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영화 보고 싶었다. <조조할인>이라는 노래처럼 낭만적일 것만 같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대구 동성로에 위치한 극장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혼자서 티켓 끊는 법, 조조영화 할인 법, 극장의 자리는 어디가 좋은지 주변 사람들에게 팁도 얻었다. 매표소에 가 한 장이요,라고 말한 뒤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드문드문 자리가 조금씩 차 있었다. 혼자 영화 보러 온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다소 안심이 되었다. 중간보다 조금 뒷자리, 화장실 가기 편한 통로 쪽 좌석에 앉았다. 당시 본 영화는 <올드보이>였다.
영화가 마친 후 더 이상 어두컴컴한 상영관 안에 앉아있기 싫었다. 빛을 보고 싶어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나왔다. 도대체 왜, 이 영화를 혼자 봤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내용도 찜찜하고 머릿속에 생각나는 장면은 큰 창 아래 요가를 멋지게 하는 배우의 모습과 산낙지를 우걱우걱 입에 집어넣는 주인공의 모습뿐이었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도 계속 찜찜했다. 다시는 영화는 혼자 보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그렇게 <올드보이>는 수많은 찬사 속에서도 내 기억속에서 희미해져갔다. 그러다 얼마 전 최진석 교수님의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에서 언급된 <올드보이>를 보고 아차 싶었다. 한국 영화계는 올드보이를 전후로 많은 것이 갈린다고 했다. 최진석 교수님은 영화를 보면서 내가 관객이 됐다고 느낌을 받은 한국 영화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이 전의 영화는 배우들이 대사를 통해서 관객들이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말해주니 관객들은 그저 영화를 수동적인 자세로만 본 것이었다. 전 영화들이 상업적인 측면이 강했었더라면 비로소 <올드보이> 이후로 영화에 예술성이 접목이 된 것이다.
스크린 속에서 배우가 많은 말을 하지 않고 관객들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힘, 이 힘은 감독이 관객 수준을 믿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라 책에는 언급한다.
생각해 보면 당시 <올드보이>에서는 대사보다는 영상들이 많이 생각난다. 미술실의 풍경과 시골길의 다리, 군만두, 등 말그대로 아직도 장면들이 기억에 남아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해석과 각자 독자들이 있는 생각들이 다양했을 터이다. 심오한 작가의 의도를 생각지 못하고 당시 영화를 이해하기에 다소 어린 관객이었던 나는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지막 주인공이 혀를 자르는 장면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철학적 주제, 촬영기법, 등 당시에는 파격적인 이유로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 또한 세계에서도 칸 영화제에 수상을 하면서 영화는 승승장구했다.
그날 아침, 혼자 본 영화 <올드보이>는 처음엔 그저 불쾌하고 낯선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책을 통해 다시 영화 제목을 접하니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단순히 조조영화를 그것도 혼자 보겠다고 갔던 그 순간, 나는 한국 영화사의 전환점에 관객 숫자 하나를 보태며 함께 있었다. 아주 특별한 영화의 역사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오늘 김혜련 작가님의 <내 마음을 만나는 시간> 저자 특강을 들었다. 그녀는 빠르게 달려온 삶 속에서 속도를 줄이니 시야가 넓어졌다고 고백했다. 예술 앞에서도 적용해 본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예술에서도 속도를 조금 줄여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감상해 보고 생각해 본다. 미처 보지 못했던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깨달음과 메시지가 보일 것이다.
오늘 불편했던 감상이 내일은 성찰이 될 수도 있고 지금 지나쳤던 장면이 언젠가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모일 때 우리는 비로소 ‘관객’이 아니라 최진석 교수님의 말대로 '사유하는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