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멈추게 하는 시 한 모금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나는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 밤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 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
워크맨은 귓속에 몇천 년의 갠지스를 감고 돌리고 창틈으로 죽은 자들이 강물 속에서 꾸고 있는 꿈 냄새가 올라온다 혹은 그들이 살아서 미처 꾸지 못한 꿈 냄새가 도시의 창문마다 흘러내리고 있다 그런데 여관의 말뚝에 매인 산양은 왜 밤새 우는 것일까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 게스트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 김경주, 「내 워크맨 속 갠지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문학과 지성사, 2006 초판, 2012 재판
음악이 울음이 될 때가 있다. 어떤 음악은 울음에서 자라난다. 그런 음악이 가진 울림은 사람의 귓속에서 남몰래 자라난다. 그리고 사람은 12살 사춘기를 지나며 이 조그맣고 단단한 울음들을 꺼내어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한 사람만을 위한 불이다. 찬바람이 심한 날이면 꺼질까 두려워 혼자 떨어야만 한다.
우리는 모두 방랑자다. 몸을 누일 곳은 있어도, 마음을 누일 곳이 없어 어디선가 “쭈그려 앉아서 한생을” 떤다. 시의 화자는 그런 외로움이 사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몇천의 갠지스”를 타고 “꾸고 있는” 혹은 “꾸지 못한 꿈 냄새”를 풍기는 외로움 말이다. 모든 창문에는 그 꿈 냄새가 “흘러내리고 있다”
울음은 자신의 외로움을 마주 보는 일이다.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듯 깊고 아득한 “내 몸의 이역(異域)들”을 쓰다듬고 만져보는 일이다. 그렇게 사람은 자신의 외로움을 매만지기 위해 자기 몸의 일부를 “한 점 열”로 떨어뜨린다. 더는 내 것이 아닌 울음이 떨어지고, 다시 음악은 “푸른 모닥불”로 부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