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나를 고쳐 쓴다(24)

제24화, 바보가 바보들에게 전하는 이야기

by 오엔디

​“바보가 바보들에게 전하고 떠난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이 짧은 문장은 잠시 생각도 멈추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생각에 잠긴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을 넘어선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화려한 수사도 아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그런 종교적 미사는 더더욱 아니다.


이 한 문장은 한 시대를 온몸으로 이겨내고 실천한 처절한 고백이며, 세상의 논리로는 끝내 설명할 수 없는 선택을 반복했던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말이다.


요즘 들어 ‘바보’라는 단어를 읊조리고 입안에 넣고 오랫동안 델구르 굴려본다. 때로는 비하의 의미로, 때로는 욕설처럼 쓰이는 이 투박한 단어가 왜 성경의 인물들과 내가 존경하는 이들의 삶 끝자락마다 맺혀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십자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무모함


​예수의 삶,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가장 완벽한 ‘바보’였다. 하늘의 모든 권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무거운 선택을 했다.


힘으로 충분히 굴복시킬 수 있었던 이들에게 끝내 사랑과 희생의 참모습만을 보여주었다. 십자가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처참한 실패의 상징이 되었고, 그 실패를 스스로 자청한 바보는 세상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참 ‘바보’에 불과했다.


​그를 따랐던 사도들 역시 그 바보의 길을 그대로 따랐다. 그들에게는 권력을 쥘 기회도, 목숨을 구하는 안전한 타협도 늘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현실과 동떨어진 모든 희생을 무언의 강요처럼,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순수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또 그렇게 확인하듯 묻는다.


​“정말 그들이 참 바보였는가? 영리함의 가면 뒤에 숨어 지내는 우리들이 진짜 바보들인가?”


제도라는 이름으로 ‘현명함’을 빼앗은 것들


​초대교회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안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곳엔 오늘의 우리와 닮은 추악한 분열과 치열한 교리 논쟁이 있었다. 노바티아누스 논쟁, 재침례 문제, 그리고 키프리아누스와 스테파누스의 대립까지. 이 논쟁들은 겉으로는 신학의 정당성을 다투는 듯 보였지만, 본질적으로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정체성에 대한 싸움이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소위 ‘현명함’이 어느 순간부터 진리를 대체하기 시작할 때, 신앙은 점점 제도와 권력의 언어를 학습하게 된다. 그때부터 교회는 순교자의 공동체가 아닌, 타인을 정죄하고 판결하는 ‘법정’으로 변해갔다.


​박해를 피해 더 효율적인 생존 방식을 택했던 그들의 선택은 과연 지혜로운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거대한 두려움이 빚어낸 매우 정교한 합리화였을까? 우리가 ‘이단’이라 낙인찍고 ‘배교자’라 손가락질하며 세운 그 견고한 교리적 성벽 안에, 정작 바보 같았던 예수의 사랑은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산은 산이요, 비움은 비움이다


​성철 스님은 산을 내려다보며 말씀하셨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 짧은 잠언은 깨달음의 마침표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수식과 꾸밈을 걷어낸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본질의 선언이다. 불교의 본연 역시 화려한 설명이나 논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권력과 거리를 두었고, 명성과는 담을 쌓았다. 세상은 그를 고승이라 추앙했으나, 그는 끝내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기를 자처했다.


​여기서 나는 종교라는 경계를 허무는 하나의 공통점을 본다. 진리에 가까워진 사람일수록 말이 줄어들고, 권력과 멀어질수록 그 삶의 궤적은 또렷해진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그러했다. 그는 교리의 칼날을 휘둘러 누군가를 베어내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를 바보라 칭하며, 우는 자 곁에서 함께 울어주었을 뿐이다.


​그의 ‘바보 됨’은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도 기꺼이 선택한 ‘낮아짐’이었다.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으나 지기를 결단하는 용기였다. 그래서 그의 글은 화려한 논증 없이도 얼어붙은 사람의 마음을 녹여낸다.


내가 걸어가고 싶은 그 바보의 길


​나의 인생도 결국 이 지점에 잠깐씩 머문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에겐 어쩔 수 없이 바보가 되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순간들이 찾아온다.


​상대방의 뻔한 거짓말을 알면서도 그의 체면을 위해 속아주어야 할 때.

나의 옳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때론 침묵을 택해야 할 때.

​논쟁에서 승리하여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지만, 그를 잃고 싶지 않아 기꺼이 패자가 되어줄 때.


​그 찰나의 순간마다 나는 내면의 나에게 묻는다.


“지금 똑똑한 사냥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똑똑해지면 이익을 얻고 박수를 받겠지만, 바보가 되면 영혼을 지킬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나를 고쳐 쓰는 중이다. 나의 종교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도, 삶을 대하는 태도도 여전히 모순투성이인 미완성 교향곡이다.


​그래서 오늘 기록된 성인들의 거룩한 업적보다, 기록되지 못한 바보들의 발자취를 붙잡는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철저히 실패한 인생처럼 보이지만, 끝내 곁에 있는 사람을 살리고, 무너져가는 관계를 지탱하며,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지 않았던 그런 ‘바보’들 말이다.


다시, 삶의 빈칸을 채우며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매달렸던 정답들—누가 옳은지, 누가 이단인지, 누가 더 거룩한지—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남는 유일한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끝까지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는가.”


​세상은 바보를 비웃지만, 신은 바보의 눈물에서 당신의 얼굴을 본다. 나는 오늘도 바보가 되기를 간절히 연습해 본다. 그러나 그게 쉽지가 않다. 바보가 바보들에게 남긴 그 서툰 진심을 조용히 다시 읽으며, 내 삶의 여백에 이렇게 적어 넣는다. "이제 다시, 나를 바보라고 고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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