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처가 반짝이는 '별'이 되어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밤하늘이 되기를”
상처가 밤하늘의 별이 된다는 말은 며칠 전 상담학회에서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저 표현의 본래 시작은 누구인지 모르지만 결국 그날 내 가슴에 도착하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보면 세상이 어두워진 시간에 기숙사로 걸어가게 된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다 확 트인 밤하늘을 보면 어둡고 먹먹한 그 공간에 반짝이는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희미한 점들도 있지만 유난히 자신의 위치를 밝히는 그런 녀석들도 있다. 꼭 자신을 알아봐 달라는 듯 아우성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귀여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작은 별들이 위용을 떨기엔 너무나 넓은 하늘이며, 짙은 어둠에서 드러나는데 그들의 힘이 매우 미약해 보인다. 아무리 시골구석에 위치한 대학교라고 해도 도심 이어서일까, 내 기대와는 다르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밤하늘이기보단 평범한 밤하늘에 더 가깝다.
내 기대에는 히말라야와 백령도에서 보았던 밤하늘이 생생하다. 두 장소 모두 청정지역에다가 인공 불빛이 하나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도시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장엄함이 밤하늘에 펼쳐진다. 그중 하나를 꼽자면 히말라야 등반 중 텐트 앞에 앉아 그윽이 바라본 고요한 밤하늘이다. 분명 들리는 건 차가운 바람의 날카로운 소리뿐이었지만, 저 넓고 무한한 우주에 강렬히 빛나고 있는 수백 수천 개의 별의 합창곡이 마음속에서 울려 퍼짐을 느꼈다. 그때의 감동은 오직 한 가지였다. “아름답다…”
심리학을 배우는 처지에서 영겁(永劫)의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자기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과정들과 현재 진행 중인 상황 속에서 고통과 마주 앉기 고단함을 고백한다. 어떤 문제가 수면으로 올라왔을 때, 포기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으며, 심지어 그 고통의 원인까지 파고 들어가 직면한 ‘상처’를 도려내고 싶은 간절함은 자연스레 원망과 슬픔으로 이어진다. “차라리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남들은 겪지 않는 일을 나 혼자만 당하고 힘들어하고 있어. 세상은 불공평해”, “나는 이 과거에서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등 넋두리는 대상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나를 향해 돌아온다. 그러면 끝내 현실은 변하는 것이 없고 나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외로움’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강렬한 동기이자, 그 강렬함에 취해 존재를 비틀거리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감정이다. 난 이 감정과 무척 가깝게 지내왔다. 과거 학창 시절부터 외로움은 내 삶의 가장 큰 화두이자 주제였다. 친구라는 무리 속에 껴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비어있음과 동시에 타인의 평가에 극도의 두려움에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선 관계를 만들어야 했지만, 그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내 마음의 문을 두들길 ‘상처’가 너무 두려웠기에 난 혼자임을 선택했었다. 고요하다 못해 정적인 집안의 공기에 압도당하기 싫어 나는 외로움을 잊기 위해 컴퓨터 가상공간을 나의 안식처로 삼았었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게임 속에서 나는 약 30~40분 동안 함께 전우가 되는 다른 유저들과 짧은 관계에서 만족을 느끼고 근근이 살아갔다. 몇 년을 그렇게 살았을까, 내가 애써 등 돌리고 무시했던 외로움은 결국 나를 떠나지 않고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힘들게 군대를 전역하고 1여 년간 아르바이트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었다. 정말 좋은 사람들과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조금씩 볼 수 있었다. 변화의 순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단계적으로 나를 찾아왔고, 나는 예전에 혼자였던 나를 조금씩 잊어갈 수 있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나를 재탄생시키는 과정은 흥분과 감동을 선물해 주었다. 사람들 속에서 내 상처를 치유해 가고 급속도로 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에너지를 줄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늪에 빠진 채로 눈만 감으면 서서히 사라질 것 같은 외로움이란 존재의 소멸에 수없이 포기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그 보상에 감사함과 소중함을 배웠고, 고통 속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체득해 나갔다.
그렇게 성장의 과정에서 아주 귀한 여자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아름답고 예쁘며 마음의 건강함에 대한 무의식적인 끌림에 나는 그녀와 이성적인 관계를 시작하였다. 어떤 시작이라도 미지의 길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이 나를 기분 좋게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긴장과 불안을 동반하기 때문에 이 관계에 대한 나의 마음도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흥분과 기대의 감정들이 내 등을 힘껏 밀며 용기를 주고 있고 나는 그들의 지지에 힘입고 충분히 사랑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지향했다.
그러나 현실은 질투심이 강해 날기 위한 힘찬 날개를 꺾어 힘을 잃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의 내 등 뒤에 있는 외로움이 고개를 슬쩍 들어 나를 보며 소름 돋는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 하나만으로도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란 비합리적인 신념을 스스로 재 생산해 낸다. 더불어 그녀가 너무 보고 싶고 사랑하고 싶지만, 그 마음의 이면엔 나도 엄청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용암처럼 끓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 표현이 순수한 사랑의 전달을 포함하면서도 동시에 나에게도 사랑을 표현해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라는 사실을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추론해 볼 수 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없어지고 완치된 줄 알았던 나의 외로움이 아직도 내 등에 매달린 채 상대방의 사랑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짓궂게도 나의 외로움이 요구하는 사랑은 절대 만족하지 아니하다. 한도가 없으며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금세 새로운 갈증을 호소한다. 입이 쩍쩍 갈라져 물을 갈망하는 모습이 굉장히 보기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 피하고 싶은 느낌은 비단 나에게만 한정되는 부분인 건가. 우리에겐 모두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기에 상대방의 만족할 줄 모르는 그 요구에 대하여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건 결코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그렇게 관계가 틀어지고 상대가 지쳐 떠나갈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인 위협도 나만의 고민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나는 외로움을 ‘관계적 외로움’과 ‘실존적 외로움’으로 구분하고 싶다. 인간은 혼자 태어나서 결국엔 혼자 죽는 실존적인 외로움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타인과 융합되고 싶어도 그것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기에 그것에서 느끼는 불안은 우리의 평생 과제이자 모두가 가지는 아주 공평한 외로움이다. 두 번째로 관계적 외로움은 대인관계를 맺으며 그 속에서 가지는 분리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고 이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유발, 발전할 수 있는 평등하지 못한 감정이다. 타인은 어떤 외로움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초점을 나에게만 맞춘다면 나는 관계적 외로움의 영향이 크다고 결론 내린다. 나의 양육환경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음은 기정사실로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상처’란 이름으로 타인에게서 사랑을 갈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관계적 외로움에서 요구되는 사랑은 밑도 끝도 없기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협할지 모르고, 결국엔 이별이라는 더 큰 아픔이 도사린다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괴로운 것이 사실이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면 어릴 적 받지 않을 수 있었던 상처들과 그 원인에 대해 분노하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그 상처가 없었더라면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들지 않아도 될 텐데, 안타까움을 넘어 속상하고 나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낀다. 관계적 외로움을 일시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정도를 넘어선 사랑에 대한 지나친 갈구는 상대방을 포함해 나 자신도 지치게 만든다.
여자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녀의 전 남자친구가 이런 측면에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요구했고 그녀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의 유아기적인 사랑에 대한 갈망에 비난의 화살을 쏘기 전에 나는 내 모습부터 바라본다. 나는 그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을까? 그가 힘들었던 만큼 나도 힘들지 않을까? 건강함을 지향하는 나에게 다시 나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것은 전혀 유쾌하지 않으며, 복잡한 현상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막막함을 가진다.
그러나 나는 그 상처를 용기 내서 들여다볼 것이다. 상처가 지나친 사랑을 끊임없이 요구한다면, 나도 그 상처를 포기하지 않고 바라볼 각오가 되어 있다. 마음의 아픔에 대한 원망과 부정은 결국 내 과거에 대한 부정과 연결되고, 그만큼 나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상처들을 별로 만들고 싶다. 최대한 강렬하게 반짝이는 별로 만들어서 내 공허하고 어두운 마음에 하나둘씩 새겨놓고 싶다. 심심하고 무난한 밤하늘이 아닌, 누군가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에게 무한한 감동과 경외심을 줄 수 있는 그런 밤하늘이 되고 싶다. 그때 히말라야에서 느꼈던 잊히지 못할 가슴 벅찬 신비로움처럼, 나의 밤하늘도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로 무한한 공간임을 증명하는 그런 삶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그 별 중 가장 밝게 반짝이는 별이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생각도 함께 해본다.
상처를 나만의 별로 만든다는 것은 그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수용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대된다.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내 밤하늘을 바라보면 어떤 마음을 가질까? 어떤 마음이든지 후회는 없을 것이지만, 이 지면을 빌려 작은 바람을 남기고 싶다.
히말라야에서 느꼈던 그 감동처럼, 내 밤하늘이 더할 나위가 없이 아름다워지고 싶다.