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꿈

2024.01.09

by Karma

한 소녀가 있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규정에 맞는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친한 친구 두세 명과 놀며, 태어나서 한 번도 야자를 째본 적이 없는

간이 작은 학생.


공부에는 얼마든 돈을 써도 너그러웠던 부모님의 지원 덕에 시험기간에 답 맞출 때 그녀의 목소리는 그나마 영향력을 발휘했고, 모나지 않은 성격 덕에 학기 초에 반장 몇 번 했었던

평범한 범생이.


명확한 꿈이 있다기보다는, 성적순으로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대학에 들어가 취업률이 좋은 과로 가는 게 당연한 줄 알았던

대치 목동의 공장형 양성인재.


그런 재미없는 소녀에게도 나름 학창 시절 열정적으로 심취했던 대상이 있었다.

사실 미적분, 삼각함수, 도치법은 그녀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 글을 쓰는 것, 노래를 하는 것.

그게 그녀가 진정으로 몰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수학의 정석 안쪽에는 각종 그림이 가득한 이면지가 한두 장 껴 있어서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교내 합창 경연대회를 할 때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다가 쓰러진 적도 있다.

친구들과 릴레이 소설 쓰기를 하며 야자시간에 공부하는 척 열심히 글을 썼다.


물론 그때는 공부 외에는 다 즐거웠기에 하나의 일탈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치고 싶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단순한 도피처였다기 보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안식처였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찐 서른이 되기 전, 지독한 아홉수를 겪고 시간적 여유가 생긴 지금

내가 제일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보려고 한다. 지금의 여유는 마냥 불안하고 지루한 시간이 아니라 행복한 일을 하며 나 자신을 되찾고 정비하기 위해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것을 믿는다.

나 자신을 잘 알게 되면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하나의 단단한 자아가 되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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