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모르고 지나친 헤매는 골목길이다
처음엔 지도도 없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한동안 그냥 걸었다.
그저 한참을 생각 없이 재래시장 옆 골목길, 여기저기 추억의 길(일명, 골멍 때리기)로 막연하게 진입한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어디쯤 가야 그 끝을 알 수 있을지, 지금 내가 어디쯤인지 모른 채.
처음 글쓰기도 언제나 두려움 반, 설렘 반, 반반 탕수육볶음밥처럼 꼭 그랬다.
애매한 목적지, 그러나 살짝 들뜬 마음, 늘 불안한 시작.
무언가 써야 할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몰랐다.
골목 어귀를 돌면, 담쟁이 덮인 벽이 불쑥 나타나고 간판 없는 가게는 아무 표정 없이 나를 지나친다. 그때마다 묻는다.
‘이 길이 맞는 걸까?’
글쓰기도 다르지 않다.
화려한 첫 문장으로 달려 나가다가 둘째 문장에서 방향을 잃기 시작한다.
커서는 화면 위에서 깜빡이고, 머릿속은 급정거한 생각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어쩔 줄 모르는 순간에
진짜 문장이 불쑥하고, 들어온다.
“그 사람의 말이 왜 그리 오래 남았을까.”
“그 장면을, 나는 왜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그건 의도가 아니라 우연이었고, 계획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그 길을 헤매지 않았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문장들.
나는 글을 쓰며 또 배웠다.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잘 헤매는 사람이 좋은 문장을 만든다는 걸.
스기야마 다카시는 말했다.
“헤매고 방황하는 건, 정답이 없는 인생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아가는 목표의 시간이다.”
그는 직장생활 20년을 접고 나와, 생전 처음 보는 동네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간판 불빛이 켜지는 어스름한 시간.
거기서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내 인생의 방향이 아니라, 리듬을 잃고 있었구나.” 그 길 위에서 그는 다시 쓰기 시작했고, 그때 쓴 첫 문장이 바로 『어른에게도 헤매는 시간이 필요하다』의 시작이었다.
감성작가 필립 역시, 한때는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고 고백한다.
무기력, 번아웃, 수없이 쓰다 지운 글들 속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나는 지금 헤매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해내는 중일까?” 그 질문에서 시작된 작은 메모들이 쌓이고 쌓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헤매는 중이지만 해내는 중입니다』라는 책으로 발현되었다.
“헤매는 와중에도 우리는 해내고 있다”는 그 말은, 길을 잃은 이들의 숨을 잠시 돌리게 했다.
급하게 방향을 잡으려 하지 않고, 조금 더 맴돌면, 어느 순간 풍겨 나는 바삭한 전 냄새처럼,
의외의 장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건 늘 예상 밖에 있었다. 골목은 헤맬수록 풍경이 깊어진다.
글도 마찬가지다. 빨리 도착하려 애쓰지 않고, 내 안의 리듬대로 걷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나다운 문장’이 태어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딱 떨어지지 않는 제목을 들고, 불분명한 감정을 품고,
끌리지 않는 도입부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그게 내 글쓰기다.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내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신영복 선생은 감옥이라는 긴 골목길에서,
어쩌면 가장 길을 잃은 상태에서
‘처음처럼’이라는 단 하나의 문장을 찾아냈다.
그 문장엔 지나온 고통도, 새로 시작할 희망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가 그곳에서 쓴 글은, 잘 계획된 글이 아니었다.
삶의 수많은 모퉁이를 돌고 돌다가 비로소 마주한, 가장 단단하고 다정한 문장이었다.
박명환 작가는 어느 날 서울의 낡은 골목길을 걷다가 문득 멈춰 섰다고 한다.
누군가 오래전에 벽에 붙여둔 시 한 줄,
잊힌 꽃나무 아래 놓인 작은 의자 하나.
그는 그 골목을 ‘사람의 마음을 닮은 공간’이라 불렀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 장면은 그냥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그 말이 길게 여운이 되어 귓가에 계속 머문다.
길을 헤맨 덕분에, 비로소 멈춰 설 수 있었던 순간들. 그게 진짜 나를 고쳐 쓰는 시작 아닐까.
글쓰기는 때론 헤매다가 마주친 골목길 같은 황당 경험의 대박 사건이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 그 길 어딘가엔,
오직 당신만을 위한 문장,
그리고 다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기다린다.
나도 그런 경험을 했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골목길의 추억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냥 비난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저 아무렇게나 후회만 남게 된다.
결국 돌고 돌다가, 그렇게 한참을 맴돌다가,
비로소 이 문장 앞에 다시 선다.
이제, 다시 나를 고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