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어머니 마음
“나는 괜찮아.”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밥을 짓고, 이불을 개고, 도시락을 챙기던 새벽에도. 손끝이 떨려 힘이 없어 보일 때조차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 말에는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평온만 묻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겠다. 내색 없는 평온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바탕에는 사랑이 전제된다. 매일의 역경과 고단함을 감내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사랑. 그 사랑의 얼굴은 언제나, 우리들 어머니다.
어머니는 늘 애쓰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가장 깊이 애쓰신 분이었다.
손끝에 남은 굳은살, 분주한 손놀림, 긴 하루 끝의 숨결. 모든 것이 말 없는 사랑의 흔적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랑
친구가 어느 날 말했다.
“우리 엄마는 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 같았어. 근데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 조용한 사랑이 제일 그리워.” 그 친구는 겨울마다 어머니가 입으시던 낡은 니트 하나를 아직도 옷장에 걸어둔다.
늘 춥다 하셨는데, 정작 자식들은 몰랐다.
그저 웃던 얼굴만 기억할 뿐이다.
또 다른 지인은 잠들기 전 방에 들어오시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불을 정리하며 속삭이던 그 말들이 그립다.
“얘야, 오늘도 잘 견뎌 주었구나. 엄마는 언제나 네 편, 우리 편이야.”
살금살금 문을 닫던 작은 발소리.
그 별일 아닌 순간이, 이제는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추억이 되었다.
며칠 전, 오래된 앨범을 정리하다 젊은 시절 어머니가 입으셨던 보라색 꽃무늬 스웨터를 발견했다. 색이 바래고 실밥이 풀렸지만, 손끝에 닿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예쁘지도, 비싸지도 않았던 낡은 옷.
그러나 그 안에는 어머니의 희생, 인내, 사랑… 하루하루를 살아내신 위대한 시간이 담겨 있다.
거센 파도를 넘나드는 굳건한 사랑
나는 어느새 어머니의 말투를 닮아가고 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잘하고 있어.”
그 말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위한 ‘사랑의 방패’였음을 이제야 알게 된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걱정을 주지 않으려 조용히 애쓰며, 그러나 애쓰지 않는 듯 하루를 버틴다.
그 모습은 마치 파도를 넘는 서퍼 같다. 서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보드를 파도와 직각으로 유지하는 일. 조금만 삐뚤어져도 휩쓸리고, 균형을 잃으면 곧장 물속으로 빠져든다.
어머니는 늘 중심을 잃지 않으셨다.
가족이라는 바다에서 몰아치는 파도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때로는 몸을 낮추고, 때로는 당당히 보드 위에 앉아 파도를 넘으셨다.
그렇게 늘 말없이 감내한 사랑의 힘, 그것이 우리 가족을 지탱해 주었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시인 정호승은 말했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그러나 사랑은 그 고통 속에서 더욱 빛난다.”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그러했다.
평생의 고단함, 숨겨진 눈물, 조용히 버텨낸 희생.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역사 속 어머니들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어떤 이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은밀히 회합과 서신을 전달하면서도, 집에 들어서면 평온한 얼굴로 자식을 안아주었다. 두려움과 슬픔을 홀로 감내하며 그 무거운 속내도 드러내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박마리아 여사도 그러했다. 아들의 큰 뜻을 지지하면서도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았다. 그러나 흔들림 없는 기도로 가족을 지켰고, 그 인내와 사랑은 아들의 결단과 용기의 뿌리가 되었다. 말없이 감내한 슬픔과 사랑. 그것이 시대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이제 다시, 나를 고쳐 쓴다
나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법. 힘들어도 편안한 얼굴로 모든 것을 감싸는 법. 진정한 사랑은 말없이 조금씩 남기는 것이다.
애쓰지 않는 듯 살아가는 모습 속에 세상을 버티게 하는 힘이 숨어 있다.
오늘도 조용히 인생의 파도를 맞이한다.
그리고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나를 고쳐 쓴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와 내 어머니가 보여준 묵묵한 사랑과 인내를 마음에 새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말 없는 사랑은 가장 오래 남는다.
애쓰지 않는 듯 살아가는 사람은 사실 가장 많이 애쓴 사람일지도 모른다. 조용한 마음이 세상을 바꾼다.”
오늘도 그 온화한 빛으로 하루를 견디며,
나는 다시, 나를 고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