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할머니의 삶, 지혜와 사랑이다
인생을 조금씩 살다 보면 삶의 지혜는 요란한 선언 등에서 결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조용하며 묵묵히, 매일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렇게 내 안의 또 다른 삶의 형태로 새로운 지혜 하나, 글자를 새기는 일과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할머니는 그런 평범한 일상의 지혜를 전달해 주신다.
지혜 하나, 한 번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생명의 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한동안 끝없는 침묵에 잠겼다. 여린 나의 마음속은 침묵의 깊이와 비슷한 어느 심연의 검은 바닷속에서 숨이 딱 멈추는 듯 고요하였다.
그때 할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일찍부터 미역국을 끓이고, 소박한 나물 반찬을 차리며 말씀하셨다.
“무슨 국물이든 오래 끓일수록 맛도 깊어지지. 사람도 그렇단다.”
그 일상의 평범한 한마디가 마음속 생각 지도를 새하얀 희망으로 바꿔 그리게 한다.
언제든지 삶이 무너질 때, 나도 같이 무너져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각은 더 깊어지고 단단해져 어두운 부정의 그림자를 긍정의 하얀 희망으로 새롭게 그려준다.
지혜 둘, 단순 속도가 아니라 나아가는 방향, 의지의 산물이다
할머니는 천 원을 아끼려고 매일 먼 길을 돌아 걸으셨다. 그 길이 돌아가도, 멀어도,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급히 가면 길을 잃는다.”
요즘도 출근길에서 종종 이 가르침을 떠올린다.
사람들이 지하철 계단을 뛰어오를 때, 나는 잠시 걸음을 늦추고 하늘을 잠깐 올려다본다.
속도를 높이려 애쓸수록 마음도 따라 흔들린다.
결국 나를 지켜주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고, 온전히 나아가는 방향이다.
지혜 셋, 침묵이 주는 자유로운 치유
사춘기 시절, 마음에 상처가 많아 말을 꺼내지 못했던 날이 종종 있었다.
그때도 할머니는 말없이 내 손에 귤 두 개를 쥐여주셨다. “귤도 속이 덜 익으면 쓰다. 니 속도 아직 덜 익은 거다.”
그 지혜로운 침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조급하게 다그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를 기다려주니 비로소 내 안의 서툰 나를 품을 수 있었다.
다시 나를 고쳐 쓰는 데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나를 기다려주는 시간임을 알게 되었다.
지혜 넷, 아침 10분의 마법
가끔씩 할머니는 아침 립스틱을 바르며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기를 놓으면, 세상도 그 사람을 놓아 버린단다.”
삶의 첫 문장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된다.
보이차 한 잔을 내리고, 거울 앞에서 스스로에게 “오늘은 괜찮다”는 말을 건네는 잠깐 10분은 내 하루의 느낌, 톤을 결정한다.
나를 다시 쓰는 일은 거창한 사건, 특종 같은 것은 아니다. 나 자신에게 보내는 작은 존중, 그것이 바로 삶을 바꾸는 첫 문장이 된다.
지혜 다섯, 자존감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
할머니의 작고 소박한 장부에는 돈보다 깨알처럼 쓴 정성과 사랑의 마음이 기록돼 있었다.
“헛돈”이라 표시된 작은 낭비조차, 사실은 가족을 지키는 사랑의 울타리였다.
통장 잔고가 아니라 사랑하는 태도, 그것이 진짜 자존감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오늘도 나는 하루의 마음과 진심을 기록하며, 내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서는 연습을 한다.
나를 다시 쓰는 일은 결국 나를 ‘사랑하고 책임지는 태도’에서 시작한다.
힘들 때, 말보다 따뜻한 손길을 먼저 내미는 그 안도감을 할머니는 주셨다.
그때는 몰랐으나,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먼저 다가가고, 기댈 수 있는 따뜻한 참 어른이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를 다시 쓰는 길이었다.
지혜 여섯, 소박한 나눔과 한 편의 책
할머니의 김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건 ‘사랑의 기록’이었다. 이웃과 나눈 김장 한 포기가 어느 날 우리 가족의 슬픔을 감싸주었다.
삶은 결국 나눔으로 다시 쓰인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 것, 그것이 할머니가 남겨주신 삶의 문장이었다.
할머니는 글을 몰랐다.
그러나 삶 자체가 한 권의 두터운 책이었다.
이제는 내가 아이에게 묻는다.
“오늘 너의 삶은 어떤 문장으로 남았니?”
딸아이가 묻는다.
“엄마, 왜 내가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걸 알아?”
내 대답은 단순하다.
“할머니가 그렇게 살아냈거든.”
지혜 일곱, 나를 다시 고쳐 쓴다는 것
내가 삶의 주인공이라면, 매일의 나를 새로 쓸 수 있는 빈 페이지다.
귤 한 개로, 국 한 숟갈 참는 걸로, 립스틱 한 번 바르는 걸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써 내려간다.
그렇게 쌓인 문장들이 모여, 결국 내가 온전히 ‘나’인 삶이 된다.
역사의 큰 인물들도 그 시작은 조용한 가정, 특히 할머니의 품에서 비롯되었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할머니 원경왕후의 따뜻한 보살핌과 꾸준한 교훈 속에 자라며, 학문에 대한 사랑과 어진 정치를 펼칠 토대를 마련했다.
정조 또한 할머니 정순왕후의 세심한 가르침 속에서 왕으로서의 기개와 단단한 중심을 다졌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도 할머니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글을 쓰는 힘을 잃지 않았다.
그들의 삶 속에서 할머니는 단순한 보호자가 아니라, ‘삶의 문장을 써주는 첫 번째 스승’이었다.
지혜 여덟, 내 인생의 소박한 작가로 산다는 것
인생은 누군가 대신 써주지 않는다. 내가 쓰고, 나를 다시 고쳐 쓴다.
때로는 서툴고, 때로는 멈추지만, 그 모든 순간이 내 문장을 더 진하게 만든다.
세종의 온화한 인품도, 정조의 결단력도, 정약용의 집념도 모두 할머니의 손길에서 시작된 문장이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통해 나를 더욱 확신한다.
내가 쓰는 이 작은 문장 하나가 언젠가 누군가의 인생을 비추는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조급함을 버리고, 소란을 버리고,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내 안의 지혜를 손끝에 담아, 삶이라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
오늘 내가 쓰는 문장이 내일의 내가 감탄한 명 문장의 한 줄이 되길, 내가 다시 쓴 삶이 누군가의 가슴에도 따뜻한 불씨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나는 오늘도 내 인생의 작가로 살겠다.
그리고, 당당하고 아름답게, 그 글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