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비 오는 날, 카페 풍경과 3분 컵라면의 기다림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늘 그리워하고 애잔했던 라면과 함께한 고된 추억을 잘 알고 있다. 비 오는 날 고된 훈련을 마치고 식당 앞에 서 있던 순간, 누군가가 말없이 건넨 컵라면을 상상해 본다.
그 뜨거운 국물 한 입에 말없이 무너지던 순수한 마음. 그 사람의 이름은 몰라도, 그 따뜻함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글도 그렇다. 거창한 언어보다, 정확한 논리보다, 딱 필요한 순간에 툭 건네는 한 줄이 마음의 미동, 심결 파동을 잔잔하게 흔든다.
“괜찮아, 오늘 하루도 다 잘 될 거야?”, “오늘, 좀 힘들었지?”, “모든 게 다 네 탓이 아니야.”
이런 문장은 마음이 먼저 읽는다. 마치 말없이 건넨 컵라면처럼, 뜨겁고 얼큰 짭짤하고 울컥하게 만드는 한 문장이다.
한밤중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개 피곤하거나 아님 무언가에 지쳐 있다. 혹은 조금 외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없다. 그저 뜨거운 물을 붓고,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잠시 3분 동안 세상과 화해할 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설득하거나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옆에 앉아주는 일이다. 그것도 아무 말없이, 조용히, “나도 그런 날이 있었어.” 이렇게 말해주는 문장.
그것이 진짜 위로가 된다. 누군가를 향한 글이 아니라, 내 안의 어느 한순간, 고요에 닿는 느낌이전부가 된다.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카페 창가에 앉아, 쓰디쓴 맛없는 뜨거운 커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의 소음이 젖고, 사람들의 걸음도 많이 느려졌다. 비 오는 날의 카페 풍경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잠시 멈춰 나 자신을 만나러 가는 작은 쉼이 있는 공간이다.
글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묻는 고요한 질문이다.
“그때 정말 슬펐지?”, “아직도 그 사람, 많이 생각나고 자주 떠오르니?”
문득 옆자리에서 누군가 조용히 울고 있었다. 휴대폰을 보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은 낯설지만 이해되는 비 오는 날 풍경이다, 그런 슬픈 날은 꼭 비가 오는 걸까? 우연일까 아니면 하늘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걸까. 비 때문일까? 그 눈물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슬픔이 삶의 고요한 진실이 돼 천천히 다가온다.
그 순간, 나는 무언가 글을 쓰고 싶어졌다. 위로하려는 문장이 아니라, 그저 곁에 잠시 머물러주는 따뜻한 문장을. 누군가에게는 컵라면 한 그릇 같은, 누군가에게는 비 오는 날 향 가득한 따뜻한 커피 같은, 그런 조용한 문장을.
『컵라면이 익어가는 시간에』에서 김쾌대는 말했다.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를 돌아보는 마음이 컵라면의 3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짧은 3분. 뜨거운 물을 붓고, 젓가락을 들기 전까지의 시간,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무언가 마음을 건넨다. 누군가에게 그게 컵라면 한 그릇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문장 한 줄일 것이다.
며칠 전, 편의점에서 ‘토마토 컵라면’을 처음 발견했다. 매운맛도 아니고 해장용도 아닌, 묘하게 중립적이고 낯선 이름. 궁금해서 사 봤는데, 의외로 부드럽고, 새콤하면서도 따뜻한 맛이었다. 누군가는 “이도 저도 아니다”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날 내겐 딱 좋았다. 속을 자극하지 않고, 괜찮다고 토닥이는 그런 순한 맛.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도 저 토마토 컵라면 같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에게는 조금 느끼하고, 누군가에게는 조금 심심할지 몰라도, 그날 그 사람에겐 딱 필요한 온도와 맛이 되어주는 문장.
글쓰기도 그렇다. 타인을 위로하기 위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를 향한 고백이고, 내 안에 남겨둔 상처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바라보는 시간. 나는 글을 쓰며, 나를 다시 고쳐 썼다. 말하지 못했던 감정, 미처 정리되지 않았던 기억들, 그 모든 것을 단어 하나, 문장 하나로 다시 꿰매고, 덧대고, 스스로 닦아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누군가를 위한 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위한 글이라는 것.
커피가 식어갈 즈음, 반도 먹지 않은 커피는 진한향만 계속 퍼뜨렸다. 비도 그쳤다. 그 사이 나는 한 문장을 썼다.
“내가 당신을 다 알 순 없어도, 지금 이 한 문장으로, 컵라면이 조용히 익어가는 그 3분 동안은 조금이라도 따뜻해졌으면 그런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3분. 짧지만, 이 순간 안에는 삶과 마음의 균열을 살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시간이 담겨 있다. 뜨거운 국물 앞에서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처럼, 글 한 줄이 내 마음 깊은 곳을 스치듯 닦아낸다.
『컵라면이 익을 동안 읽는 과학』에서 강조하듯, 3분이라는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 변화만이 아니라 정신적·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최소 단위다. 뜨거운 물이 면을 부풀게 하고 국물이 퍼지는 과정처럼, 마음도 짧은 순간의 집중과 관찰로 부드럽게 변화할 수 있다. 불안정한 감정이 글 한 줄, 호흡 한 번, 손끝의 온기 같은 작은 자극으로 안정되고, 내면의 긴장이 저절로 풀린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글쓰기란 결국 자신을 다시 고쳐 쓰는 의식이라는 사실을. 남을 위로하는 문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 안에 남겨진 상처를 꺼내고, 내 마음을 정리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를 다시 쓰는 과정이다.
컵라면 3분, 비 오는 날 카페의 한 시간, 손끝에 전해지는 따뜻함과 글 한 줄의 울림. 이 짧고 사소한 시간과 순간들이 모여, 마음속 오래된 찌꺼기를 씻어내고,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며, 다시 써 내려가게 한다.
과학적으로 보면, 짧은 시간의 집중과 반복적 행동이 신경 회로를 강화하고 안정적인 정서 상태를 만든다. 3분 컵라면 기다림, 글쓰기 같은 일상의 사소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내 마음의 화학적·신경적 변화를 경험한다. 결국 3분이라는 ‘짧은 순간’ 속에 깃든 집중과 기다림이, 삶을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드는 힘이 된다.
오늘도 나는 컵라면을 기다리고,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쓴다. 그 과정 속에서 나를 고쳐 쓰고, 마음을 닦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짧은 순간 속의 집중, 조용한 기다림, 그리고 마음을 담은 한 문장. 이 모든 것이 바로 나를 다시 쓰는 힘이며, 삶을 살아가는 가장 소중한 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