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자주 부재중이었다 분명 그곳에 있으면서 읽었다는 숫자 ‘1’만 핥고 지나간 자리 그것뿐이었다
나는 오래 그 검은 유리창을 닦았다 입김을 불어도 성에만 차오르는 아무것도 살지 않는 동토(凍土)를
너의 계절은 늘 새벽에만 찾아왔다 나라는 대합실에 잠시 몸을 녹이다가도 해가 뜨면 비겁한 퇴근을 서두르는 너 정말 편안한 사람은 타인의 수면을 발로 차지 않는다는 걸 너는 끝내 모르는 척했다
너는 참 성실하게도 도망을 쳤다 어른의 문장을 빌려 쓴 채 아이의 걸음마로 비상구를 향해
진득한 슬픔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며 너는 늘 달콤한 도파민의 냄새를 따라 책임져야 할 고통을 쓰레기통에 던져두고 새로운 자극의 꽃밭으로 건너갔지
문 뒤에 숨은 네가 던진 마지막 말 "지친다, 집착" 내 간절함을 병명(病名)으로 갈아 끼우고 너는 비로소 홀가분한 가해자가 되었다
너에게 대화는 성장이 아니라 항복이었나 봐 마주 볼 용기가 없어 등을 보이고 뛰면서 따라오는 내 발소리가 무섭다고 울어버리는 너는 참 가련하고도 징그러운 연출가였다
죄책감은 너에게 너무 무거운 옷이었나 봐 너는 늘 알몸으로 도망치는 법을 배웠고 남겨진 나는 네가 벗어던진 비겁함을 빨래하듯 헹구며 밤을 지새웠다
사랑의 무게를 견딜 근육이 없어서 너는 늘 관계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깨진 조각에 발을 베이는 건 언제나 나였고 너는 제 손끝에 피가 묻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신발을 고쳐 신고 멀리 달아났다
너의 평화는 고결함이 아니라 나의 소멸을 벽돌 삼아 지은 비겁한 진공 상태 스스로의 감정조차 마주할 눈이 없어서 너는 늘 거울을 깨뜨리고 살겠지
그 서늘한 집터 아래 묻혀버린 건 나였다
너는 지금쯤 원하던 대로 또 다른 자극의 품속에서 웃고 있겠지 "집착하던 그 사람에게서 겨우 도망쳤어"라며 네가 쓴 비극의 주인공을 연기하고 있겠지
나는 이제 너의 그 얕은 수심(水深)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