창밖에 흐드러진 벚꽃이 예뻐.' '넌 나의 가장 큰 봄이야.'


그 말들이 딸의 결혼식에 조용히 낭독되어

그의 부재를 따뜻하게 채워 주었다.

그 짧은 문장들이 바로 우리들 내면의 가로수 들이다. 삶은 그렇게 기억된다. 말보다, 문장 하나로.


세이노는 자신의 이름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한 줄의 글과 말로 청춘에게 새로운 희망과 바람을 불어넣었다.

죽음조차 조용히, 가로수 그늘처럼 떠났다.

가로수 같은 글, 그러나 세이노 같은 존재.

그는 박수보다 오래, 더 깊게 남아있다.


글쓰기는 늘 무언가 존재의 증명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히 뿌리내리고,

도심의 열기를 식히는 가로수처럼,

세상 한복판에 한 줄의 문장, 행복을 심는 일.


이제 다시, 나를 고쳐 쓴다. 글은 대박을 꿈꾸지 않더라도, 내 안의 뿌리를 다시 쓰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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