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멈추게 하는 시 한 모금
누구야
너는 묻고
아무도 아니야
내가 대답한다
우리는 잡았던 손을 다시 잡는다
돌던 운동장을 다시 돈다
운동장은 어디서 끝나니
너는 묻지 않았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 지나쳤던 나무는
어디서 시작했는지 알 듯도 한데
벌써 나무는 몇 번이나 멀어졌는지 모른다
눈이 왔으면 좋겠다
너는 혼잣말을 하고
그러면 발자국이 생길 거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임승유, 「연애」,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 지성사, 2020
비극이란 운명을 피하려고 애쓰는 일이 결국 운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예언을 피하려 자신이 살고 있는 코린토스를 떠나지만, 이로 인해 결국 예언은 완성된다. 관계의 비극도 그러하다. 이 끝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사람은 이를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같은 결과를 얻는다.
시의 연인은 같은 운동장을 맴돌고 있다. 매번 같이 먹는 식사, 같이 보는 영화, 똑같은 대화들이 이어진다. 계속 같은 일상이다. 그들은 이렇게 “잡았던 손을 다시 잡는다” ‘다시’라는 말속에 수많은 반복이 어지럽게 굳어가고 있다.
“누구야/너는 묻고/아무도 아니야/내가 대답한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은 비어있는 믿음이다. 바로크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여 상처를 만져본 도마의 의심에 관심을 가진 건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까.
이 관계의 운명을 아는 ‘나’는 구태여 ‘끝’이 어디인지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야 ‘끝’이 오지 않을 것이므로. 하지만 ‘너’는 “눈이 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나’는 “발자국이 생길 거야”라고 생각한다. 발자국이 생기면 같은 곳을 맴돌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운동장을 계속 맴돈다. 밖은 없으니까. 언젠가 눈은 내리고 그들은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게 될 것이다. 비극의 예언은 이렇게 다시 이뤄진다.
하지만 비극의 예언자는 항상 자기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