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나를 고쳐 쓴다(23)

제23화, 비움은 모든 소리의 존재와 근원이다

by 오엔디

​모든 악기의 소리는 '비어 있음'에서 태어난다.

​가야금의 몸통이 텅 비어 있지 않았다면, 그 청아한 울림은 결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거문고의 묵직한 저음도, 해금의 애잔한 떨림도 모두 비어 있는 공간이 허락한 선물이다.


서양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도 예외는 아니다. 연주자의 손은 현을 켜지만, 그 가느다란 떨림을 증폭시켜 거대한 선율로 만드는 것은 악기 내부의 고요하고 어두운 빈 공간이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채워야만 소리가 난다고 믿는다.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악기는 우리에게 정반대의 진실을 가르쳐 준다. 아무리 값비싼 현을 걸고 화려하게 장식해도, 속이 꽉 차 있는 나무토막은 결코 울리지 않는다. 소리는 죽는다.


​비움이 있어야 비로소 울림이 생긴다. 그 막막한 비움과 팽팽한 긴장의 조화 속에서만, 각자의 고유한 목소리가 태어난다. 삶도 그러하며, 글쓰기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짊어질수록 탁해지는 것들에 대하여


​살아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짊어진다. 켜켜이 쌓인 경험과 성취, 떨쳐내지 못한 상처와 후회, 차마 내뱉지 못한 무거운 생각들까지. 마음의 창고에 짐이 쌓일수록 영혼의 울림통은 좁아진다. 마음은 무거워지고, 말은 장황해지며, 글은 쉽게 탁해진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다. 무언가를 채우는 일보다, 이미 차 있는 것을 비워내는 일이 수만 배는 더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평생 스스로를 ‘바보’라 낮추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비움의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한 분이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그 짧은 고백 속에는 삶을 가볍게 만드는 거대한 지혜가 담겨 있었다. 비우지 못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려 애쓰지만, 진정으로 비운 사람은 굳이 자신을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의 말과 침묵 사이에는 늘 넉넉한 여백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 텅 빈 공간에서 각자의 위로를 건져 올렸다. 그 여백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울림이었다.


​성철 큰스님 역시 그러했다. 그의 수행은 지식을 쌓아 올리는 공부가 아니라, 자신을 깎아내고 내려놓는 연습에 가까웠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그리고 준엄한 진리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그는 일찍이 통찰했다. 욕심을 덜어내고, 번뇌를 비우고, 마지막에는 ‘나’라는 자아마저 놓아버리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정진은 완성되었다. 그에게 비움은 깨달음의 끝이 아니라, 가장 정직한 출발점이었다.


​덜어냄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경지


​이 비움의 철학은 특별한 성인의 삶에만 머무는 관념이 아니다. 우리 곁의 예술과 삶, 일상 속에서도 이 진리는 서글프게 빛나고 있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배우들의 인터뷰를 듣다 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연기를 잘하려 애쓸수록 오히려 연기가 어색해졌다는 고백이다. 감정을 억지로 채워 넣고, 표정을 세밀하게 계산하며, 대사에 의미를 덕지덕지 덧붙일수록 화면 속의 인물은 생명력을 잃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기’를 배우게 되었다고 말한다.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내기보다 마음을 비우고, 인물을 설명하기보다 그저 그 공간에 존재하는 것. 배우가 자신을 비워낸 그 찰나, 카메라는 비로소 인물의 미세한 숨결과 흔들리는 눈빛을 담아낸다. 관객은 설명되지 않은 그 여백에서 진짜 감정을 느낀다.


​요리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일정한 경지에 이른 셰프들은 더 이상 새로운 재료를 더하지 않는다. 오히려 뺀다. 화려한 양념을 줄이고, 원재료의 본질을 믿으며, 불의 세기와 기다림의 시간에 집중한다. 처음에는 화려한 색감과 복잡한 조합이 눈길을 끌지만, 결국 혀끝에 오래도록 남는 맛은 가장 단순하고 정갈한 접시에서 나온다. 불필요한 장식을 비워낼수록 식재료는 비로소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매일 아침 마시는 바리스타의 커피 한 잔 역시 정교한 비움의 결과물이다. 좋은 커피는 무언가를 첨가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물의 온도와 추출 시간, 원두의 분쇄도를 치밀하게 조절하며 쓴맛과 잡미, 불필요한 성분들을 하나씩 걷어내는 과정이다. 그렇게 찌꺼기를 비워낸 자리에서 원두 본연의 화사한 향기와 단맛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한 잔의 커피를 내리는 행위는, 어쩌면 매일 아침 행하는 작은 수행과도 같다.


​마음을 씻고, 문장을 비우다


​우리 선조들은 책을 읽기 전, 반드시 몸부터 깨끗이 씻었다. 그것은 단순히 청결을 위한 의식이 아니었다. 하루 동안 마음바닥에 가라앉은 생각의 먼지와 감정의 찌꺼기를 씻어내는, 일종의 ‘비움의 의례’였다. 독서는 지식을 머릿속에 채워 넣는 행위이기 이전에, 먼저 마음을 비워 글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태도였던 셈이다.


​그래서 옛 글들은 느릿하고 여백이 많다. 모든 것을 시시콜콜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서늘한 침묵 속에서 독자는 오히려 자기만의 소리를 듣고, 글쓴이의 숨결을 느낀다.


​이제 나의 글과 삶을 고쳐 쓰려한다.


​글 위에 무엇을 더 채워야 할지를 고민하기보다, 무엇을 덜어내야 글이 숨을 쉴지를 먼저 고민하려 한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잔뜩 힘을 준 문장이 아니라, 담백하게 숨 쉬는 문장을 쓰고 싶다. 독자를 가르치려 드는 설명조의 글보다는, 독자의 마음속 빈 공간에 들어가 스스로 울리는 글을 쓰고 싶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채우려 애쓰기보다, 내 마음의 방에 한 칸의 빈자리를 허락하는 용기를 배우려 한다. 내가 비워질 때 비로소 타인의 이야기가 들어올 수 있고,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들이 내 안에서 공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워진 자리, 언제나 새로운 소리가 찾아온다.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애써 꾸미지 않아도 괜찮다. 내 안의 울림통이 충분히 비워져 있다면, 소리는 스스로 찾아와 아름답게 울릴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낮은 말씀에서, 성철 큰스님의 서늘한 침묵에서, 배우의 멈춤과 요리사의 단순함, 그리고 바리스타가 건네는 한 잔의 투명한 커피에서 우리는 이미 그 진실을 마주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 자신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여행하는 존재들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 소리는 밖으로 내지르는 외침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울림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울림은 오직 '비움'이라는 비옥한 토양 위에서만 시작된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나를 조금 덜어낸다.

그 텅 빈 곳에서, 가장 나다운 소리가 조용히 태어나기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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